2012년 12월 8일 토요일

[한겨레] 한홍구의 현대사 칼럼: 유신과 오늘

세상이 바뀔까 두려워하는 수구세력이 “세상을 바꾸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것은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유신세력이 이번 대통령 선거를 과거 세력과 미래 세력의 대결이라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다. 혹자는 이번 선거를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고 하고, 또 1차 티비 토론 이후에는 다카키 마사오 세력 대 김대중 · 노무현 세력의 대결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박정희의 네 번째 대통령 선거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국가예산의 10%를 퍼부었던 1971년 대선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또 다시 없도록” 운운하며 군복을 벗는 소회를 밝혔다. 20세기 지구의 곳곳에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수많은 군인아저씨들은 거의 다 군복을 입고 통치했지만,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야 했다. 남북분단이 동서냉전의 대리전을 수행하던 현실에서 미국은 자신의 쇼윈도에 군복이 걸려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부 일각에서는 원래의 공약대로 군은 깨끗하게 원대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은 군정을 연장하라고 데모하기도 하고, 박정희는 오락가락 갈팡질팡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로 가장 표차가 적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승부가 갈린 것은 윤보선이 박정희의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된 좌익 전력을 거론하며 제기한 사상논쟁이었다. 사상논쟁은 윤보선의 기대와는 달리 역효과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좌익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해 여기서 승부가 갈린 것이다.
평생 권력을 움켜쥐고자 했던
박정희는 두 번의 임기뒤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고
유신쿠데타 통해 국민들이
대통령 뽑을 기회마저 빼앗았다
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배운 건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유신의 부활이냐 종말이냐
우린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재격돌했다. 야당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신민당이라는 통일대오를 만들었지만, 후보로는 윤보선을 다시 내세웠다. 51세 박정희와 71세 윤보선의 대결,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박정희와 서울의 대부호 양반가의 후예 윤보선의 대결은 구도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경제개발계획이 궤도에 오르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돈이 풀리면서 국내의 경제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박정희의 독재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고, 박정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박정희는 4년 전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윤보선에게 116만 표 차이의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제3공화국 헌법은 4년 중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중임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55세가 되는 박정희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삼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달 여 후인 6월8일에 치러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초유의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확보한 개헌가능 의석을 이용하여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했다. 다른 신문들은 ‘통과’라 썼지만, 동아일보만은 언론의 자존심상 ‘통과’라는 말을 쓸 수 없어 ‘처리’라고 했다고 한다.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비록 야당이 패배하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선거로 꼽힌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 둔 시점에서 신민당 유진오 총재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 야당으로서는 1956년과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갑자기 세상을 뜬 데 이어 또 다시 불행한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이때 신민당의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출마한 신민당 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돌입했다. 여기서 이변이 발생해 2위였던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의 6·8총선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김대중의 지역구인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 정도로 김대중을 싫어했다. 그런 김대중과 경쟁하는 것은 박정희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이렇다 할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윤보선과는 달리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등 참신한 공약을 쏟아냈다.
박정희는 사회의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화시킬만한 능력도, 품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한 것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부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박정희 측의 선거에 깊이 간여했던 강창성이 뒤에 고백한 것처럼, 이들은 “모든 부정을 저질러서 박 후보의 당선을 만든 것”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242억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선거에 국가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700억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런 엄청난 부정을 자행하고도 정치신인에 가까운 김대중과의 표차를 94만 표밖에 벌리지 못했다. 1956년의 조봉암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떠돌았다.
유신체제 의전서열 2위와 최태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총통제 문제였다. 김대중은 이번에 박정희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하면 박정희가 총통제를 실시하여 영구집권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김대중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서 이번이 국민여러분께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마지막 선거라고 호소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박정희는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유신쿠데타를 통해 국민들에게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에게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일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렸다. 당시 국민학교에서도 반장은 학생들이 직접 뽑았는데, 국민들은 제 나라의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72년과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두 번이나 더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이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놀음일 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구호는 복잡하지 않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16글자에 집약된 뜻은 한 마디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
박근혜 후보를 흔히 유신공주라 부른다. 그런데 공주라는 말은 가끔씩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74년 여름 이후 박근혜는 유신체제에서 어린 공주가 아니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왕비가 없는 상태에서 공주는 유신체제의 의전서열 2위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섰다. 박근혜는 외모는 어머니 육영수의 온화한 모습을 많이 닮았지만, 속은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의 생리와 운영방법을 배웠지만, 불행하게도 박근혜가 보고 배운 시기의 박정희는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언로가 막혀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부들부들 떨고 재떨이 집어 던질지언정 기자들하고 논쟁도 했고 대드는 기자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그래도 기자들과 막걸리를 앞에 두고 때로 고성이 오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던 반면, 박근혜는 처음부터 얼음공주였다. 선거의 핵심과제인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힘들게 모셔온 김종인 전 의원조차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상황에서 박근혜의 눈이 발하는 레이저광선 앞에 모두들 침묵해버리고 만다. 최근 교통사고로 숨진 이춘상 보좌관의 죽음은 그가 박근혜 후보에게 그래도 불편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의 90퍼센트 이상은 구국선교단 총재라는 최태민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주한미대사 버시바우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2007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소문의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동생인 박근령 등 최측근이나, 박정희를 가장 열심히 찬양한 조갑제나 요새 TV토론에 보수진영을 대표하여 가장 빈번히 얼굴을 내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같은 사람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박근혜는 박정희 사후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곧 이사장 직을 사임하고 평이사로 내려앉았다. 영남대학은 영남학원 상임이사 김정욱, 곽완석 사무부처장, 손윤호 영남병원사무장, 조순제 영남투자전무 등 박근혜가 임명한 측근 4인과 이사진이 1인당 2천만 원이라는 거액(현재는 2~3억 가치)을 받고 30여명을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들과 이사진은 마땅히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박근혜와 측근들이 영남학원에서 영원히 손을 떼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때 박근혜와 함께 사임한 이사진은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김창환, 손미자 등인데, 이들은 모두 정수장학회의 이사를 지냈다. 이들 중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김창환은 최태민의 사촌,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 아들, 손윤호는 최태민의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학원 이사진에서 부정행위로 쫓겨난 자들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여전히 이사로 기용했다. 현재 박근혜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진들의 골격은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가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시바우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평한 최태민의 그림자가 박근혜가 흉탄에 어머니를 잃은 황망했던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 80주기, 다카키 마사오를 생각한다
볼셰비키혁명을 촉발했다고 일컬어지는 제정러시아 시대의 괴승 라스푸틴은 황제까지 혹하게 만들었으나, 박정희가 최태민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자 술 친구로 10 · 26 사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김계원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처럼 박정희는 “그 X(최태민)가 그 X(박근혜)를 홀렸다”며 최태민과 박근혜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김계원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최태민은 박정희보다도 5살이나 많았는데, 최태민의 존재는 박정희는 물론이고 비서실장 김계원, 민정수석 박승규, 정보부장 김재규 등의 골칫거리였다. 운명의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는 항소이유서 보충서에서 10·26사건의 먼, 그러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박정희를 친형처럼 따랐던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 계기였던 것이다.
올해 대선일인 12월19일로부터 정확히 80년 전인 1932년 12월19일 일본의 처형장에서 벌어진 일.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린 뒤 10m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켜 핏자국으로 일장기 모양을 만들었다.
박근혜는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본 따 새마음 운동을 전개했다. 최태민이 부추긴 공주놀음에 푹 빠져 아버지 속을 지지리도 썩인 딸은 나이 지긋한 교장선생님이나 지역의 원로인사들을 모아 예행연습까지 시키며 몇 시간 씩 줄지어 세워놓고 효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영애님 오셨다고 큰 절을 했다. 육영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도 이런 절을 받지는 않았다며 김재규는 왜 어린 박근혜가 노인들 절 받느냐고 탄식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최태민 문제로 골치를 썩으며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고 봉건시대의 임금마냥 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행하는 등 최태민을 떼어 놓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썼으나 울며불며 난리 치는 박근혜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에미도 없는 게 시집도 안 가고 애쓰는 게 불쌍하다”는 박정희의 동정이 화를 키웠다면, 지금도 박근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일부 대중들의 값싼 동정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 과제는 경제민주화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한 발 오른 쪽으로 가긴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제헌헌법은 국가보안법에 깔려 질식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박정희라는 동일인물에 의해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나 짓밟힘을 당했고,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으면서 민주주의가 소생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또 다시 박정희의 경호장교였던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학살을 겪어야 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간신히 정치적 민주주의만을 회복했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민주화의 과실은 일반 시민들보다도 재벌과 관료와 수구언론이 따먹어 버렸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와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서 양극화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6월항쟁으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한국사회는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명박이 가져온 역사의 퇴행은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박정희의 부활이냐, 정치적 민주화에 이은 경제민주화를 성취하느냐의 갈림길에서 2012년의 선거를 치르게 된다.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의 80주기가 되는 날이다. 일제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윤봉길 의사를 처형했다. 일제는 25세의 청년 윤봉길의 무릎을 꿇려 낮은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렸다. 그리고 10미터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윤봉길 의사의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였으니 저들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으로 일장기를 그린 것이다. 박정희가 하필이면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명치유신의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골라 자신의 제삿날로 삼은 것도 심상치 않은 우연이지만, 윤봉길 의사의 80주기 되는 날이 18대 대선일인 것도, 그 날이 다카키 마사오를 숭상하는 세력과 민주세력의 한판승부가 벌어지는 것도 범상치 않은 우연이다.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프레시안] 론스타 소송, 한미 FTA와 ISD

김 익 태 변호사

미국의 자동차 번호판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주마다 번호판의 디자인과 문구가 다르다. 내가 살던 일리노이 주는 링컨의 고향인 이유로 "링컨의 땅(Land of Lincoln)"이다. 미연방에서 두 번째로 큰 주인 텍사스 주는 "론스타의 주(Lone Star State)"이다. 1845년에 26번째 주로 미연방에 가입하기 이전까지 별개의 독립 국가였던 텍사스 공화국의 국기에 담겨 있던 별 모양의 상징이었던 론스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론스타는 텍사스 주의 상징이다.

이 텍사스 주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고향이며 최근 대한민국을 상대로 투자자-국가 소송(ISD)을 제기한 '먹튀' 자본 론스타의 고향이기도 하다. 외환위기를 틈타 헐값에 외환은행을 인수하고 꽤 많이 챙겨서 작년 말에 떠난 걸로 알고 있는데, 2조 4000억 원 정도를 덜 챙겼다며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소장을 보자는데 정부는 안 보여준다. 궁금하면 500원 내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알 것 없단다. 2조 4000억 원은 소송에서 패소하면 전 국민이 5만 원씩 부담해야 하는 액수인데도 여전히 비공개이다. 그렇다면 지난번 중재의향서의 경우처럼 론스타가 먼저 보여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결국, 중재의향서에 기초하여 판단을 해보면 내용은 이렇다.

한국과 벨기에가 1976년에 맺은 투자협정에 의하면 벨기에 회사는 한국에서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으로 인한 수익금에 대해서 세금을 물렸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벨기에에 있는 론스타 회사가 페이퍼 컴퍼니라서 한국에 있는 론스타 코리아를 국내 고정사업장으로 판단하고 이에 과세를 했다고 한다. 한데, 문제는 한-벨기에 투자협정에 의하면 페이퍼 컴퍼니는 협정 적용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이 없다. 페이퍼 컴퍼니에 대한 협정 적용 배제 조항을 두었어야 하는데 협정 체결 시 이를 간과하였고 2006년 개정 시에도 역시 간과하였다. 따라서 한국 정부의 과세는 협정 위반이라는 것이다. 법리적으로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두 번째의 주장은 이른바 론스타가 산업자본인지 금융자본인지에 대한 판단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금융당국이 론스타의 자본 성격에 대해서 제때에 적절하게 판단하지 못함으로써 매각이 지연되었고 이로 인해서 론스타는 더 비싼 값에 외환은행을 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최초에 론스타가 한국에 들어올 때는 금융자본이라고 인정해 주고서는 왜 툭하면 자본의 성격에 대해 시비를 걸고 론스타 코리아의 대표를 구속하는 등 괴롭히면서 매각을 지연시켰냐는 말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론스타는 제때에 외환은행을 팔지 못하여 더 많은 매각 이윤을 얻지 못하였고 이는 간접적으로 재산을 빼앗아 가는 행위와 마찬가지이므로 간접수용이라는 주장이다.

법적으로 볼 때 이 주장 또한 설득력이 없지 않다. 한국 정부의 일관성 없는 비밀행정으로 발생한 문제의 성격이 크다. 결국, 금융당국의 무책임하고 비밀스러운 행정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인데, 이로 인한 책임은 고스란히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한민국이 ISD 소송에서 패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득을 보았을 텐데 책임은 국민이 져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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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SID와 한국 사법부 판결이 충돌한다면?
패소하면 억울하더라도 2조 4000억 원만 물어주면 끝인가? 아니다. 사법주권의 문제가 발생한다. 2012년 1월 금융당국은 최종적으로 론스타가 금융자본이라고 판정을 해줌으로써 스스로 면죄부를 발행했다. 이에 국회의원과 외환은행 소액주주들은 2012년 7월 헌법재판소에 금융당국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역시 2012년 7월에, 참여연대는 서울중앙지법에 론스타가 산업자본임에도 부당한 이익을 챙겨간 것에 대해 환수 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건 모두 론스타가 산업자본인지에 대한 판단이 핵심 쟁점이다.

그런데, 론스타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제투자중재재판소(ICSID)에 제소한 이번 ISD 사건의 내용 또한 론스타의 자본 성격에 대한 판단이 핵심 쟁점이다. 같은 내용에 대해서 국제중재재판소와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비슷한 시기에 판단을 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국제투자중재재판소의 심사는 사실관계와 근거법에 대한 해석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법적 해석의 영역과 중복된다.

론스타 사건의 경우, 우리의 은행법 하에서 론스타 자본의 성격에 대한 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국제투자중재재판소가 판단하게 된다. 이 투자중재재판소가 론스타의 손을 들어주면 우리 정부는 ICSID 협약에 의거하여 국내 사법 절차를 통해 배상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내사법 절차는 투자중재재판의 결과를 재차 심사하는 별도의 절차가 아니다. 국내법상의 배상 집행절차일 뿐이다. 3인의 패널이 진행하는 국제투자중재재판은 항소도 불가능하며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판 무효 신청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동일한 사안을 가지고 심사하는 국제투자중재재판소와 대한민국의 사법부의 판단이 충돌할 경우에는 어느 쪽의 판단이 우선할 것인가? 즉, 국제투자중재재판소는 론스타의 손을 들어주고 배상명령을 내렸는데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법원은 론스타에 불리한 판단을 내릴 경우, 국제투자중재재판소의 판단은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판단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한국 사법부의 판단이 무력화될 가능성이 있다. 한미FTA 논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ISD와 사법주권의 문제가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동일한 근거법을 가지고 국내의 사법부와 3인의 국제투자중재재판소가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때, 국내 사법부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중재재판부의 배상 명령을 이행해야 한다. 혹시, 국제투자중재재판소의 무리한 판단에 대해 별도로 국내 사법부가 심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 이 부분에서 사법부의 법리적 고민이 시작된다.

국제투자중재재판소의 보상 명령의 근거는 대한민국이 1966년에 가입한 ICSID 협약이다. 중재기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을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해외투자가 전무하던 사실은 차치하고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시절에 우리는 ICSID의 회원국이 되었다. 이러한 ICSID 협약은 국제조약으로서 헌법 제6조에 의해 국내법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국내법적 성격을 지닌 조약으로 인한 중재재판소의 판단이 헌법적 기준에서 국내법을 심사하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무력화할 수 있는 상황의 발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 헌법재판소. ⓒ뉴시스

미국 연방대법원과 메데인 사건
이 점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의 의미 있는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2008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메데인 사건(Medellin vs. Texas)이라는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 1993년, 18세의 멕시코 국적의 소년 메데인이 텍사스에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소년의 혐의는 입증되었고 소년은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대부분의 사형 확정 판결이 그렇듯이 소년의 변호인은 다양한 절차상의 문제점을 들어 항소하였다. 그중 하나가, 메데인은 멕시코 국적을 가진 멕시코 시민인데 멕시코 대사관에 소년의 체포에 관해 고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9년 체결한 비엔나 협약에 의하면, (미국을 포함한) 협약 가입국은 자국에서 외국인의 체포나 구금 시 지체 없이 자국에 있는 외국 대사관에 그 사실을 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데, 메데인이 체포되었음에도 그러한 사실이 주미 멕시코 대사관에 고지되지 않아서 텍사스 주가 비엔나 협정을 위반하였다는 것이다. 소년의 주장은 기각되었다.

그런데, 몇 년 후인 2003년 멕시코 정부가 메데인과 그 외에 미국에 수감되어 있는 51명의 자국민에 대한 수감 내용을 고지하지 않음을 들어 UN 산하의 국제재판소(ICJ)에 미국을 제소하였다. 이듬해, ICJ는 멕시코의 손을 들어주고 메데인을 비롯한 다른 멕시코 확정범들에 대한 판결과 형량에 관해 미국 법원이 재고할 것을 명령하였다. 사안이 국제적인 이슈로까지 번지자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은 국제재판소가 내린 결정을 따를 의무가 있으니, 사법부는 국제재판소의 판결을 존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2008년 연방대법원은 국제재판소의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비록 미국이 ICJ 가입국이기는 하지만, 국회에서 ICJ의 효력에 관한 상세한 연방법을 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이것은 국제법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이다. 국제조약에 관한 미국 사법부의 지나치게 보수적인 경향성 때문이다. 강대국의 오만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국의 사법 체제를 보호하려는 측면에서 보면, 현재 우리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국제중재법정에 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된 한-벨기에 투자협정은 체결 당시 국회 비준을 거치지 않고 발효되었다. 그런데, 헌법 제60조 1항에 의하면, "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 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2조 4000억 소송을 가능하게 한 한-벨기에 투자협정은 ISD 소송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음으로 인해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서 어떠한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외국인 투자자가 우리의 사법주권까지 무력화할 수 있는 ISD 소송을 바라보며 이제 우리의 사법적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되었다.

2012년 12월 5일 수요일

[프레시안] 안철수캠프의 한계와 오류

고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 

새로운 정치를 향한 안철수 후보의 실험은 야권단일화 과정에서 안 후보가 사퇴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난 거대한 에너지에 비해 현실정치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너무 싱거웠다. 안철수 후보는 출마선언 이후 줄곧 문재인 후보의 단일화 공세에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했으며, 사퇴까지 1%의 지지율도 올리지 못했다. 반면에 문재인 후보는 당내 경선승리 직후부터 사력을 다해 민주당을통합했으며 안 후보를 민주당에서 격리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문재인 후보는 호남과 40대를 중심으로 관망 층으로 남아있던 유권자들을 흡수하여 지지율을 10% 이상 끌어올렸다.

단일화 과정의 승패에는 문재인 후보 측의 선전(좋은 의미+나쁜 의미)도 있었지만, 안철수 후보 진영의 정치적 미숙함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안철수 후보에 대한 지지세는 조직과 세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이나 흔들림 없이 지속될 정도로 매우 견고한 것이었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안철수 후보는 진보성향, 호남, 20~40대의 다양한 연령의 유권자 층에서 문재인 후보보다 더 강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안 후보 진영은 자신의 강점을 하나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말았다.

안철수 후보 진영의 한계와 오류는 가치·노선, 조직·리더십, 전략의 세 가지 차원에서 짚어볼 수 있다.

▲ 캠프 해단식에 나타난 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스타일리시 중도?첫 번째, 안철수 후보 측은 가치·노선을 확고하게 정립해내지 못했다. 안철수 후보의 지지층은 진보에서 중도, 부분적으로는 합리적 보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다. 지지층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은 누구보다 폭넓은 정치세력을 형성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이지만, 이질적 세력들을 통합해내지 못할 때 심각한 정체성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약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미 열린우리당의 실패가 우리에게 보여준 바였다.

문제는 이질적 세력들을 어디에 '중심'을 두고 통합하느냐에 있었다. 내 견해로 그 중심이란 '새로운 진보'였다. 안철수 후보의 정책노선이 진보적으로 가야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우리 사회의 산적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노무현정부와 민주당의 불철저한 노선까지도 극복하고 더 혁신적인 내용의 구체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새로워야 하는 이유는 진영논리, 패권논리, 기득권논리에 사로잡혀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외면해 온 여야의 낡은 정치 틀을 과감하게 깨는 근본적 정치혁명을 요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후보는 출마선언 직후 중도에 방점을 두는 행보에 치중했다. 안철수 후보는 "좀 더 중도로 이동하라"는 내외의 권유를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먼저 정책의 측면에서 '혁신경제'라는 차별화된 담론을 내세운다는 것이 그만 경제민주화를 분리해냄으로써 참여정부의 '성장동력 육성정책'을 연상시키는 기술주의적 한계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다. 이 때문에 과감한 사회경제적 의제가 한 동안 거의 제기되지 못했다. 이런 관성은 막판 TV토론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출마선언 직후 안철수 후보의 행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스타일리시'였다. 진보적 정책과 의제를 충분히 깔지 않은 채 스타일만 앞세우다보니 자연스럽게 중도가 되어버렸고, 문재인 후보보다 개혁성이 뒤처지는 것으로 비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안철수 후보의 행보는 우선순위가 뒤바뀐 면이 있었다. 또 초기에 '덧셈의 정치', '통합의 정치'와 같은 담론들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었다. 정치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려면 권력, 선거, 정당의 패권, 특권, 기득권 구조의 타파를 요구하는 것이 옳았다.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여야 정치권의 무능과 배신을 질타하고 국회에서 당장 필요한 입법조치를 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새로운 정치에 훨씬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안철수 후보가 이런 문제들을 완전히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시점부터 안철수 후보는 혁신경제의 담론이 갖는 한계를 인식했으며 경제민주화의 담론으로 다시 복귀하기 시작했다. 재벌개혁위원회의 설치나 계열분리명령제의 도입, 막판에 나온 노동공약은 문재인 후보보다 진보적인 위치로 자리매김 되었다. TV양자토론에서 문재인 후보가 계열분리명령제 도입 공약을 두고 "재벌해체 아니냐?"고 물었을 때는 역공의 찬스였다. 하지만 타이밍이 많이 늦은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의제의 초점이 정치혁신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그 같은 변화는 별로 커다란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도 안철수 후보는 적어도 정치개혁공약만큼은 계속 중도적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일각으로부터 '반정치' 아니냐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정치권의 기득권·특권을 내려놓자는 문제제기는 안철수 후보 아니면 생각해 내기 힘든 매우 정확한 방향 설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총론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론에 있었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는 정치쇄신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제기하지 못했고, 단일화 협상과정에서 제대로 관철시키지도 못했다. 오히려 '의원정수축소'나 '반값선거비용' 같은 비본질적 문제에 발목이 잡혀버렸다. 특히 이 문제를 가지고 진보적 지식인·언론·시민운동세력과 불화구조를 형성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안철수 후보가 진보개혁진영 내부에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모습에 많은 야권성향 지지자들이 충격을 받고 급격히동요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문재인 후보는 지속적으로 노동, 일자리, 복지 등 경제민주화의 영역을 공략해 나갔다. 진보의제는 어느 사이 조금씩 문재인 후보의 브랜드로 굳어가고 있었다. 문재인 후보에게 '진보개혁'의 영역을 스스로 내준 것은 나쁜 선택이었다. 아직도 한국의 많은 정치전문가들은 선거승패의 최종적 관건은 중도적 유권자를 잡기위한 싸움이라고 믿고 있다. 안철수 캠프 역시도 중도적 무당파 유권자들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전략운영의 커다란 비중을 할애했다.

그러나 한국의 중도층은 양극단을 끌어당기는 중위투표자라기보다는 좌우 양쪽의 세력에 의해 견인되는 스윙보터의 성격이 더 강하다. 한국의 선거정치에서 진보적 세력이 외연을 확대하는 가장 유력한 전략은 자신의 핵심지지자들을 결집시켜 그들에게 열정을 불어넣고, 이슈와 바람을 만들어 투표율을 높이는 데 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치러졌던 수많은 중대선거에서 하나의 법칙처럼 입증된 결과였다. 이슈와 바람이 있을 때는 민주진보가 승리했고, 그것이 소멸되었을 때 보수가 승리했던 것이다.

이렇게 의제를 다루는 데서의 중도주의적 편향, 스타일 정치의 함정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안철수 후보는 지지기반의 응집성과 결집력, 내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에 환호했던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대부분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이런 요인들은 결국 야권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 측이 압박을 가해 왔을 때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단일화 프레임을 얕봤다두 번째로는 전략의 한계였다. 안철수 캠프의 지도부는 전략플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처해 나갔을 뿐이다. 그것을 만들려는 의지도,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능력부족을 메우기 위해 인적 자원을 보강한다든지 하는 생각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무엇보다 단일화 프레임의 위력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필자가 그것의 위력에 대해 5년 전 나름의 경험에 근거해 선제적 대응의 중요성을 누누이 역설했으나 지도부는 안일했다.

안철수 캠프의 지도부는 대중의 정권교체 열망을 과소평가했다. '새로운 정치'와 '정권교체'의 담론을 정교하게 양립시키지 못해 혼선을 빚은 결과 정권교체를 바라는 대중들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단일화 전략과 관련해서 안철수 후보는 양극단을 오가는 모양이었다. 초기에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에 대해서 너무 늦게 반응했고 방어적으로 대했다. 그러는 사이에 호남, 40대 유권자들이 문재인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고, 안-문간의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압박을 느낀 안철수 후보는 결국 11월 5일 광주방문에서 전격적 후보회동을 제의했고, 11월 6일에는 후보등록 전 단일화에 합의했다.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수용은 안 후보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무장해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을 제어할 수 있는 어떤 장치도 없었으며, 후보단일화 시점을 못 박아버린 것은 스스로의 발목을 옭아매는 결과가 되었다.

단일화 프레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안철수 후보 측이 일찌감치 '새로운 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상위 프레임을 만들어야 했다. '미래권력론'과 '정당혁신론'으로 새누리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까지도 기득권 정치의 틀로 묶어놓고, 민주당에 강력한 쇄신압력을 가해야 했다. 문재인 후보와 정책과 정치혁신에서 적극적으로 차별화하면서 최대한 세게 압박하고, 주도권에서의 명백한 우위를 유지해 나가야 했다.

그런 연후에 다음 단계에서는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민주당과 손잡고 함께 가는 것이 불가피함을 중도 및 무당파층에게 설득하면서 민주당과의 융합을 시도해야 했다. 융합의 방향은 낡은 체제를 넘어 새로운 체제로 가기 위한 수권 가능한 미래권력의 형성을 과감하게 제기하는 것이어야 했다. 미래권력의 형성은 정치쇄신-정당쇄신의 기반 위에서 민주당과 안철수 후보 진영이 결합하는 새로운 미래정당 건설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미래'와 '새로움'이라는 키워드 위에서 민주당과 안철수의 장점을 결합하는 정치세력의 형성이야말로 미래권력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이렇게 하면 안철수 후보는 새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민주당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 민주당의 테두리에 갇혀있는 야권성향의 지지층에 효과적으로 사다리를 놓을 수 있었고, 동시에 조직과 세력이 없는 불안한 후보라는 이미지를 일거에 걷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 측은 시종일관 민주당에 지나치게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했다. 민주당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매우 신중한 태도로 일관했는데, 후보야 좀 점잖게 할 필요가 있었다 치더라도 참모들까지도 후보와 똑같은 수준의 태도를 취했었다는 것은 정말 문제였다. 핵심참모들은 민주당에 거칠게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민주당에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민주당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민주당 쇄신이라는 목표를 일관되게 지향하면서 유연하고도 단호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또 안철수 캠프는 민주당에 정당쇄신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않았고, 사실 제기할 능력이 없었다. 정치·정당분야 공약을 끝내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이를 입증했다. 막판에 전남대 강연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통한 '국민연대'라는 방향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강제할 어떤 장치도 없었고, 너무 추상적이었다.

캠프 핵심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세 번째로는 조직·리더십의 한계였다. 안철수 후보 진영의 조직·리더십은 현장 및 대중의 흐름과 유리되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조직은 크게 리더십을 형성하는 코어집단, 활동조직, 추종세력으로 범주를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집단은 바로 코어집단이다. 코어는 철학적 원칙, 역사적 비전과 지식, 기본노선, 실행능력을 공유하는 훈련된 리더십집단이다. 그래서 코어는 철저하게 검증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개인의 명망을 앞세우는 사람, 자신의 권력을 키우는 데 몰두하는 야심가, 직업적 브로커들을 멀리해야 한다. 미국식 유행을 따라 한국에서도 기본전략을 정치컨설턴트들에게 많이 의존하는데, 그들은 조직의 철학·역사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만일에 코어가 잘못 짜이면 확장 과정에서 반드시 균열이 생겨 자체의 무게로 인해 쓰러지고 만다. 반면에 활동조직이나 추종집단은 여러 가지 재능과 역할의 필요성을 기반으로 구축된 집단이기 때문에 다소간의 이질성이 불가피하고, 윤리적 수준도 코어집단에 비해 순도가 훨씬 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코어만 튼튼하면 좀 순도가 떨어져도 용인될 수 있다.

그런데 안철수 캠프에서는 코어와 활동조직·추종집단 간의 관계가 다소 역전된 듯이 운영되었다. 먼저 안철수 캠프의 지도부는 구성의 원칙과 기준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한데다 구성되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능력을 제대로 검증받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도부는 캠프 내외의 비판에서 빗겨나 관대한 대우를 받았고, 반면에 활동조직이나 추종집단은 엄격한 잣대를 요구받았다. 순도가 떨어지거나 생각이 좀 다르다 싶으면 구태정치라고 인식하는 습관이 강했다. 이런 태도는 능력 있는 사람의 진입을 차단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이런 행태는 캠프가 민주주의적 조직운영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였다. 캠프의 핵심으로 통하는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문가와 활동조직이 오랜 시간 동안 토론하고 고민해서 올라간 의견은 정반대의 이상한 물건이 되어 최종안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결정하는 윗부분과 토론하고 작업하는 아랫부분이 따로 놀았다. 이런 틈새를 파고들어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한편 출마선언의 지연은 가치·노선의 정립과 코어의 팀워크 구축에 필요한 최소한의 절대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추석 이후 전략기조와 지도부의 신속하고 과감한 교체 내지 보강이 필요했으나 시간적 임박성과 대체 자원의 결여 때문에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출마선언 이후 안철수 후보가 펼친 정치실험에서는 그가 그전에 가다듬어 놓은 생각들이 대부분 굴절되고 증발되어 나타났다. 안 후보 역시 자신의 생각과 현실이 자주 괴리되어 나타나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현실이 발전되어 나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본성적으로 선한 사람인데다 완벽성, 완결성을 추구하는 강렬한 습관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자신이 했던 말이 대중들에게 빈 말이 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매사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몸속에 깊이 각인된 것으로 보인다. 의원정수축소 문제에 대해서 그가 강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런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신당 창당 유혹에 흔들릴 게 아니라...안철수 캠프에 참여했던 나의 지인이 얼마 전 안철수 후보가 DJ와 무척 닮은 것 같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안 후보가 DJ와 다른 점도 있다고 했다. 즉 DJ가 현장의 전문가, 이해당사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면서 결정을 해나갔다면, 안철수 후보는 그에 대한 노하우와 네트워크가 시간적, 경험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상당히 적절한 지적이 아닐까 싶었다. 바로 그런 점이 안철수 후보의 정치실험에 나타났던 한계와 오류를 신속하게 정정하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철수 후보가 짧은 시간의 정치실험을 통해 보여준 잠재력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객관적 현실여건에 비해 그 이상의 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틀린 것은 아니다. 정치와는 전혀 거리가 멀게 살았던 데다, 사회과학적 인식능력을 훈련할 시간과 기회도 없었던 사람이, 아무리 대중의 열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해도, 대통령선거에 뛰어들어 이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것도 조직화된 세력의 뒷받침 없이 거기까지 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정치를 꽤 해보았던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했던 숱한 실수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그는 노무현 후보에 비해 너무 정적이고 추상적이며 미괄식 화법을 쓴다는 약점도 갖고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으로 당분간 가치·노선, 전략, 조직·리더십의 전면적 쇄신을 위해 성찰과 정진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정치실험에서 보여준 것으로는 당장에 어떤 정치실험을 재개해도 기존의 한계와 오류를 반복할 것이다. 앞으로 그의 주위로부터 대선 후 신당을 만들자는 등의 여러 유혹들이 밀려들 것이다. 이런 유혹들에 그가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야권이 정권교체에 실패했을 경우 그런 유혹은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감히 그에게 제언하건대 당장의 남은 대선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를 쿨하고 화끈하게 도와주는 것 말고는, 자기성찰과 쇄신의 시간들을 가지면서 때를 기다리는 긴 호흡의 계획들을 짜나갔으면 좋겠다.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한겨레 세상읽기] 알에 갇힌 혁거세?/진중권

“그분은 세상과 단절된 삶을 너무 오래 살아오셨다.” 박근혜 후보의 기자회견을 보며 지인이 내게 한 말이다. 신문만 보고 살았어도, 정수장학회의 헌납에 강제성이 없었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사안은 박 후보 자신이 관련된 문제다. 게다가 그는 검증을 앞둔 대통령 후보가 아닌가. 그런 분이 어떻게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실수(?)이기에, 일각에서는 “박 후보가 알아듣게 판결문을 좀더 쉽게 써야 한다”며 농으로 사법부를 성토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게다가 이게 어디 처음이던가? 지난번 인혁당 사건에 관해서도 “두 개의 판결” 운운하며 역사적 문제에 관해 철저한 무지를 드러낸 바 있다. 세상이 다 아는 얘기를 박 후보 혼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근원은 유신 시절에 형성된 박 후보의 이 ‘개인 이데올로기’다. 그는 아예 처음부터 자신이 정치를 하는 목적이 “부모님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 밝히며 정치에 나섰다. 한마디로 ‘부친이 이룬 업적을 바탕으로 그가 채 이루지 못한 유업을 자신이 대를 이어 완성한다’는 사명의식, 이것이 그가 삶을 사는 이유이자, 동시에 정치를 하는 목적이다.
박 후보가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그토록 힘겨워하는 것은 이 허황한 자의식 때문이다. 아버지 박정희는 그의 존재이유 자체이기 때문에, 5·16과 10월 유신을 부정하는 것이 그에게는 곧 자기부정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마지못해 사과를 했지만, 자꾸 강박적으로 사과하기 이전의 스탠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박정희 속에 자신을 유폐해 버렸다. 이 정치적 자폐가 특정한 맥락에서 그의 자산이기도 했다. ‘박근혜=박정희’라는 동일시 기제가 1970년대의 고도성장을 그리워하는 보수층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끌어내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분들이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국민의 전체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사실 박근혜 후보의 리더십은 정상적인 당적 지도력이라 하기 힘들다. 그것은 차라리 아버지와의 동일시 기제에 근거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가깝다. 후보에 대한 당적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새누리당의 박근혜가 아니라, 박근혜의 새누리당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그는 아버지의 후광 속에 살아왔다.
경제적으로는 어떤가? 그가 관계한 재단이 얼마나 많은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영남대학, 한국문화재단 등에서 이사로 활동한 것이 자연인 박근혜의 거의 유일한 경제활동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가치로 수십억원에 이르는 전두환의 6억, 전두환 정권이 마련해준 것으로 보이는 성북동 자택 등은 정상적 경제활동의 성과가 아니었다.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것은, 박 후보가 사과나 반성은커녕, 피해자인 고 김지태씨를 공격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설사 그가 친일을 하고 부정축재를 했더라도 친일파를 왜 친일파가 단죄하며, 부정축재를 왜 군인이 강탈하나? 법에 따라 적절히 처벌하고, 적법하게 환수할 일이다. 박근혜 후보가 강제헌납이라는, 헌법을 무시한 초법적 조처를 정당화하는 것은, 그가 여전히 5·16이 ‘혁명’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국민이 기대한 것은 그가 과거를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문제의 해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국민의 소박한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혁거세는 알을 깨고 나와 왕이 되었다. 그 역시 아비의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와야 하나, 알 속이 따뜻해 영 부화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경향신문 사설] 박근혜 정수장학회 판결문은 읽어 보고 회견장에 나왔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어제 정수장학회 논란은 야당에 의한 정치 공세라는 입장을 밝혔다. 얼마 전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지분 매각 논란이 불거졌을 때 “저도 관계가 없다”고 밝힌 데서 오히려 후퇴한 모양새다. 다만 향후 해법과 관련해서는 명칭 변경 문제 등을 포함해 “장학회가 스스로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학회가 더 이상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서 국민에게 혼란을 줘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리하자면 장학회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정쟁의 대상이 된 만큼 이사장 퇴진이나 명칭 변경을 통해 논쟁을 마무리 짓자는 제안으로 들린다.

박 후보의 주장은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정수장학회는 공익 재단인 만큼 자신의 책임론을 제기하는 야당의 주장은 정치 공세에 불과하고 둘째, 고 김지태씨의 헌납 재산 외에 국내 독지가 등의 성금이 들어 있어 단순한 부일장학회 승계가 아니며 셋째, 장학회는 강탈이 아닌 부정축재자의 재산 환수에 해당하고 넷째, 설립자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 장학회를 운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펴는 과정에서 박 후보는 민주당의 집권 10년 동안 장학회가 별 탈 없이 유지됐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는가 하면 장학회가 공익 재단이라면서도 설립자의 뜻에 따른 운영을 강조하는 모순을 드러내기도 했다.

압권은 장학회가 갖고 있는 MBC와 부산일보 주식의 강탈 여부에 대한 박 후보의 인식이라 하겠다. 박 후보는 처음 설명할 때 강압이 없었다고 했다가 이를 지적하는 듯한 보좌진의 메모를 받고서야 “ ‘강압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패소 판결을 내린 걸로 알고 있다”로 말을 바꿨다. 그러나 그 해명마저도 충분하지 않다. 김지태씨 유족이 장학회를 상대로 낸 주식반환소송에서 재판부는 정부의 강압을 인정하면서도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기한은 지났다고 봤다.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취지였다. 이를 박 후보의 단순한 실수로 치부하기에는 사안의 성격이 매우 엄중하다. 박 후보가 판결문이라도 제대로 읽고 회견장에 선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번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세상이 뭐라든 굽히지 않는 박 후보의 불통과 비민주성을 엿보는 것 같다.

이번 회견은 박 후보와 국민의 정서 사이에 파인 괴리만 재확인시켜 주었다. 박 후보가 그나마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명칭 변경이나 이사장 사퇴만 해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것 외에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장학회의 사회 환원, MBC나 부산일보 사태의 해결 약속이 없는 그 어떤 해결책도 수사에 불과한 상황에서 박 후보는 장학회의 문제점까지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5·16이나 유신 등과 같은 과거사에 대한 그의 사과 역시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일련의 사태는 역사 인식이 사과나 반성만으로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한 개인의 삶과 철학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한겨레 기사/사설] 무책임하고 정략적인 NLL 공세

[사설]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이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어제 ‘통일이 될 때까지 엔엘
엘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며 슬쩍 끼어들었다. 통일비서관 출신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통일부 국정감사 발언으로 촉발된 논란은 새누리당에 이어 이 대통령까지 가세하면서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핵심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한 회담에서 ‘엔엘엘 포기 발언’을 했느냐이다. 이에 대해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은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단언했다. 여기서 생산적인 논의가 되려면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먼저 내놔야 옳다. 일부 보수언론이 ‘관계자’의 입을 빌려 전하는 출처불명의 보도를 근거로, 녹취록을 폐기했느니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라느니 하며 정치공세를 할 일이 아니다. 가장 사실을 잘 아는 정상회담 배석자들의 발언을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내놓지 못하면서 국정조사나 문서 공개 타령만 하는 것은 스스로 대선용 정략이라는 걸 시인하는 것이다.
애초 엔엘엘은 1953년 정전협상 당시 경계가 확정된 육상과 달리 해상에서 경계선이 정해지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이양호 국방장관이 말한 것처럼 “정전협정과 관계없이 우리 어선의 보호를 위해, 또 우리 해군 함정이 북측 가까이 못 가게 하기 위해 우리가 공해상에 그어놓은 선”이다. 하지만 북은 1973년부터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1999년에는 서해 5도를 모두 자기 영역에 포함하는 군사분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유엔사령부가 이 선을 선포한 뒤 북이 20년 가까이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우리 군이 이를 방어선으로 삼으면서 사실상 경계선으로 굳어진 면이 있지만 법적으로 분쟁이 종결된 건 아니다.
엔엘엘과 관련해 남북이 유일하게 합의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도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뒤 나온 10·4 남북공동선언엔 “남과 북은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과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문제 등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측 국방부 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 부장 간 회담을 금년 11월 중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고 나와 있다. 공식 문서 어디에도 엔엘엘을 포기한다는 말이 없다. 이후 벌어진 국방장관 회담에서도 엔엘엘을 양보한 바 없다.
공식 문서에도 없고 실제 그렇게 일이 진행된 적도 없는데 ‘엔엘엘 포기 발언이 있느냐 없느냐’고 논란하는 것은 무용·무익하다. 더구나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는 “북이 엔엘엘을 존중한다면 서해평화협력지대를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권이 옭아매려고 하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도 엔엘엘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유력 대선 후보들이 모두 엔엘엘을 포기가 아니라 갈등 해결의 기점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데도 새누리당이 당장 공개하기 힘든 정상회담 대화록을 까발리자고 물고 늘어지는 건 죽은 대통령을 대선용 ‘유령 놀음’에 불러내자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NLL 발언’ 공방 전말
정 “NLL 포기 발언은 사실…의원직 등 정치생명 걸겠다”
문쪽 “공식 대화록엔 절대 없어” 새누리는 폐기의혹 제기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우리 쪽에서 녹음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2007 남북정상회담 비밀 대화록’ 논란을 촉발한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의 발언은 신빙성을 잃게 됐다. 정 의원은 “북한 통전부가 녹취한 대화록을 우리 비선라인과 공유했다”고 주장했지만 우리 쪽이 녹음을 했다면 굳이 북한이 녹취한 대화록을 넘겨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캠프의 진성준 대변인은 18일 “회담에 관여했던 실무자들에게 알아보니 회담에 배석했던 조명균 당시 안보정책비서관이 녹음을 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진 의원은 “당시 우리 쪽 배석자인 조명균 비서관이 녹음을 했지만, 녹음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아 별도 녹취록을 남기는 대신에 녹음과 메모를 참고해서 (녹취록이 아닌) 대화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조 비서관은 책상 위에 녹음기를 올려놓고 공개적으로 녹음을 해 북쪽도 녹음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비밀 대화록’ 있나? 현 정부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지낸 정 의원은 지난 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의 단독회담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으며, 이런 내용이 담긴 ‘비공개 대화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2007년 10월3일 오후 3시 백화원초대소에서 남북정상은 단독회담을 가졌다”며 “당시 회담 내용은 녹음됐고 북한 통전부는 녹취된 대화록이 비밀합의 사항이라며 우리 측 비선라인과 공유했다”고 말했다. 또 “그 대화록은 폐기 지시에도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에 보관돼 있다”며 대화록의 일부 대목을 공개했다.
당시 정상회담을 수행한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 등도 10일 회견을 열어 “단독회담도, 비밀 합의도 없었다”며 “(배석자가 정리한 공식) 대화록은 있지만 녹취록은 없고, 북에서 받은 것도 없다”고 말했다. 정 의원이 말한 회담 시간에 대해서도 “오후 3시는 다른 회담이 한창 진행되던 시간”이라고 일축했다.
정문헌 의원은 민주당 쪽이 반박할 때마다 한 발씩 물러섰다. 그는 12일 국회 기자회견에선 “두 정상의 대화는 북한이 녹음했고 이 녹취와 우리 측의 기록을 토대로 대화록이 만들어졌다”며 “민주당은 내가 ‘비밀 녹취록’, ‘비밀 단독회담’이라고 했다가 말을 바꿨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의원이 애초 ‘북한 통전부가 단독회담을 녹취한 대화록을 우리 측과 공유했다’고 한 것과 달리, “북한의 녹취와 우리 기록을 토대로 남쪽이 (공식) 대화록을 만들었다”고 말을 바꾼 것은 분명하다.
 ‘NLL 포기’ 발언 있었나? 정문헌 의원은 ‘비공개 별도 대화록’의 존재가 부인되자, “문제의 본질은 회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2일 기자회견에서 “노 전 대통령이 단독회담 자리에서 ‘남측은 앞으로 엔엘엘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라며 “국회의원직을 포함해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말했다. 남쪽이 작성한 공식 회담록에 노 전 대통령의 ‘문제 발언’이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과 문 후보 쪽은 이 또한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문 후보는 15일 선대위 회의에서 “정상회담 대화록은 당시 국정원과 통일부에 의해서 실제 대화 내용 그대로 풀워딩으로 작성됐다”며 “(내가) 대화록을 직접 확인했고, 국정기록으로 남겼다”고 말했다. 공식 회담록엔 ‘엔엘엘 포기’ 발언 따위는 담겨 있지 않음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공식 회담록 작성자인 김만복 전 국정원장도 18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공식 회담록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정 의원이 공식 회담록 외에 어디선가 입수한 ‘가짜’ 대화록의 잘못된 내용을 토대로 허위 폭로전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진성준 대변인은 16일 “문제를 제기한 정문헌 의원이 그 가짜 대화록을 즉각 공개하고, 입수 경위와 절차, 배경, 과정들에 대해서 낱낱이 밝히라”고 요구했다. 민주당은 17일 정 의원을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문 후보 캠프의 문병호 법률지원단장은 “정 의원이 없는 자료를 있는 것처럼 사실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공무상 기밀누설이나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혐의로는 고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협박, 무고’라고 맞섰다.
‘진짜’ 회담록엔 문제 발언이 없다는 반박이 나오자, 새누리당은 이번엔 회담록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로 폐기됐다는 의혹을 17일 제기했다. 그러나 문 후보는 이 또한 직접 반박했다. 그는 “참여정부 때는 이지원(전자결재시스템)으로 모든 문서가 보고되고 결재됐다. 이지원에 (일단) 올라왔던 문서가 폐기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며 “더구나 회담록은 국정원에도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손원제 조혜정 기자

[한겨레] 참여정부와 NLL 관련 글 - 김종대


참여정부가 저물어 가던 2007년 11월27일, 제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을 위해 대동강변의 송전각에 도착한 김장수 국방장관 일행은 김일철 인민무력부장과 지루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첫날 북쪽은 서해에서 불가침경계선(북방한계선) 재설정 문제를 들고나와 우리를 압박했다. 이튿날에는 우리가 북한의 핵개발 등 남쪽에 대한 위협을 거론하며 맞불을 놓았다. 북쪽은 “해상불가침경계선 획정 문제가 우선 논의되지 않으면 다른 의제는 논의하기 어렵다”며 합의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한달여 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압박하던 김정일 위원장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김장수 장관은 “회담이고 뭐고 오늘 서울로 돌아가서 사퇴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다”며 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그날 밤 우리 쪽이 주최한 만찬에서 김장수 장관은 김일철 부장에게 “무력부장 선생도 합의가 안 돼서 골치 아프겠지만 나도 골치가 아파 죽겠다. 나는 돌아가서 사퇴하면 그만이니 내 후임 장관하고 잘해보라”고 배수진을 쳤다. 이에 무력부장은 “장수 장관, 그러지 마시오. 우리 잘해봅시다” 하며 4번이나 사퇴를 만류했다. 이어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내일 중으로 다 하도록 지침을 주셨다”며 합의의 전제조건인 해상경계선 재설정 주장을 철회했다. 이튿날 마무리 전체회의에서는 남북 군사적 신뢰구축과 군사협력을 담은 7개조 21항의 합의서가 체결되었다.
대동강변에서 남북 군부가 가파르게 대립하면서도 합의를 이뤄낸 2박3일은 또 하나의 역사가 탄생하는 새 시대의 여명이었다. 비록 남북공동어로구역 문제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지만 높은 수준의 남북군사협력을 이뤄냈다. 10월의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열린 11월의 장관회담은 서북해역 방어를 책임지는 군의 의견을 노무현 대통령이 전부 수용하고, 북방한계선에 대한 전권을 국방부에 위임한 결과이기도 했다. 회담 중에 청와대는 단 한번도 지침이나 훈령을 보내지 않았고 회담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김장수 장관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신뢰는 회담 이전이나 이후에나 변함이 없었다. 간혹 청와대에서 ‘꼿꼿 장수’의 경직된 태도를 비판하며 장관 경질을 주장하는 젊은 행정관들이 있었으나, 이들을 제압하며 경질설을 일축한 사람이 바로 문재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정상회담 당시 청와대 윤병세 외교안보수석은 김장수 장관과 함께 현재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외교안보 두뇌가 되었다. 김장수 장관을 보좌하며 정상회담 이전부터 청와대와 북방한계선 문제를 조율한 당시 김관진 합참의장은 이명박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남북관계의 기나긴 여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밤잠을 설치며 고뇌하고 좌절하다가 이정표를 세울 때마다 우리는 환호하고 감격하기도 했다. 그 역동적인 시기를 회고하면 우리는 원칙과 신념을 지켜야 하는 준엄한 역사의 교훈을 자각하고 전율하게 된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있지도 않은 ‘단독회담 비밀회의록’에 이어 “노무현이 북방한계선을 부정했다”는 식의 거짓선동에 휘말리지 않는다. 이것이 김장수, 윤병세, 김관진이 정부·여당에 몸담았지만 새누리당의 북풍몰이에 협력하지 않는 이유다. 이들이 빠진 대신 역사관·통일관·안보관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삼류들의 역사왜곡은 스탈린, 마오쩌둥(모택동), 히틀러를 다 합친 것보다 위험하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관을 기대하지 않지만 그 무지몽매함까지 방치하기엔 사태가 너무 엄중한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안보를 외치는 동안 정작 지상의 철책선과 해상의 경계선이 모두 뚫린 정권은 노무현이 아니라 이명박 아니었나. 말하려거든 그 사실을 말하라.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유신과 5공 잔당, 그리고 박근혜

박근혜와 유신과 5공 독재의 하수꾼에 대한 기사.

고문에 가담했던 추재엽과 목격자이자 희생자 재일동포 김병진씨에 대한 한겨레 기사.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범죄를 자행하였던 자들이 심판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권력의 핵심부에 모이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독재타도"라는 정치구호는 어떤 의미도 없다. 독재권력의 "공주"와 하수인들이 정권을 장악한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 가치의 본질적 훼손은 없으리라. 그야말로 미래 지향적인 사고는 과거지사로 그들을 둘러씌우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어쩌면 진심으로 지금 외치고 있는 정치적 구호를 받들고 있는지도 모르고, 과거의 들어난 혹은 들어나지 않은 모든 부정의한 행업을 깨끗이 떨치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일꾼이 되려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들이 설쳐대는 현실이 바람직한 것일지 모르겠다. 과연 그러한가?

아래 기사의 추재엽과 같은 사례는 이런 관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게 보일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추재엽이 나서지 않더라도 보수건 진보건 그가 되고자 했던 구청장 노릇을 그에 못지 않게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현실은 과거의 부정의에 대한 교정의 최소한도의 요건 조차도 충족하지 못하는 것 처럼 보인다.

박근혜 후보와 추재엽 전 양천구청장.

추재엽 전 양천구청장 지원 유세 했던 사진 돌아
누리꾼 “고문기술자 공천 새누리, 고문기술자 지지 박근혜, 유신잔당들 답다”

과거 간첩사건 조작을 위해 고문에 가담했던 추재엽(57) 서울 양천구청장이 선거 과정에서 이를 부인했다가 최근 위증죄 등으로 법정구속된 가운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해 재보궐선거에서 추 후보의 지원 유세에 나선 장면이 온라인에서 회자되고 있다.

14일 트위터에는 지난해 양천구청장 재보궐선거를 앞둔 10월15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양천구 신월1동 신영시장을 찾아 지역 주민과 상인들에게 추재엽 양천구청장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선 장면이 돌고 있다. 사진 속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박근혜 의원이 추 후보 옆에서 웃음을 지으며 상인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담겨있다. 당시 박근혜 의원의 방문에 대해 일부 시민들이 항의하자, 지원유세는 14분 만에 중단된 것으로 전해졌다.

추재엽 양천구청장은 1980년대 국군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간첩사건 조작 위해 고문을 자행했던 사실을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당시 상대 후보로가 폭로하자, 이를 부인했다가 최근 재판 과정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11일 서울남부지법은 추씨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허위사실 유포)에 대해 징역 3월, 위증·무고 혐의에 대해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지난해 추씨를 지원유세한 장면이 알려지자, 트위터 사용자들은 “고문기술자를 공천한 새누리당, 고문기술자를 지지하는 박근혜. 유신잔당들 답습니다”(@Yan****) “박근혜, 추재엽을 공천하고 그의 선거운동하였었음에도 판결 결과에 대해 한마디도 없다”(@jhohm****) “딱 어울리는 한 쌍이 또 추가되네요”(@kj****) 등의 반응을 보이며 박 후보를 비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고문 목격 재일동포 김병진씨
“과거청산 머뭇대는 한국에
경종 울리려고 추재엽 고발”
“당시기억 떠올라 고통스러웠다”

추재엽(57) 전 양천구청장이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근무 시절 민간인 고문 사실을 법정에서 부인한 혐의 등(위증·무고·허위사실 유포)으로 지난 11일 당선무효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한겨레> 12일치 1면) 역사의 뒤안에 묻혔던 죄를 끈질기게 캐물은 이는 재일동포 김병진(57·사진)씨다.

일본에서 태어난 김씨는 재일동포 3세다. 일본 간세이학원대학 문학부를 다니던 김씨는 고국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1980년 3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2학년으로 편입해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1983년 7월9일, 김씨는 집 앞에서 보안사 수사관 4명에게 느닷없이 끌려갔다. 한국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와 세상에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아들에게 말 한마디 전하지 못했다. 수사관들은 잠을 재우지 않거나 전기의자에 앉히며 김씨를 고문했다. 간첩으로 조작돼 구속된 다른 인물에게 포섭돼 간첩 활동을 했다는 거짓 사실을 인정하라며 윽박질렀다.

고문에 못 이긴 김씨는 거짓 진술서에 서명한 뒤 풀려났다. 보안사는 일본어에 능통한 김씨를 검찰이 기소 보류하도록 했고, 대신 강제로 2년간 보안사 군무원으로 일하도록 했다. 김씨는 1984년 1월부터 일본 출신 동포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수사에서 통역을 맡았다.

이듬해인 1985년 서울 송파구 장지동 수사분실에서 김씨는 추재엽 당시 수사관을 만났다. 벌거벗겨진 채 각목에 매달린 재일동포 유재길(70)씨의 눈코에 추씨 등이 고춧가루 물을 들이붓던 장면을 김씨는 생생히 기억한다.

“제가 고문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너무 고통스러워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지난 4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전화기 너머 일본에 있는 김씨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나중에 유씨는 무죄로 풀려났다.

애초 약속했던 2년 근무가 끝날 무렵, 보안사 수사관들은 김씨를 붙잡았다. “너무 많은 일을 목격했다고, 저를 풀어주지 말자고 의논하더군요. 상관에게 뇌물도 바치고 술도 사면서 겨우 나왔습니다.”

1986년 1월, 김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자신이 겪은 고초를 글로 써서 <보안사>라는 책으로 냈다. 1988년 한국어 번역판이 나왔지만 노태우 정부는 이를 곧 압수하고 김씨에게 지명수배를 내렸다.

여권 발급을 금지당한 김씨는 2000년까지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2009년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보안사는 김씨에게 구타 등 가혹행위를 가하고 보안사 근무를 강요하는 등 중대한 인권침해를 했다”는 내용의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일본에서 영어·일본어 학원강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오던 김씨는 지난해 10월 추씨가 양천구청장 3선에 나선다는 사실을 알고 기자회견을 열어 추씨의 고문 경력을 폭로했다. “아직도 과거 청산을 머뭇거리는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추씨를 고발했던 것”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2012년 10월 3일 수요일

[한겨레 사설] 투표시간 연장 반대 새누리당과 박근혜 반대이유: 혼란?, 태만한 유권자?

[한겨레 사설] 

투표시간 연장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을 무산시킨 새누리당의 태도가 점입가경이다. 그동안 사회적 비용이 더 든다거나 선거를 앞두고 룰을 바꾸면 혼란만 야기한다(이철우 원내대변인) 따위의 방어적 논리를 앞세우더니 이젠 ‘투표는 시간이 아니라 성의의 문제’(이정현 공보단장)라고 유권자를 직접 겨냥했다. 1일 2교대 근무자, 격일 전일 근무자 등 주권 행사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을 태만한 자로 꾸짖은 셈이다.
지난해 한국정치학회가 조사한 비정규직 근로자 투표 참여 실태를 보면, 자발적 미투표자는 35.9%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투표할 수 없어서 못한 사람들이었다. 셋 중 둘은 고용계약상 근무시간 중 외출이 불가능해서(42.7%), 임금이 감액되기 때문에(25.8%), 고용주나 상사의 눈치 때문에(9.8%) 주권 행사를 못했다. 성의의 문제가 아니라 생계가 문제였다. 앞서 새누리당은 투표 불참의 원인을 정치 불신이라고 둘러댔다. 투표시간을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의 유권자 의식조사를 보면, 투표 불참의 가장 큰 원인은 ‘출근 등 개인적인 일’이었다. 18대 총선에서 27.8%였던 것이 19대 총선에선 39.4%로 늘었다. 자발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집단이 날로 많아지는 것이다. 투표시간 연장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부분적인 보완책일 수 있다. 이웃 일본에선 최근 투표마감시간을 2시간 늘린 결과 투표율을 10% 가까이 높였다.
유권자 태만론엔 ‘투표일은 공휴일’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투표하라고 쉬게 했더니 놀러만 다닌다는 것이다. 실제 새누리당은 투표일은 공휴일이니 투표시간을 연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투표일은 관공서와 공무원에게만 공휴일이다. 일반 기업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단체협약으로 정할 뿐이다. 19대 총선 때 직장인 절반이 정상 근무했다.(한국갤럽 조사) 집권여당의 한심한 수준만 보여주는 주장이다.
고용관계 등으로 말미암아 투표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집단이 수백만명이나 존재하는 한 보통·평등선거는 물론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국가가 앞장서 투표 방해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 까닭이다. 낮은 투표율은 대표성의 위기를 가져오고, 이는 정치 불안, 국정 혼란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박근혜 후보는 공정한 사회, 100%의 나라 등 국민통합을 최고의 슬로건으로 삼았다. 수백만 유권자를 주권 행사도 못하게 하면서 국민통합을 말하는 건 속임수다.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건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지 투표 못하는 유권자가 아니다.

[한겨레 사설] 재벌 총수가 딸 빵집 부당지원까지 지시해서야

신세계그룹이 총수의 딸인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의 빵·피자 사업을 부당지원한 사실이 적발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40억여원의 과징금을 부과당했다고 한다. 흔히 ‘재벌 빵집’으로 불리며 그룹 유통망 등을 활용해 손쉽게 수익을 올려온 재벌 2·3세들의 사업 행태가 철퇴를 맞은 셈이다. 특히 신세계는 회장·부회장이 부당지원에 개입한 사실까지 드러났다고 하니, 재벌의 끝모를 탐욕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공정위의 조사 결과를 보면, 신세계는 2009년부터 그룹 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정 부사장이 대주주인 신세계에스브이엔(SVN)의 사업을 지원했다.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 등 고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 그룹 소속 대형 유통업체에 빵집과 피자집 등을 운영하게 했고, 판매수수료는 다른 유사업종보다 훨씬 낮게 받았다. 그 결과, 신세계에스브이엔은 지난해 매출이 전년보다 54.1%나 늘었으며, 피자사업은 한해 동안 514%라는 경이적인 매출 신장률을 기록했다. 그룹의 불공정한 지원 아래 목 좋은 자리에서 ‘땅 짚고 헤엄치기’식으로 장사를 한 것이다. 이 과정에 정 부사장의 어머니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오빠인 정용진 부회장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회의록 등이 드러났다.
이번에 적발된 신세계의 행위는 재벌의 묻지마식 확장이 어떤 폐해를 불러오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신세계에스브이엔이 편하게 배를 불리는 동안 ‘골목상권’으로 불리는 관련 업계는 수익감소와 퇴출 등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난해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점포는 200개가 줄었고 피자사업에선 중소업체 매출이 34%나 급감한 것도 그런 여파와 무관하지 않다.
10대 재벌만 보더라도 지난해 총매출이 946조여원으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76.5%에 이르렀고, 계열사 수는 592개로 2002년(318개)에 견줘 거의 배로 늘어났다. 순대, 제빵, 레스토랑 같은 골목상권으로 문어발처럼 몸집을 늘린 결과다. 이런 재벌 독점 구조 아래서 경제·사회 생태계가 온전하게 보전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번 대선의 화두인 경제민주화의 요체가 재벌 개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정위는 재벌의 부당한 계열사 지원 행위를 더욱 철저히 감시하고 처벌해야 한다. 여론의 질책에 밀려 최근 정 부사장이 신세계에스브이엔의 지분을 매각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람직하나, 그 지분을 다른 계열사가 인수한다는 방침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신세계가 계속하려는 ‘재벌 빵집’은 사회적 책임이 큰 대기업이 할 일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2012년 9월 27일 목요일

[프레시안] 곽노현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박동천 교수 글

결국 대법원은 곽노현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나는 대법원이 법의 목소리를 외면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그래도 진실과 이치와 양심의 흔적이 이번에 표현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일단 짓밟혔다.

하지만 이 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가깝게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남아 있지만,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역사의 법정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재판한 이상훈, 신영철, 김용덕은 대법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곽노현의 선의를 함부로 처벌했지만, 역사의 법정에서는 바로 이 세 사람이 피고인석에 서게 될 것이다.

법관의 지위를 이용해 함부로 법을 무시한 사례는 무척 많지만, 세 가지만 예시한다.

1975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소위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이 사건은 주지하다시피 이 나라 사법의 역사상 가장 큰 오점으로 기록되었다. 2007년 서울중앙지법에 의해 판결이 뒤집혔고, 박근혜조차도 며칠 전에 이를 인정했다. 박근혜가 즐겨 쓰는 문구 "역사의 판단"이란 이를 말하는 것이다.

프랑스 현대사에서 사법부의 수치는 드레퓌스 판결이 대표한다. 드레퓌스 대위는 1894년 조작된 증거에 의해 유죄 선고를 받았고, 1896년에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오히려 그 사실을 밝혀낸 피카르 중령이 좌천당하고 말았다. 이를 항의하던 에밀 졸라는 궐석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1906년 재심에서 모든 혐의가 풀리고, 과거의 재판이 잘못이었음이 만천하게 공표되었다.

미국 사법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 중에는 드레드 스코트 사건이 있다. 스코트는 노예제가 금지된 위스콘신 주 등지에서 거주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이미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대법원은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은 미국 시민이 아니라 노예 소유주의 사유 재산이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이 사건은 사회 안에 격렬한 분쟁을 일으키고, 결국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수정헌법 제13, 14, 15조에 의해서 무효가 되었다. 연방대법원 판결은 7대 2로 이뤄졌는데, 소수의견을 낸 매클린 대법관은 "법이 아니라 다수파의 입맛에 따른 판결"이라고 자리매김했다.

곽노현을 재판한 항소심 판결이 법이 아니라 입맛에 휘둘렸다는 사실을 나는 전에 밝힌 바 있다. (☞관련 기사 : "곽노현 항소심 판결문에는 논리가 없다") 대법원 판결문에서도 이 치명적인 결함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판결문은 이렇게 올바른 전제에서 출발하는 척 가장한다.

"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는 후보자이었던 사람이 후보자를 사퇴한 후 그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이익 제공·수수 행위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후보자이었던 사람에게 이익 등을 제공하는 행위와 후보자이었던 사람이 위와 같은 이익 등을 수수하는 행위에 한하여 이를 처벌한다."모든 이익 제공·수수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목적으로' 제공하는 행위에 한하여 처벌한다는 말이다. 이는 맞는 말이지만 가장에 불과하다. 가장이 아니려면, 곽노현이 건넨 돈이 '대가를 목적으로' 준 것인지를 따져야 하는데, 1심에서도 2심에서도 이를 따지지 않고 넘어가 버렸다. 따라서 법률심인 대법원은 마땅히 1심과 2심 재판이 근대 형사 재판에서 가장 기초적인 형식 요건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파기했어야 맞는다. 아니면 대법원 스스로 '대가를 목적으로' 돈이 건너갔다는 논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판결문 어디를 봐도 이 핵심 쟁점이 논의되는 기미가 없다. 단지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 감정을 가진 일반인이라면 위 규정의 적용 대상자와 구체적으로 금지되는 행위의 내용을 충분히 알고 이에 비추어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다고 우길 뿐이다.

나는 "위 규정의 적용 대상자와 구체적으로 금지되는 행위의 내용"을 전혀 모르겠다. 곽노현은 이렇게 물었다. 만약 문재인과 안철수가 상호 합의한 절차에 따라 단일화해서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가 취임한 후에 상대방을 국무총리에 임명한다면 "사후 매수 죄"에 걸리는가 안 걸리는가?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한 명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곽노현을 재판한 1심과 2심의 판사들은 물론이고, 대법원의 이상훈, 신영철, 김용덕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를 "안다"고 말할 사람은 꽤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아는" 것과 "안다고 우기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폐증 환자일 뿐이다.

인혁당 재건위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결했다. 당시 대법원은 민복기·홍순엽·이영섭·주재황·김영세·민문기·양병호·이병호·한환진·임항준·안병수·김윤행·이일규 등, 열세 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도 자기들이 한국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판결을 내리고 있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드레퓌스를 재판한 프랑스 군사법원도 수치를 몰랐고, 스코트를 재판한 미국 연방대법원장 태니도 수치를 몰랐다.

왜 수치를 몰랐을까? 법을 자기들이 재단한다는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가 역사의 법정에서 심판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이를 깨닫지 못했을까? 증거에 충실하지 않고 시류에 영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진실과 정의와 양심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올라오는 데도 억누르고, 법관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사후 매수라는 개념이 형사법적으로 성립하려면 사전 합의를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 곽노현 사건에서 이보훈과 양재원 사이에 오간 대화는 자체로 어떤 의무를 수반하는 합의일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하고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애당초 이보훈이 곽노현을 대리했다고 볼 여지도 전혀 없다. 판결문들을 읽어보면 1심과 2심 그리고 이번 대법원의 재판부조차, 사전 합의가 없었다는 취지를 백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엉뚱하게 사후 매수가 성립한다는 듯이 우겨대고만 있다. 이것은 법이 아니라, 판사 개인들의 사리사욕일 뿐이다. 보수파의 기득권과 보수파가 지어낸 여론에 굴복한 것 말고는 어떤 의미도 여기에는 없다.

이 나라에서는 이렇게 인혁당 사건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의 재판부가 역사의 법정에서 심판받는 데는 32년이 걸렸다. 드레퓌스 재판의 경우는 12년, 스코트 재판의 경우는 8년이 걸렸다. 판결은 뒤집혔지만, 법의 이름으로 불의를 자행한 어떤 판사도 개인적으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나는 곽노현 재판은 이보다 빠르게 역사의 법정에서 심판받을 것으로 믿는다. 그날, 이상훈, 신영철, 김용덕에게 잘못한 만큼 개인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한국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정의의 표준이 크게 향상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1. 무엇이 쟁점인가?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재판에서 배경이 되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은 이렇게 정리된다. ① 양재원, 이보훈, 최갑수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 소위 "합의"라는 것은 합의의 명색만 갖추고자 했던 양재원의 시나리오에 이보훈과 최갑수가 별 생각 없이 따른 결과, 따라서 막연할 뿐만 아니라 서로 부정합적인 단어들을 무의미하게 연결한 데에 불과하다. ② 이런 무의미한 이야기가 오갔다는 사실조차 곽노현은 몇 달 후에 자체 조사를 통해서나 알게 되었다. ③ 한편 박명기는 양재원으로부터 "합의"가 있었다고 전해 들었고, 그래서 한 때 합의 이행을 요구했다. ④ 진상을 파악한 이후 곽노현은 강경선에게 부탁해서 박명기의 오해를 풀었다. ⑤ 이 와중에 강경선은 박명기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되어 곽노현에게 부조를 조언했고, 곽노현은 강경선의 신앙심에 감화되어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음을 무릅쓰고 2억 원 가량을 건넸다.
이와 관련되는 법조문은 공직선거법 232조 1항의 1호(사전매수죄)와 2호(사후매수죄)이다 (지금부터는 이를 줄여서 각각 1호와 2호라고 부른다). 그런데 검찰은 공소시효 때문에 1호로 기소하지 못하고 2호로 기소했다. 그러면서도 2호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곽노현의 금전 공여가 "사후매수"에 해당한다는 논거로서는, ①을 사실상 두 후보자간의 합의였다고 보며, 곽노현이 이를 몰랐다는 ②를 부정한다. 검찰은 곽노현의 인지에 관해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곽노현이 이를 알게 된 것이 몇 달 후임이 1심의 사실심리를 통해 명백하게 밝혀졌으므로, 1심과 2심에서 공히 재판부는 ②에 관해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2억 원의 공여는 2호 사후매수죄에 해당한다고 보아,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에서 핵심 쟁점은 곽노현의 금전 공여가 2호에 규정하고 있는 "후보자를 사퇴한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후보자였던 자에게" 금전을 제공한 행위가 되느냐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곽노현의 행위가 법이 금지하는 행위인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사퇴할 당시까지 모종의 합의나 묵계 또는 이심전심의 양해가 없었더라도 사후매수라는 범죄가 구성될 수 있는지 여부, 그리고 위에서 ①이라고 표시한 대화가 합의나 묵계나 이심전심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반드시 엄밀하게 따져야 한다. 그런데 이번 재판에서는 1심에서도 2심에서도 재판부가 이와 같은 핵심 쟁점을 전혀 따져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쟁점을 두루뭉수리로 얼버무림으로써 마치 곽노현이 "사퇴한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돈을 건넸다는 듯한 착시현상을 만들어내고는 스스로 그러한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 착각의 본질을 지금부터 파헤치기로 한다. 이 논의는 이미 상당히 길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리고 1심의 유죄 논거와 2심의 유죄 논거는 대동소이하므로, 여기서는 2심 판결문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2. 공직선거법 232조 1항 2호의 취지

사퇴 당시까지 대가를 제공하기로 합의나 묵계나 이심전심이 없는 한 사후매수가 성립할 수 없다고 보고 생각해 보자. 이랬을 때 2호의 입법취지는 만약 사전매수죄만을 규정했을 때 공직선거법의 공소시효 6개월만 지나가면 설령 사전매수 합의가 있어서 그에 따라 금전 공여가 나중에 행해지더라도 혹시 처벌할 수 없게 될까봐 금전의 공여가 사전매수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검찰이 인지하게 된 시점부터 공소시효를 산정하도록 2호가 삽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제268조와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선거일 후 6월로 공소시효를 정하고 있으면서도 괄호 안에 "선거일 후에 행하여진 범죄는 그 행위가 있는 날부터 6월"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제232조 1항 1호가 금지하는 행위는 "후보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거나 후보자가 된 것을 사퇴하게 할 목적으로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나 후보자에게 제230조(매수 및 이해유도죄)제1항제1호에 규정된 행위"이고, 2호는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것을 중지하거나 후보자를 사퇴한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후보자가 되고자 하였던 자나 후보자이었던 자에게 제230조제1항제1호에 규정된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2호의 취지는 사전에 매수합의가 있었고 이후에 합의에 따라서 금품의 공여가 이뤄질 때, 선거일 후 6개월이라는 공소시효 때문에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를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보면 가장 명확한 해석이 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이미 판결문 안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판결문에서는(40쪽) 2호를 검찰의 주장처럼 해석한다면 공소시효가 무한정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박명기 측의 항변에 대해, "'금품 등을 제공ㆍ수수한 시기'가 선거일부터 장기간이 경과한 후에 이루어진다면,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그 대가성을 인정하기 쉽지 않아 범죄행위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으므로" 그러한 우려가 근거 없다고 배척하고 있다. 하지만 대가성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아서 범죄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대가성이 인정된다면 범죄가 성립된다는 말이 된다. 가장 명백한 사례 하나를 가상해 보자. 가령 곽노현이 2020년에 박명기에게 10억 원을 건넸는데, 이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수사를 해보니 "10년 후에 10억 원을 사퇴한 후보 본인 또는 그 상속자에게 제공한다"는 합의가 선거전에 있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물증이 발견된다면 범죄가 성립된다는 말이며, 이럴 때는 사퇴한 후보에게 사퇴한 대가를 선거일 후에 제공한 경우이기 때문에 1호를 적용하지 못하고 2호를 적용하라는 뜻이 된다.
이처럼 사후매수라는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 사퇴 당시의 합의나 묵계나 이심전심이 필수적이라고 보면, 2호는 금품의 제공이 나중에 이뤄질 때에 대비한 조항으로 쉽게 이해가 된다. 반면에 사퇴 당시의 합의나 묵계나 이심전심이 없더라도 사후매수라는 행위가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내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도저히 불가능하다. 실제로 검찰 역시 2호를 적용해서 기소하면서도 줄기차게 양재원, 이보훈, 최갑수 사이에 있었던 ①의 대화가 매수합의였다고 주장하며, 이를 곽노현이 인지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사전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사후매수"라는 문구에 들어맞을 만한 행위를 형상화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재판부는 곽노현이 무슨 합의 따위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2억 원이라는 돈이 "대가성"이었다고 판단할 때에는 ①의 대화를 하나의 정황증거로 끼워 넣고 있다. 다시 말해, 재판부 역시 사전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사후매수가 가능하다는 예시나 논증에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재판부는 2호의 사후매수가 성립하기 위해 사전합의가 필수요건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사후대가성을 인정해야 할 논거로서는 지속적으로 ①의 대화가 "금전 지급 합의"였다는 정황을 언급하고 있다. 단, 그 대화가 어떻게 "합의"가 되는지에 관해서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정확히 검찰의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기소전략에 재판부가 휘둘리고 있다는 증좌이다. 검찰은 ①의 대화가 사전합의라고 주장은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사전합의임을 입증할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논쟁의 초점이 사전합의 여부로 모이지 않고, 사후대가성이라고 하는 막연한 개념에서 범죄구성요건을 구하고자 하는 편의주의적 전략인 것이다.
재판부는 이와 같은 검찰의 강변에 부지불식간에 굴복하고 말았다. 만약 사전에 합의나 묵계나 이심전심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후매수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어떤 경우가 그런지를 예시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이 사건이 그러한 경우와 마찬가지임을 또한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검찰은 2호로 기소하고 있으면서도 ①의 대화가 사전합의에 해당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또한 동시에 사전합의가 사후매수에 필수요건은 아니라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재판부는 바로 이와 같은 검찰의 전략을 충실히 수용해서 사전합의가 있었는지 여부를 전혀 따지지 않고 말았다.

3. ①의 대화가 합의나 묵계나 이심전심에 해당하는가?

이 문제는 이미 남경국 박사가 정리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략한 요지만을 적는다 (관련기사 ☞ "강경선, 곽노현, 박명기 사건 의견서" 가운데 III). 양재원, 이보훈, 최갑수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금전 지급의 주체부터가 불명확한 상태였다. 양재원은 박명기에게 보고하면서 그 합의라는 것을 이보훈과 한 것이 아니라 김성오와 했다고 말했다. 이보훈과 최갑수는 이 대화 내용을 곽노현이 나중에 조사할 필요를 느껴서 추궁하기 전까지 곽노현에게 전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대화에서 이보훈과 최갑수는 곽노현의 대리인으로서 자격이 없고, 그 대화 내용이라는 것 역시 너무나 엉성해서 후보매수를 구성할 만한 어떤 합의나 묵계가 될 수 없다. 더군다나 곽노현은 그 전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사퇴의 대가를 제공하는 형태의 합의는 단호하게 배격한다는 입장을 여러차례 밝혔다.
백보를 양보해서 이것이 변호인 측의 입장에 불과하다고 한 번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검찰의 입장은 무엇인가? 앞에서도 논급했듯이, 검찰은 이것을 합의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것이 합의일 수 없다는 변호인 측의 항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2호와 관련해서는 사전합의가 필수요건이 아니라면서 쟁점을 회피할 뿐이다.
그러므로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판결을 내리기 전에 마땅히 ①의 대화가 합의나 묵계나 이심전심에 해당하는 행위였는지를 철저하게 따져서 명확한 판단을 내렸어야 했다. 그럼에도 판결문은(15쪽) "최갑수와 이보훈이 양재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금전 지급 합의(이하 '2010. 5. 19.자 금전 지급 합의'라 한다)가 이루어졌다"고만 선언할 뿐, 어떻게 그 대화가 곽노현이 책임져야 할 금전 지급 합의가 되는지에는 아무런 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판결문은 바로 뒤이어 "구체적으로 5억 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지급 시기는 언제인지, 이와 관련하여 책임자인 이보훈과 보증인인 최갑수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관하여 양재원과 이보훈, 최갑수는 명확하게 논의하지 않았다"고 인정하며, 나아가 액수가 5억 원인지 7억 원인지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재판부는 이보훈이 곽노현에게 "박명기가 조건 없이 후보자를 사퇴하기로 하였다"고 보고했음도 인정한다. 이처럼 이것이 합의인지 여부, 그리고 이것이 곽노현과 박명기 사이에 (대리인을 통해) 이뤄진 합의인지 여부는 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쟁점이다. 하지만 판결문에는 선언만이 있지 이를 뒷받침하는 어떤 논거도 없다. 이처럼 핵심 쟁점을 체계적으로 회피한 상태에서 내려진 판결은 법의 목소리가 아니라 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유령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4. 사후대가성의 구성

지금까지 밝혔듯이, ①의 대화는 후보사퇴를 조건으로 곽노현 또는 그 대리인이 금전을 지급하기로 약속한 합의일 수가 없다. 그 까닭은 단순히 곽노현이 몰랐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보훈, 최갑수, 곽노현 사이에 어떤 위임이라 할 만한 요건은 물론이고, 어떤 이심전심이라고 할 만한 요건도 없으며, 애당초 이보훈, 최갑수, 양재원 사이에도 무슨 정합적인 내용의 합의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급 주체도 없고, 지급 시기와 액수도 정해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금전 지급 합의 따위는 곽노현이 그전까지 완강하게 배격한 형태의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이 대화를 (아무런 법리적 검토도 없이) "금전 지급 합의"였다고 선포해 버림으로써, 마치 그런 합의가 실재했다는 듯한 혼동을 초래한다. 그러면서도 실제 제공된 2억 원의 대가성 여부를 검토하는 대목에 가서는 "비록 피고인 박명기와 피고인 곽노현이 2010. 5. 19.자 금전 지급 합의의 이행으로서 2억 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피고인 곽노현은 후보자를 사퇴함으로써 채무초과상태에 빠진 피고인 박명기를 도와주고 향후 자신의 교육감직을 보전하기 위하여 금전을 제공하였고, 피고인 박명기는 자신의 사퇴로 말미암아 피고인 곽노현이 교육감에 당선되었으니 피고인 곽노현 측에서 부채의식을 가지고 도와준다고 생각하며 2억 원을 수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3-34쪽, 금전수수의 경위에 관한 판단)고 말하며, "비록 2억 원이 2010. 5. 19.자 금전 지급 합의와 무관하다고 하더라도, 피고인 곽노현은 위 돈을 피고인 박명기의 후보 사퇴행위에 대한 대가로서 지급한다는 사정을 충분히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7쪽, 대가성의 인식에 관한 판단)고 말한다.
재판부는 여기서도 문제의 2억원이 소위 "금전 지급 합의"의 이행인지 아닌지를 따져서 밝히지 않고 쟁점을 회피하고 있다. 금전수수의 경위를 판단하는 33쪽의 문언은 재판부도 "합의의 이행으로서 2억 원을 주고받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으로 읽힌다. 반면에 37쪽은 단순한 양보구문으로서 그것이 합의의 이행이었는지 여부는 접어두고, 설사 무관하다고 하더라도 대가성의 인식을 구성하기에는 충분하다는 취지로 읽힌다. 나는 재판부가 여기서 상당한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4-1. 합의의 이행이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대가성이 구성되는가?

재판부가 이렇게 생각하는 주요 논거는 첫째, 곽노현과 박명기는 2억 원이라는 큰 돈을 선거와 무관하게 선의로 부조할 정도로 특수한 관계가 아니었고, 둘째, 곽노현이 스스로 대가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우선 재판부는 여기서 "후보를 사퇴한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한 행위"와 "후보를 사퇴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제공한 행위"를 혼동하고 있다. 돈이 건너갈 때 박명기는 곽노현에게 생면부지의 인물이 아니었고, 스스로 후보의 지위에서 사퇴함으로써 곽노현의 당선에 기여했는데, 선거 빚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사람이었다. 즉, 곽노현은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궁핍을 겪는 아무나에게 부조를 한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박명기, 후보로서 경쟁관계가 될 뻔했다가 후보에서 사퇴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는다고 해서 도움을 준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사퇴에 대한 대가"인지 아닌지에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황 중 하나로서 재판부는 박명기의 사퇴로 인해 곽노현이 "향유한 정치적 이익이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31쪽)다는 점을 들고 있다. 구체적인 수치로는 단일화 이전(5월 17일)에 여론조사에서 이원희 7.0% 곽노현 6.7%로 나타났다가, 단일화 이후(5월 27일)에 곽노현 11.8% 이원희 8.6%로 나타났고, 최종 투표 결과 곽노현이 1.1%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다는 정황을 소개한다. 그러나 곽노현은 6.7%나 11.8%와는 거리가 먼 34.34%를 득표했다. 아주 막연하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곽노현이 박명기의 사퇴 덕분에 당선되었다고 말한다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곽노현이 박명기의 사퇴에 막연한 수준의 고마움을 느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선거가 끝나고 9개월이 지나 2억원을 준 것이 "사퇴의 대가"였음을 증명하는 데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황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보는 견지에서 곽노현은 후보에서 사퇴해서 자기에게 막연한 수준에서 도움을 줬다고 볼 수 있는 박명기가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자 2억원을 제공했다. 이를 가지고 곧바로 "사퇴의 대가"를 유추한다는 것은 "후보를 사퇴한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한 행위"와 "후보를 사퇴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혼동하는 셈이다. 뇌물죄를 판단할 때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공여"를 "그가 행한 특정한 행위에 대한 대가"로 혼동하면 선의의 공여라고 하는 미풍양속을 처벌하게 된다는 법리는 1999년 미국 연방대법원에 의해서 확립된 바 있다 (바로가기 ☞United States v. Sun Diamond Growers of California). 이 판례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매우 드물게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대법관 9명의 만장일치로 내려졌다. 한국 법원이 이 판례의 법리를 따라야 할 실정법적 의무는 없지만, 적어도 법과 사회와 인간에 관한 일반적인 이치를 고려한다면 아주 진지하게 참고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곽노현이 대가성을 인식했다고 판단한 재판부의 근거는 기본적으로 박명기가 합의의 이행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박명기가 합의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곽노현이 알고 있었다는 데서 바로 곽노현이 제공한 돈은 사퇴의 대가였다고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위에 인용한 37쪽의 문언은 논리적으로 자가당착이다. "금전 지급 합의와 무관하더라도" 대가성이라고 봐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문에서 박명기가 합의의 이행을 요구했다는 사실 때문에 대가성이라고 봐야 한다는 말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부주의일 수도 있겠다. 즉, "금전 지급 합의와 무관하다고 곽노현은 생각했더라도"라고 써야 할 것을 주어를 생략함으로써 마치 그 양보구문의 화자가 재판부인 것처럼 오해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곽노현이 합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더라도, 박명기가 그 돈을 합의 이행이라고 봤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그와 같은 박명기의 생각을 곽노현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곽노현이 대가성을 인식했다는 결론은 가당한가? 그 돈의 성격을 한 쪽에서는 합의 이행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특히 박명기 쪽의 진술은 이와 관련해서 다소 갈팡질팡하는 면이 있는 반면에 곽노현은 일관되게 합의와 무관한 선의의 부조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박명기가 대가성으로 인식했다는 사실 때문에 어떻게 곽노현도 대가성으로 인식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가 있는가?
재판부는 여기서도 다시 "사퇴한 사람이기 때문에 도와준 행위"와 "사퇴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체계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대가라는 단어가 사용될 수 있는 일상어의 모든 용례를 고려하기로 한다면, "사퇴한 사람이기 때문에 도와준 행위"와 "사퇴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얼렁뚱땅 섞어 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문제되는 대가는 죄형법정주의에 의해 그 의미가 엄밀하게 획정되어야 하는 종류이다. 곽노현은 합의 따위는 없었고 단지 선의의 부조였다고 주장하며, 박명기는 합의의 이행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재판부가 박명기의 진술에 일방적으로 무게를 실어주려면, 곽노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이 합의의 이행이었는지를 논증해야 맞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애당초 ①의 대화가 어떻게 "금전 지급 합의"가 되는지, 그리고 나아가 2억 원이 왜 그 대화와 연관이 있는지를 막연한 정황이 아니라 증거와 논리를 특정해서 밝혔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핵심 쟁점들을 재판부는 체계적으로 묵살 내지는 간과하고 있다.

4-2. 합의의 이행이 아니었더라도 대가성이 구성되는가?

위에 인용한 판결문 33-34쪽에서 재판부는 2억 원의 수수가 합의와는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성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고 본다. 여기서도 나는 "비록 피고인 박명기와 피고인 곽노현이 2010. 5. 19.자 금전 지급 합의의 이행으로서 2억 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이라고 쓴 문언이 어쩌면 단순한 부주의의 소산일 수 있다고 본다. 재판부는 2억원이 합의의 이행이 아니었다고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기보다는 그 쟁점을 지속적으로 회색지대에 남겨두고 있다고 읽는 편이 판결문의 선량한 독해에 가까울 수도 있을 가능성을 나는 인정한다.
여하간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변하지 않는다. 금전 수수가 합의의 이행은 아니었다고 보면서 재판부가 대가성을 인정했든지, 합의의 이행이었는지 여부를 제쳐두고 대가성을 인정했든지 마찬가지로 자가당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살펴 보자.
같은 문장에서 재판부는 곽노현이 "교육감직을 보전하기 위하여 금전을 제공"했다고 보고 있다. 이 문구는 36쪽 대가성의 인식에 관한 판단에서도 나오고 49쪽 양형부당에 관한 판단에서도 나온다. 이것이 대가성을 판단하게 된 주요 논거 중 하나이며 원심의 벌금형을 징역1년으로 강화하게 된 주요 논거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교육감직을 보전하기 위해 돈을 줬다는 말은 만약 돈을 주지 않았다면 교육감직을 상실하게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는 가정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돈을 받지 못했을 때 박명기가 어떻게 곽노현의 교육감 지위에 손상을 줄 수 있었을까? 다시 이야기의 초점은 내가 ①의 대화라고 부르고 재판부는 임의적으로 "5월 19일자 금전 지급 합의"라고 부르는 사태로 모아진다. 돈을 받지 못했을 경우, 박명기의 입장에서 곽노현의 교육감직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전에 후보 매수가 있었다"고 폭로하는 길뿐이다. 그런데 판결문에 따르면 곽노현이 강경선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명시적인 의사를 표시하고, 부인에게 현금을 모아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하는 것이 12월 초순이다. 그리고 박명기와 강경선이 액수에 관해 논의한 것은 12월 6일에서 12월 22일 사이이다.
잠깐 형식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백보를 양보해서 합의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만약 돈을 주지 않았다면, 범죄 행위인 매수합의는 선거일 전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12월 2일이면 공소시효가 끝난다. 돈을 주지 않는 한, 선거일 후에 어떤 범죄 행위도 없었기 때문에 12월 2일이 지나면 1호로도 2호로도 기소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박명기가 무슨 폭로를 하더라도, 그리고 그 폭로가 설사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12월 2일이 지나면 기소할 수가 없다. 곽노현이 구설수에 오르기는 하겠지만, 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게 되는 일은 12월 2일 전에 돈을 주지 않았더라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곽노현의 교육감직이 돈을 주지 않은 이유로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12월 2일 전에 박명기가 재판부의 용어로 "5월 19일자 금전 지급 합의" 사실을 폭로해서 검찰이 기소하는 경우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돈은 12월 2일이 한참 지나서 2011년 2월부터 4월에 걸쳐서 전달되었다. 그러니까 돈을 주지 않았더라면 교육감직이 사법적으로 위태로웠을 가능성은 없었다. 단, 정치적으로 상당한 곤경에 처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 점에서 곽노현이 염려했던 것은 이런 저런 일들이 공연한 추문으로 비화되어 교육감으로서 추진하려고 했던 여러 가지 시책들에 지장이 생길지 모른다는 데 있었지, 교육감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데 있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마지막 가상적 가능성으로서, 선거일 전에 행해진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완성 이전에 박명기가 "금전 지급 합의" 사실을 폭로했다면 어땠을지를 검토해보자. 그랬을 경우에는 당연히, 지금까지 이 글에서 누차 강조하고 지적해 왔듯이, ①의 대화가 공직선거법 232조 1항 1호에서 금지하고 있는 후보매수 행위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되었을 것이다. 검찰이 지금 그러하듯이 후보매수라고 하는 범죄의 성립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곽노현은 구설수에는 올랐을지 몰라도 유죄라든지 실형 같은 것은 선고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곽노현이 1심 재판에서 검찰이 공소시효를 악의적으로 계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할 때 자신은 "소란시효"를 염두에 뒀을 뿐이라고 응수한 대답은 완전히 적확하다.
여기까지만 살펴 보더라도 재판부가 "교육감직을 보전하려는" 의도를 곽노현으로부터 읽어내면서, 동시에 합의의 이행이 아니었지만 대가성이 그로써 입증된다거나 합의의 이행 여부과 상관없이 대가성이 그로써 입증된다고 본 것은 자가당착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곽노현이 "교육감직을 보전하기 위해서" 돈을 줬다는 의도의 해석이 가능하려면, 그 돈의 성격은 합의의 이행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돈이 합의의 이행이려면 먼저 합의가 있었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재판이 법리에 따른 재판으로서 형식적 구색이라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①의 대화라고 부르고 재판부가 임의로 "금전 이행 합의"라고 부르는 그 5월 19일의 사태가 공직선거법 232조 1항 1호에서 금지하는 후보매수에 해당하는지를 반드시 따져서 그 여부를 확정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회피하고서야 어떤 재판도 법의 이름으로는 성립할 수가 없다.

5. 법이 염결하지 않은데 교육이나 선거가 염결할 수 있는가

판결문은 "숭고한 교육"의 이념과 "교육의 염결성"을 강조하면서, 곽노현의 행위가 거기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에 엄벌에 처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났듯이, 이 재판은 범죄 행위가 과연 있었느냐고 하는 핵심 쟁점을 체계적으로 회피하고, 지극히 막연한 정황들을 반복적으로 나열한 결과 마치 범죄가 있었다는 듯한 인상을 자아내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말았다.
착각과 혼동의 꺼풀을 뚫고 법의 목소리에만 정밀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곽노현은 후보에서 사퇴한 사람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선의의 부조를 행한 것이 분명하다. 단순히 선거가 있었고 9개월 후에 금전이 제공되었다는 것만으로 뇌물죄를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퇴한 후보에 대한 사후매수죄가 성립하려면 제공된 돈이 "사퇴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퇴한 행위의 대가"로 건너갔다는 점을 검찰이 입증해야 한다. 이 사건은 그 돈이 어떤 성격이었는지가 1심 재판의 상세한 조사에 의해서 완벽하게 밝혀진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부가 벌금형을 선고한 것도 법리에 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거니와, 항소심이 무죄를 선고하지 않고 오히려 실헝을 선고한 것은 법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은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다면 선거에서 돈거래가 횡행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곽노현을 무죄로 선고했을 때 선거판이 매수로 혼탁해질 위험은 오히려 훨씬 줄어들고 법의 엄정함이 우뚝 명확해지는 효과가 막대하리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법이 진실과 양심의 소리를 경청한다는 하나의 사례만으로 정의의 표준이 엄격하게 설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건에서 곽노현이 유죄 판결을 끝내 받고야 만다면, 남을 돕기 전에 먼저 구설수를 피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찌든 개인들을 양산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교육이나 선거만이 아니라 법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선의로 돕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타인의 곤경에 대한 선의는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나 권력이나 정의보다도 당연히 우선시되어야 하는 최고의 덕성이다. 나는 2012년의 대한민국 대법원이 이와 같은 당연한 이치를 통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모든 논리와 모든 선의와 모든 신앙을 한데 모아서 기도한다.
/박동천 전북대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