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9일 일요일

[프레시안 데스크 칼럼] 혁신에 실패한 야당의 붕괴

그날 한강 백사장에 운집한 인파는 30만을 넘었다고 한다. 서울 유권자가 80만 명이던 시절이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폐부를 찌르는 민주당 대선후보 신익희의 사자후가 백사장을 뒤흔들었다. 민주당이 내건 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전국을 휘몰아쳤다. 3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1956년 5월 3일, 자유당 정권의 몰락은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다. 이틀 뒤, 해공 신익희가 대선을 열흘 앞두고 급서하지만 않았더라면.

신익희의 죽음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했다. 그가 사라진 자리, 진보당 대선후보인 죽산 조봉암이 얻은 216만 표가 이승만의 위기감을 자극해 이태 뒤 벌어진 '진보당 사건'의 정치적 동기가 된다. 이승만의 위협적인 정적으로 떠오른 조봉암은 결국 간첩죄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59년 7월 31일. 내일이면 죽산이 서거한 지 꼭 53주기가 되는 날이다.

부질없고 단선적인 역사의 가정이지만 신익희가 급서하지 않았다면 우리 정치사의 물줄기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50년 전에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됐다면 5.16 쿠데타를 비롯한 그악스런 정변들은 최소한 비껴갈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로선 혁명적이었던 '평화통일론'을 내건 조봉암이 살아 진보정치의 뿌리를 내렸다면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대의 인물들은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 두 장면이 요즘 자꾸 떠오르는 까닭은 이들의 후예들이 소극(笑劇)으로 야당 몰락의 역사를 반복하는 듯 보여서다.
▲ 죽산 조봉암(왼쪽)과 해공 신익희

신익희의 민주당을 법통의 뿌리로 삼는다는 민주통합당엔 '못살겠다 갈아보자'만큼 대중의 심금을 찌르는 구호도, 한강 백사장을 뒤흔들만한 사자후의 주인공도 없다. 제일 앞서있다는 문재인 후보는 고작 '대한민국 남자'라는 민망한 슬로건을 내놓았다가 빈축만 사고 접었다.

'혁신'이라는 단어가 민주당에서 사라진 지도 오래. 혁신에 실패해 총선을 망쳤음에도 당은 여전히 고만고만한 기득권 연합체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사회경제적 의제는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에게, 대중들의 이목은 안철수 교수에게 빼앗겼다. 민주당이 사활을 걸고 매달리는 일은 오로지 '박지원 지키기' 뿐이다.

검찰이 여권의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물타기용으로 박지원 원내대표를 겨냥했다는 의심이 짙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검찰의 출석 요구를 번번이 묵살하며 결백을 주장하는 박 원내대표의 태도 역시 국민적 눈높이와는 사뭇 동떨어져 있다. 검찰이 곧 체포영장을 청구해 '박지원 방탄 국회' 논란이 대선정국 악재로 번질 게 뻔한데도 박 원내대표가 자진해 검찰 수사에 응해야 한다는 소리는 소주잔 앞에서만 들린다.

사정이 이럴진대 누구인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열망을 품을 것이며 민주당에서 선출된 후보가 '가을의 반전'을 거쳐 '겨울의 승자'가 되리라고 낙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후보조차 내지 못한 민주당의 수모가 대선에서 반복돼 식물정당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공공연하다.

통합진보당의 사정은 이보다도 참담하다.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안이 의원총회에서 부결된 지난주,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언론이 통합진보당에 사실상 사망 선고를 내렸다.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하고 패권을 일삼은 구주류와의 결별을 통해 전면적 쇄신의 기대를 모았던 강기갑 체제는 쇄신의 입구에서 좌절했다.

"중단 없는 혁신"을 위해 기권표를 던졌다는 김제남 의원의 궤변, 득의양양한 웃음을 머금고 "진실이 승리하고 진보가 승리했다"는 이석기 의원의 발언과 함께 진보정치는 무덤으로 들어갔다. 지난 2004년, 박정희 시대가 시작된 이후 40년 만의 원내진출로 한국 정치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진보정당이다. 그 당을 뿌리로 한 당이 가장 진보적이지 않은 과정을 거쳐 제 발로 낭떠러지로 향한 꼴이다.

제1야당이 지리멸렬하고 진보정당이 몰락했으니 안철수 교수가 답인가? 대통령은 정당에 기반한 정치인이 해야 한다는 식의 안철수 교수에 대한 비판은 전무후무한 야당의 위기라는 현실 앞에 왜소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초단위로 판매부수가 집계될 정도로 열풍을 일으킨 그의 책 <안철수의 생각> 어느 장에서도 야당을 '낡은 체제'의 한 축으로 규정해버린 냉소는 있을지언정, 정당구조를 어떻게 혁신해 새 체제의 기둥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가 미덥지 않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았을 때가 위기라고 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들이 5.16 쿠데타를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박정희의 생물학적 정치적 적통, 반공의 본령을 상대로 두고 벌어지는 난맥상이라는 점에서 56년 대선의 역사가 자꾸 머리에 맴도는 것이다.
/임경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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