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1일 토요일

[한겨레21] 새마을 비리와 추징금


[줌인] 1988년 비리특위 용두사미되고 2년 복역 뒤 1991년 추징금도 없이 사면… 대체 몇 사람 명의로, 어디에, 얼마나 숨겨져 있는지 오리무중


 

»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이 1988년 7월18일 ‘새마을 비리’ 재판 당시 법정에 출두하고 있다. 그는 5공화국 때 ‘관직 없는 2인자’로 국정을 주물렀다는 의혹을 샀다. 한겨레 자료

 

전경환(70)과 검은 안개. 그의 재산 문제를 비유하는 데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 <일본의 검은 안개>의 제목을 빌려쓰는 게 나아 보인다.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명예회장이 형성하고 은폐한 재산은, 검은 안개 속에 서 있다. 검고 흐릿하며 거대한 실루엣만 보인다. 친형 전두환(81) 전 대통령만큼 흐릿하다. 전 전 회장과 관련한 법원 판결들을 검토해 풀리지 않는 의혹과 질문을 정리했다.

1988년 당시 횡령액 73억여원으로 추정

안개가 잠시 걷히고 재산의 일부가 엿보일 때가 있다. 1988년 전 전 회장의 새마을 비리 재판이 그렇다. 형이 광주 시민을 죽이고 집권한 뒤 동생도 권력자가 됐다. 전 전 회장은 서른여덟이 된 1980년 대통령 경호실 보좌관이 됐다. 1981~85년 새마을운동중앙회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법적 권한을 넘어 돈과 사람을 움직였다. 1985년부터 1987년 2월까지 회장 자리에 앉았다. 1981년 10월6일부터 1987년 7월20일까지 산하법인 ‘새마을신문’ 대표이사로도 재직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바뀌었다. 전 전 회장과 관련한 비리 의혹이 여럿 제기됐다. 1988년 4월16일 전 전 회장이 구속 기소됐다. 횡령 등 모두 8가지 죄목이었다. 새마을신문 간부 등 12명도 함께 기소됐다. 애초 검찰이 기소할 때 횡령액을 73억6700여만원으로 추정했다. 1심 재판 과정에서 횡령액이 76억원으로 늘었다. 대법원은 1989년 5월23일 전 전 회장에게 징역 7년에 벌금 22억원 추징금 9억7200여만원의 선고를 확정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0년 소비자물가지수를 100으로 기준 삼았을 때 1988년은 37이다. 그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24만원(약 4435달러)이었다. 그 시절 76억여원은 거금이었다.

새마을신문에서 빼돌린 돈만 30억8678만8349원(1988년 기준)이다. 국세청이 새마을신문을 특별세무조사했다. 전 전 회장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내부용 장부(비밀장부)와 세무신고용 장부를 따로 만들었다. 경리 담당 직원에게 이중장부 작성을 돕도록 했다. 매출을 누락시키거나, 가상 비용을 장부에 적었다. 세무조사 결과, 이와 같은 매출누락액이 1983~87년 30억8678만8349원에 달했다. 국세청은 전 전 회장이 이 돈을 개인 돈으로 가져갔다고 보고 법률상 ‘상여’로 판단해 1988년 4월 수억원의 근로소득세를 부과했다. 매출을 누락시킨 만큼 법인세와 방위세도 추가로 부과했다. 이길녀(80) 가천 길재단 회장(가천대 총장)한테서 새마을운동 성금 명목으로 1700만원을 받는 등 여기저기서 ‘성금’을 받았다.

‘76억원’을 전 전 회장의 재산의 전부로 보는 전문가는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은 이 재판에서 아예 다루지 않았다. 1988년 7월 여소야대 시절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던졌던 바로 그 13대 국회다.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야 3당이 국회 5공 비리 특위 1차 조사 대상을 추렸다. 야 3당이 이견 없이 먼저 조사하기로 한 비리 의혹만 30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나고 1990년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보수대연합 민주자유당이 태어났다. 광주특위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남겼지만, 비리특위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이들 비리 의혹은 지금껏 검은 안개 속에 있다. 개미집처럼 얽힌 민법과 상법의 난맥 속에서 전경환 전 회장이 횡령한 돈이 어느 개인이나 법인으로 언제 어떤 형태로 흘러간 뒤 어떤 수익률을 올렸고, 다시 그 재산을 누구 명의로 어떻게 감추었는지 확인하기 난망하다. 어떤 학자들은 한국의 발달한 자본주의가 6월 항쟁을 잉태했다고 주장한다. 발달한 자본주의의 민법은 6월 항쟁으로 물러난 독재자의 재산도 곧잘 감춰준다. 약 2년간 복역한 전경환 전 회장은 1991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서 사면받았다. 거액의 추징금과 벌금도 내지 않았다.


토지 매수인에 등장하던 ‘청송원’의 정체


판결 내용을 보면, 검은 안개의 실체가 보인다. 우선 명의신탁이다. 1987년 3월 전 전 회장은 새마을운동본부에서 횡령한 돈을 포함해 80억5500만원을 한 재미동포 사업가에게 꿔줬다. 이 사업가는 작은 회사를 인수한 뒤 화훼사업을 벌이려 했다. 부동산 경매 매물로 나온 상가 건물을 매입하려는데 자금이 모자랐다. 전 전 회장에게 손을 벌렸다. 전 전 회장은 이 사업가가 돈을 다 갚을 때까지 재미동포 사업가의 회사를 직접 경영하겠다고 나섰다. 전 전 회장은 1987년 5월 재미동포 사업가로부터 회사 주식을 다른 사람 명의로 양도받았다. 전 전 회장의 처제 손영숙씨, 전 새마을본부 경리부장 정장희씨 등이 이름을 빌려줬다. 정씨는 전 전 회장과 같이 기소돼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전 전 회장은 1985년 새마을지도자에게 주기로 한 격려금을 빼돌려 당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경리부장 김기수씨 개인 명의로 입금시켰다.

전 전 회장은 1983년 10월7일 기금을 내어 ‘지도자육성재단’을 설립했다. 새마을지도자 자녀 등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의 명분을 내걸었다. 전 전 회장은 이런 명분으로 전국의 명망가와 단체로부터 이른바 ‘성금’을 모았다. 성금의 일부를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경리부장 정장희씨와 총무부장 김진택씨 등 몇몇 간부 명의의 계좌로 빼돌렸다. 이처럼 전 전 회장에게 명의를 빌려준 사람은 가족부터 부하 직원까지 다양했다. 전 전 회장의 아들 전창규씨는 1994년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사업가 이용호(79) 전 에이씨티에스 회장의 딸과 결혼했다. 전 전 회장이 거느린 넓고 깊은 혼맥과 인맥을 생각하면, 전 전 회장의 재산이 대체 몇 명의 명의신탁으로 숨겨져 있는지 추측하기 어렵다.

가족도 검은 안개의 일부다. 아내 손춘지씨는 조용한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 협력자였다. 남편의 비리를 열심히 도왔다. 손씨는 전 전 회장이 횡령한 돈으로 인수한 화훼업체의 이사로 활동했다. 탈세 행위도 도왔다. 전 전 회장은 ‘지도자육성재단’ 회장으로 재직하던 1984~85년 당시 총무부장 김진택씨를 시켜 땅을 사 모았다. 김씨는 땅주인에게 세무서와 협조해 양도소득세가 많이 부과되지 않도록 처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김씨는 땅주인의 탈세를 도우려고 계약서의 토지 매수인에 자신의 이름이나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써넣는 대신 ‘사회복지법인 청송원’이라고 썼다. 손춘지씨가 청송원 이사장이었다. 일종의 부동산 명의신탁인 셈이다.

검은 안개 사이사이, 뜻밖의 인물이 전 전 회장 주변을 스쳐갔던 게 보인다. 박용상(68) 전 헌법재판소 사무차장은 5공화국과 인연이 깊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언론기본법을 만들었다.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보통 ‘언론학살법’으로 불리는 법이다. 당시 서울민사지법 판사인 박용상 전 차장이 법안 작성을 도왔다. 세월이 흘러 1995년 박 전 차장은 서울고법 시절 전 전 회장과 다시 연이 닿았다.


‘언론학살법’ 만든 박용상과의 인연

 

» 새마을 비리 관련자들은 거의 연락이 닿지 않는다. 홍보회사 베컴 회장인 문청씨는 “사건(새마을 비리 재판) 이후 전경환 전 회장과 다른 직원들을 만나본 적이 없어 근황을 모른다”고 했다. 박용상 전 헌법재판소 사무차장은 5공 초기에 국보위를 도왔다. 훗날 전경환 전 회장과 관련된 소송을 맡아 석연찮은 취지로 전 전 회장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진 한겨레 김정효

 

전 전 회장은 부정 축재 혐의가 짙어지자 언론의 주목을 피하려고 1988년 3월10일 자신이 만든 지도자육성재단을 스스로 해산시켰다. 전 전 회장의 비서 격인 김진택씨도 이사의 한 명으로 해산을 결정한 이사회에 참여했다. 그 뒤 비리 수사를 피해 전 전 회장과 김진택씨 둘 다 해외로 도망쳤다. 그사이 재단 쪽은 1988년 5월 청산위원회를 처음 열어 자산 정리 등을 시작했다. 뜻밖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김진택씨가 “법인 해산을 결정한 1988년 이사회 결의는 무효”라며 지도자육성재단을 상대로 이사회결의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시기도, 소송 내용도 모두 뜻밖이었다. 지도자육성재단 쪽은 전 전 회장과 김씨 둘 다 수사를 피해 외국으로 도망쳤고 법인 해산에 오랫동안 반대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며 반발했다. 전 전 회장이 지도자육성재단을 재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으며, 전 전 회장이 법으로 금지된 ‘소송신탁’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아직 청산되지 않은 재단의 자산을 가져가려는 것으로 전 전 회장의 의도를 추측했다.

당시 서울고법 판사로 이 사건의 재판장이던 박용상 전 차장은 1심을 뒤집고 전 전 회장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 제소 동기가 전경환의 피고법인에 대한 장악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독립된 법주체인 피고법인의 내부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하자 그 자체를 문제 삼는 이 사건 제소가 그와 같은 사정만으로 신의칙에 반하는 위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썼다. 박 전 사무처장은 인정사실을 나열하다 갑자기 단 석 줄로 “이사회는 소집 개최된 바 없다”고 판결했다. 사실상 전 전 회장이 재단으로 복귀해도 된다는 취지였다. 박 전 차장의 판결은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어졌고 전 전 회장은 패소했다.

전 전 회장의 재산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와 일했던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간부들일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접근해도 당시 간부 대부분 현재 직업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사업가한테서 돈을 받은 혐의 등으로 전 전 회장과 함께 기소돼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은 당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홍보실장 및 비서실장 문청(68)씨는 홍보업체인 ‘베컴’ 회장이다. KBS에 오래 근무했다. 문청 회장에게 전 전 회장의 남은 재산과 당시 직원의 근황을 물었으나 문 회장은 “재산문제는 전혀 알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전 전 회장도 그 사건(새마을 비리)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 전 회장은 망각 뒤에 숨는다. <한겨레> 1988년 11월10일 1면 기사를 보면, 이창수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주재대사가 1988년 10월31일 국회 5공비리 특위 요청에 따라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재산이 오스트레일리아 안에 있는지에 대해 조사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는 구상서를 오스트레일리아 외무부에 전달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해외 재산 의혹이 여럿 제기됐다. 그해 12월2일치 기사를 보면, 통신발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불법 재산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겨레21>이 지난 7월23일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당시 구상서 전문과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제출한 조사 결과 보고서를 공개하라”며 정보공개 청구했다. 외교부는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8월1일 답했다. 외교부는 외교사료관의 1988년 외교문서 목록을 열람한 결과 전 전 대통령의 재산 조사를 요구하는 ‘공식 외교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대사가 보냈다는 구상서가 공식 외교문서가 아닌 ‘서한’으로 추측되며 이 경우 ‘중요한 일이 아닌 한’ 한국의 외교부 본부에 구상서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답변서도 기록되지 않는다고 외교부는 덧붙였다.


기록되지 않은 ‘조사 협조 구상서’

논리와 명분을 앞세워 5공화국의 역사를 소리 높이 옹호하는 지식인은 많지 않다. 그러나 용서의 논리와 망각의 습관이 전경환 전 회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 주변을 묵묵히 감싼다. 검은 안개처럼.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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