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1일 토요일

[경향신문] 고은과의 대화 (47)


[고은과의 대화](47) 중공군 인해전술이 세상을 공포로 채울 즈음 입대 통지서를 받았어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전쟁 같은 거대한 상황은 아무리 많은 퍼즐을 맞춰도 온전히 복원되거나 재현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더구나 민감한 정서와 사유를 가진 인간들에게 도무지 ‘자기주도’적인 전개가 불가능한 불가항력의 상황은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한번 전선으로 떠난 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란 말은 그가 살아서 돌아올지라도 이미 전선과 죽음을 겪기 이전의 그는 아닐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6·25는 선생님은 물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되고 있어야 할 유년의 연장선들을 전쟁이 터진 ‘1950년’쯤에 묻어버림으로써 어떤 파괴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자아의 ‘간극’을 지니게 만든 것 같아요.

고은=6·25 사변 실전에 미국군 장교로 참전한 뒤 탁월한 전쟁기록자가 된 페렌바크의 <한국전쟁>은 폭우가 쏟아지는 신새벽 화천 지역 38도선에서의 북한 인민군 총좌 이학구의 만세소리와 함께 전쟁을 열더군. 그가 전투개시명령을 즉각 실행하는 광경이 인상적으로 그려졌어. 페렌바크의 기록은 한국전쟁 기록물들 대부분이 장군이나 지휘관 쪽인데 대해서 최전방 전투실무자인 직업군인 쪽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실감나더군.

김형수=동시대의 같은 시공간을 경험하면서도 각자가 기억 속에 새겨두는 광경과 인물들은 아주 상이한 것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그런데 그 인민군 최전선의 영웅적인 존재인 이학구가 낙동강 다부동 전선의 어느 날 부하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 자진 항복하는 것을 자세히 그려냈어. 며칠 동안의 백병전으로 잠을 못잔 나머지 곯아떨어진 미군 하사관에게 마치 적군이 아니라 아군을 만난 듯 다가가 잠든 몸을 조심스레 흔들었어. ‘나 항복이야’ 하는 뜻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렸어. 비참한 몰골의 인민군 부하 약간 명도 일제히 두 팔을 들었지.

김형수=주검이 쌓이고 포연이 가시지 않은 전쟁터의 긴장을 순식간에 ‘일상’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코믹하기까지 한 ‘비참’이군요. 왠지 웃다가 울어야 하는 극적인 순간 같습니다. 이학구에 이입된 저의 자아가 ‘나 항복이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섬뜩해지기도 하고요.

고은=1950년 9월 하순이었지. 이미 북한군은 화력도 동나고 병참 지원도 끊어진 상태로 북쪽으로 후퇴하다가 사살되거나 생포되기 시작할 때였지. 더 이상 김일성의 후퇴즉결명령이 유효할 수 없었지. 이런 전세역전의 긴박한 상황을 그리는 나머지 다음과 같은 진술이 빚어 나오데그려.

“한국인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어떤 표준으로 보더라도 용감한 국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은 한순간에 기고만장해지고 순식간에 실의에 빠지는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루는 순교자인가 하면 다음날은 벌써 배신자인 것이다. 그들이 동양의 아일랜드인이라고 불리는 연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강력한 공산주의 훈련을 받지 않고도 인간의 기본적 본성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이 한국 농민의 성격이다.”

김형수=페렌바크의 논평에 흥미로운 점이 있어요. ‘용감한 국민’ ‘배신자’ ‘순교자’ ‘농민의 성격’ 같은 상반된 측면을 파악했다는 것은 그가 꽤 날카로운 직관을 가진 ‘미국인’이란 생각이 들게 합니다. 특히, 논평의 대상으로 삼은 국민이 농민이라는 점도 인상 깊어요. 하지만 그는 김남주 시인이 “주인이 종더러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하자 종이 그 낫으로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 버리더라” 하던 반응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농민, 종, 혹은 농본주의의 순수성이 백열하는 분노와 열정, 결단, 포기 같은 것으로 전환되는 찰나의 속성을 상상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고은=순둥이가 독종이라는 말이 있지. 페렌바크의 이 진술은 비단 이학구가 개전 당시의 영웅적이던 기상을 후퇴 시기의 비굴한 행색에 대조시킨 것만도 아니고 인민군 쪽만을 지적한 것만도 아니고 남과 북의 한국인을 총칭하는 셈이지. 극한상황에서의 인간에 대한 고찰에는 국적이나 인종 및 민족의 혈통 따위로 분류하는 것은 철딱서니 없어. 하지만 그 전쟁 주도국의 장교에게 그 당시 헐벗은 산야와 초라한 지붕의 납작한 농촌 취락의 풍경 속에 들어 있는 문맹자인 한국인을 박대하기 일쑤이지.

▲ 마을 사람들은 나에게 술을 먹였고 ‘무운장구’ 어깨띠를 걸어주었어
김형수=응축된 굴욕과 오래 견디는 자의 미덕이 품고 있는 대지(大地) 같은 것을 모르는 이방인의 무례함 아닐까요? 북·미 회담이나 외교전을 둘러싼 이해의 ‘결여’도 이 같은 무지와 무관치 않을 것 같고요.

고은=이런 현상은 미국뿐 아니라 대부분의 참전국 군인의 시각을 대표하는지 모르지. 과연 나이 차이가 많은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한참 연하인 미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위상은 은인 이상이고 상전(上典) 이상이었어. 서울 수복 당시 맥아더가 동경에서 날아와 김포 비행장에 도착해서 아직 불타고 있는 전투 직후의 서울 국회의사당 건물 안에 들어설 때 그는 구세주였지. “대통령 각하, 자비로운 하나님의 덕택으로 위대한 희망과 인류의 열망을 밑받침으로 하여 싸운 우리 군대는, 즉 유엔군은 이 오래된 한국의 수도를 해방시켰습니다. (…) 유엔군 덕택으로 이제부터 각하께 귀국의 헌법에 의한 의무를 더 잘 완수할 수 있는 귀국의 정부가 있는 자리를 돌려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라는 이른바 ‘덕망 높은 유시(諭示)’를 내렸지. 그뿐이 아니지. 그는 주기도문까지 읊어대니 국회의사당 참석자 모두가 따라서 읊었어. 그는 골수의 성공회 신도였어.

김형수=‘한국전쟁과 맥아더의 주기도문’입니다. 일본 천황의 항복사인을 직접 받아낸 전승국 사령관의 종교적 도취라고 할까요?

고은=과연 맥아더는 아시아의 황제였어. 그의 아버지가 지난 시기 미국이 스페인을 몰아낸 뒤의 육군 중장으로 필리핀 총독을 지냈으나 그 아들이 아시아 제패의 상속자가 된 셈이네그려. 이 필리핀의 미국 통치를 국제적으로 정당화할 때 일본의 조선반도 지배를 승인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이 드러난 것이 태프트-가쓰라 밀약 아닌가. 그게 네가 조선을 먹어라, 나는 필리핀이면 된다는 흥정이었어. 그것이 을사늑약이고 ‘합방’이니 한반도 현대사의 원초적 치욕으로 된 것이네. 맥아더는 일찍 별을 단 군인의 행운 속에서도 참호 속에서 단련된 사람이지. 이 점에서 그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더 수고가 많은 운명을 맡은 반면 그가 장군일 때 아직 영관급이던 ‘미국 부르주아지’의 미덕을 갖춘 아이젠하워는 유럽 전략에 나섰고 그는 드물게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 되는 순풍의 운명을 누린 것이네.

▲ 소집 일주일 뒤 신체검사를 했는데 체중미달로 불합격 처분이 났지
김형수=제레미, 다이아몬드 같은 학자들이 ‘제노사이드’ 같은 종족살상을 인간의 한 특성이라고 진단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북진, 만주 수복 같은 자극적인 상상이 현실이 될 뻔했을 수도 있다는 측면과 2차대전 전후 미국의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빚어내는 주변부 국가의 ‘피 흘리는 현실’이 몸서리쳐지는군요. 지금도 핵 문제를 둘러싸고 예민하게 작동하는 외교전의 긴장이 진행 중인 현실이라는 점도 이 틀에서 바라다본다면 좀 더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고은=맥아더는 중국 본토인 만주 폭격과 대만의 국부군까지 동원하는 동북아시아 해방을 지향함으로써 휴전 논의를 제압한 확전을 거듭 확인하는데 끝내는 트루먼에게 불복종으로 나아갔어. 아이젠하워는 유럽에서의 전승국 원수로 군인생활을 마감한 뒤 컬럼비아대 총장 노릇도 하며 비군사적인 정치경륜을 이루었지만 맥아더는 영원한 군인이고 돌이킬 수 없는 아시아의 맹주였다가 끝내는 해직당하고 말지. 후임 사령관 리지웨이는 아무런 예상도 준비도 없이 덜컥 상관의 해임에 황송하고 민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네. 물론 그는 고집쟁이 맥아더와는 달리 확전은 고사하고 압록강까지 밀고 갈 충동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현상 고착으로 가닥을 잡았겠지. 이로써 남한의 북진통일의 쾌감은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북위 38도선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휴전선 체제로 되었지. 그것이 휴전을 앞둔 필사적이고 결사적인 혈전으로 한반도 허리를 피로 물들였어. 빼앗고 빼앗기기가 몇 십 번이고 반복되는 고지탈환전에서 쌍방의 병력은 소모될 대로 소모되었지.

김형수=스포츠는 전쟁을 대신한다고 하잖습니까? 올림픽을 보면서 드는 생각인데, 인간은 왜 이렇게 전의(戰意)를 연소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고은=한숨을 내쉬어야겠네. 도대체 한민족의 남과 북이 아니라도 인류는 왜 집단으로 싸우고 왜 집단으로 죽여야 하는가. 저 3만5000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의 행위는 없었다 하네. 그 뒤의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다른 종족으로 갈라져 형님인 네안데르탈인의 원시 평화를 크로마뇽인이 파괴한 이래 전쟁은 인류사의 영원한 중독이 된 모양일세. 그 전쟁 중독이 기원전 5000년경에는 전염병이 되어 20세기에 이르는 전쟁사가 되었네그려. 얼어붙은 달밤에 피리소리로 괴성으로 밀려오는 중공 인해전술도 무작정이 아니라 철저한 고전적 육박전에 의해서 한반도 지형에 알맞게 진행되었어. 승승장구의 미군이 당황하며 후퇴를 계속 감수했지. 수복된 직후 마음 놓을 사이도 없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다시 한 번 세상을 공포와 불안으로 채우기 시작했을 때 나도 다급한 징병 입대 통지서를 받았어.

김형수=징집, 그로 인한 참전, 그리고 죽음과 삶과 폐허, 이런 문제들은 움베르트 에코의 지적처럼 20세기 이후 심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고은=우리 마을에서 장행회(壯行會)를 열어서 나에게 술을 먹였고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어깨띠를 걸어 주어서 군산 시내 중앙국민학교로 소집되어 갔어. 일주일쯤 몇 백 명이 대기하고 있었어. 그런데 다시 신체검사를 했어. 일차 검사는 질병 유무만 간단하게 구두 확인하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군의관들이 실시한 검사였네. 여기서 나는 체중미달로 무종(戊種) 불합격 처분이 되었어. 그 당시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체중감량을 위해서 아주까리기름을 먹고 설사를 하는 놈도 있고 제 손가락을 칼로 쳐서 총의 방아쇠를 당길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놈도 있었지. 심지어 한쪽 눈을 송곳으로 찔러버리는 놈도 있었어. 그런 경우는 조사한 뒤 형무소로 가야 했어. 나는 본디 약골이므로 체중 35㎏쯤으로 목숨을 부지해온 터라 뒷날의 국민방위군 소집의 그 무차별동원이었다면 몰라도 정규검사로는 입대부적격자일 수밖에 없었어.

김형수=지금의 모습을 보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6·25의 전선에 투입될 뻔한 시골 마을의 35㎏짜리 체중미달의 소년이 겪게 되는 실존적인 불안과 선택 불가능한 상황이 오늘날의 첨단 디지털 문명의 대도시적 빠른 템포에 겹쳐지면서 아득한 시간 너머의 판타지처럼 느껴져요. 무운장구라는 어깨띠를 달고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소년의 운명이 바로 그 21세기 유년의 몸이라니 말입니다.

고은=1951년 1월 중공군은 서울에 쳐들어왔어. 그럴 뿐만 아니라 북한 피란민들이 군산에도 몰려와 인공 3개월간 폭격당한 시내 폐허 위에 임시 천막을 치는 피란민촌이 생겨났지. 그들 역시 다시 남쪽의 목포나 부산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토착주민이나 피란민 모두가 하루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는 상태였네. 전쟁은 전선과 후방이 함께 치러내는 총력행위였어.

김형수=선생님 댁에서는 대책이 없었습니까?

고은=아버지가 가족회의를 열었어. 가족회의라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나와 아우뿐이었어. 거기에 숙부 두 분도 불려와 있었지. 거기서 할아버지의 분부가 있었는데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와 장손인 나만이 부산 피란을 떠나고 그 밖의 가족은 집에 있기로 한 것이었어. 다음날부터 어머니는 찹쌀 세 말을 볶아서 가루로 만들었어. 아버지는 이웃 마을 미제부락에 소개되어 온 대법원 행정처 비서실장인 김기련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떠날 선편을 물색했지. 김기련은 내 중학교 은사인 김기태의 친형이기도 해서 진작 나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나에게 카뮈라는 불란서 소설가를 알려주기도 하는 철학교사였어. 그이는 마누라가 앓아누운 뒤 부엌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불이 활활 타는 광경에 황홀해하며 이런 불길을 보면 이마누엘 칸트가 생각나는군, 하고 말하기도 했어.

김형수=피란을 떠나기 위한 가족회의와 활활 타는 아궁이, 어처구니없게도 이마누엘 칸트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억이 왠지 마르케스의 말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만 그리면 초현실이 된다”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은=며칠 뒤 군산 째보선창에서 돛이 둘 달린 목선 일종선 한 척을 목돈을 주고 빌릴 수 있었는데 김기련 부부와 우리 부자 그리고 군산의 법원 판사 두 가족의 부부가 부산행의 일행이었어. 중공군은 수원까지 점령한 때였지. 아버지의 옷 안에 만든 속주머니와 나의 저고리 안에 어머니가 새로 달아 준 깊숙한 속주머니에는 각각 비상금 뭉치가 들어 있었어.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각각 찹쌀가루 푸대 하나씩 맡았어. 서울의 1·4후퇴 뒤이므로 1월 하순의 혹한 속이었지. 군산 째보선창에는 돛을 내린 빈 돛대들이 솟아 있는 어선과 상선으로 꽉 차 있었어. 그 피란선을 탈 수 있는 피란민들은 아직은 거지꼴이 아닌 지역의 부유층이거나 식자층이었지. 요컨대 다시 인공시기가 되면 1차로 희생될 우익 신분이었어.

김형수=한 편의 소설 같아요.

고은=이제까지 바다 위에 떠 있는 경험이 없던 나는 둔탁한 돛폭이 오른 다음 선창의 빽빽한 선체 사이를 밀쳐내며 빠져나가서 바다 쪽으로 나갈 때 그 비현실적인 이동의 기대불안으로 내 가슴은 설레었어. 진작에 마을의 선배인 김기호와 함께 군산 장항 사이의 연락선을 타고 충남 서천의 김기호 이모 댁을 간 적이 있었지만 난바다로 나가는 배타기는 처음 겪는 일이었어. 한겨울의 격렬한 서북풍에 파도는 집채 덩어리로 너울져서 그 파도더미 사이의 이랑을 오르내리는 배는 아이들의 종이배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어. 노련한 두 어부와 심부름꾼 총각 말고는 도합 8명의 온순해진 피란민은 배가 금강의 탁류 밖으로 나아가는 동안 벌써 격랑에 의한 멀미를 앓기 시작했지. 판사 부인들은 뱃전에 대고 토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빈속의 것까지 토해내는 구토에서 헤어나지 못했어. 사나운 서북풍과 사나운 파도더미도, 지나치는 무인도들의 소나무들도 마구 울부짖어대고 있었어.

김형수=선생님에게 ‘난바다’의 경험은 전쟁의 안팎을 넘나드는 떠남의 입구였군요. ‘무인도의 소나무들도 마구 울부짖어대는….’ 한 사람의 시인이 왜 독자적인 정부여야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선택 불가능성 앞에 던져진 개인들의 고통 모두를 ‘노래’하는 자이기 때문이므로 그 기억은 어떤 전쟁사의 기록보다 우선하는 존재 보편의 진실을 내장하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고은=군산항 밖의 바다에는 작은 무인도가 몇 개 떠 있는데 그 가운데 노래섬도 있지. 겨울 내내 소리를 내는 섬이라 해서 그런 멋진 이름이 붙었는데 바로 그 겨울의 절규 오열 같은 소리야말로 서해의 난바다 어부들이 죽은 뒤의 원혼으로 울부짖는 노래라 해서 노래섬이 되었는지 몰라. 아마도 이 노래섬의 정신이 내 소년의 정신에 이입되어서 내가 선무당 몇 십 년의 시인 노릇을 하는지도 모르겠네.

김형수=알 것 같아요. 그리고 전쟁과 퍼즐조각 같은 개인사의 고통스러운 함수가 쉽게 잊히는 사회는 바다의 기억을 잊은 자들이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는 뱃멀미 같은 거란 생각이 듭니다.

고은=피란선은 그날 오후 여섯 시간쯤을 나아가서 비응도라는 어촌 5가구의 섬에 도착할 수 있었어. 피란민 전체가 멀미 구토의 연속으로 거의 시체상태로 늘어져 있다가 배가 뭍에 닿자마자 기적처럼 정상으로 돌아오더군. 인류의 저 아득한 생명 근원에서 바다의 기억이 살아남아 있건만 그동안 뭍에서의 인류로 이어오는 동안 뭍이야말로 생명의 본원인 사실이 바로 그 바다 몇 시간 위의 지독한 멀미로부터 뭍의 정상으로 돌아온 사실과 맞닿아 있는지 모르지.

김형수=농촌에서 자랐으면서도 바다에 대한 묘사는 정말 압권입니다. 언젠가 제주도 시절의 산문을 보고 놀랐었는데 미학적 비밀이 ‘난바다 정신’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가령, ‘봄비’ 같은 초기작만 보아도 액체의 언어로 고체의 심연을 그리는 귀기(鬼氣)를 만들어냅니다. 계속 듣고 싶은데 또 다음주를 기다려야 할 시간이 되고 말았어요.


<봄비>

물결이여 네가 잠든 물 우의 고요에
봄비는 내려와 죽는다.
물 우에 물속의 어둠이 솟아올라도
물결이여
네가 잠든 물 우에 받는 봄비로
먼 데 바위까지도 봄이게 한다.
아 너와 내가 잠든 물 우의 여기에도
한 덩어리의 바위가 침묵으로 떠오르는가.
허나 봄비는 내려와 죽는다.


<고은>

입력 : 2012-08-10 19:47:38수정 : 2012-08-10 19: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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