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5일 수요일

[한겨레 사설] 장준하의 ‘두개골 구멍’, 유신독재 증거인가

[사설] 장준하의 ‘두개골 구멍’, 유신독재 증거인가

진실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결국 모습을 드러내고야 마는가. 유신 시절 박정희 정권에 맞서다 1975년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던 장준하 선생의 타살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가 나왔다고 한다. 이달 초 그의 유골을 경기 파주시의 공동묘지에서 통일동산 ‘장준하공원’으로 옮기면서 검시가 이뤄졌고, 그 결과 머리 뒤쪽에 난 6㎝ 정도 크기의 구멍과 머리뼈 금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검시를 담당한 의사의 1차 소견이 ‘인위적인 상처로 보인다’는 것이니, 그가 숨진 원인은 흉기에 의한 충격일 가능성이 크다.

장준하가 75년 8월17일 경기 포천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을 때부터 타살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경찰은 “높이 14m의 낭떠러지에서 실족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경사 75도의 암반에서 굴러떨어진 사람치고는 몸에 큰 외상이 없었고 사인으로 지목된 ‘오른쪽 귀 뒤의 두개골 파열’이 단순 추락으로 생기기 어려운 상처였던 탓이다. 그럼에도 장준하의 주검은 의사의 간단한 검안만을 거친 뒤 매장됐다. 하지만 장준하는 자신의 몸에 생생하게 남겨진 증거를 통해 37년 만에 진실의 문을 열게 만들었다.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로 확정된다면 이는 유신독재의 가장 추악한 살인 행위로 기록될 것이다. 장준하는 1960~70년대에 숱한 체포와 투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체제에 대항한 사상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 대위로 항일투쟁을 한 그는 1953년 월간 <사상계>를 창간했다. 장준하는 지성계의 구심이 된 <사상계>와 다양한 정치활동을 통해 박정희의 굴욕적 한-일 수교 협상, 베트남 파병, 10월 유신 등에 맞선 치열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특히 그는 박정희의 친일 경력을 줄기차게 제기한 것으로 이름높다. 박정희로선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타살 여부에 대한 분명한 확인과 함께 누구의 지시로 어떻게 이런 일이 진행됐는지 밝혀내는 일이다. 앞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장준하의 죽음을 조사한 뒤, 유일한 목격자가 중앙정보부(중정) 사설정보원이라는 증언을 중정 직원한테서 받아낸 바 있다. 중정이 75년 초 장준하를 상대로 공작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만든 사실도 찾아냈다. 중정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런 의혹들을 낱낱이 확인해 가해자를 찾아 역사적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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