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유신과 5공 잔당, 그리고 박근혜

박근혜와 유신과 5공 독재의 하수꾼에 대한 기사.

고문에 가담했던 추재엽과 목격자이자 희생자 재일동포 김병진씨에 대한 한겨레 기사.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범죄를 자행하였던 자들이 심판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권력의 핵심부에 모이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독재타도"라는 정치구호는 어떤 의미도 없다. 독재권력의 "공주"와 하수인들이 정권을 장악한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 가치의 본질적 훼손은 없으리라. 그야말로 미래 지향적인 사고는 과거지사로 그들을 둘러씌우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어쩌면 진심으로 지금 외치고 있는 정치적 구호를 받들고 있는지도 모르고, 과거의 들어난 혹은 들어나지 않은 모든 부정의한 행업을 깨끗이 떨치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일꾼이 되려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들이 설쳐대는 현실이 바람직한 것일지 모르겠다. 과연 그러한가?

아래 기사의 추재엽과 같은 사례는 이런 관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게 보일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추재엽이 나서지 않더라도 보수건 진보건 그가 되고자 했던 구청장 노릇을 그에 못지 않게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현실은 과거의 부정의에 대한 교정의 최소한도의 요건 조차도 충족하지 못하는 것 처럼 보인다.

박근혜 후보와 추재엽 전 양천구청장.

추재엽 전 양천구청장 지원 유세 했던 사진 돌아
누리꾼 “고문기술자 공천 새누리, 고문기술자 지지 박근혜, 유신잔당들 답다”

과거 간첩사건 조작을 위해 고문에 가담했던 추재엽(57) 서울 양천구청장이 선거 과정에서 이를 부인했다가 최근 위증죄 등으로 법정구속된 가운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해 재보궐선거에서 추 후보의 지원 유세에 나선 장면이 온라인에서 회자되고 있다.

14일 트위터에는 지난해 양천구청장 재보궐선거를 앞둔 10월15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양천구 신월1동 신영시장을 찾아 지역 주민과 상인들에게 추재엽 양천구청장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선 장면이 돌고 있다. 사진 속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박근혜 의원이 추 후보 옆에서 웃음을 지으며 상인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담겨있다. 당시 박근혜 의원의 방문에 대해 일부 시민들이 항의하자, 지원유세는 14분 만에 중단된 것으로 전해졌다.

추재엽 양천구청장은 1980년대 국군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간첩사건 조작 위해 고문을 자행했던 사실을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당시 상대 후보로가 폭로하자, 이를 부인했다가 최근 재판 과정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11일 서울남부지법은 추씨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허위사실 유포)에 대해 징역 3월, 위증·무고 혐의에 대해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지난해 추씨를 지원유세한 장면이 알려지자, 트위터 사용자들은 “고문기술자를 공천한 새누리당, 고문기술자를 지지하는 박근혜. 유신잔당들 답습니다”(@Yan****) “박근혜, 추재엽을 공천하고 그의 선거운동하였었음에도 판결 결과에 대해 한마디도 없다”(@jhohm****) “딱 어울리는 한 쌍이 또 추가되네요”(@kj****) 등의 반응을 보이며 박 후보를 비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고문 목격 재일동포 김병진씨
“과거청산 머뭇대는 한국에
경종 울리려고 추재엽 고발”
“당시기억 떠올라 고통스러웠다”

추재엽(57) 전 양천구청장이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근무 시절 민간인 고문 사실을 법정에서 부인한 혐의 등(위증·무고·허위사실 유포)으로 지난 11일 당선무효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한겨레> 12일치 1면) 역사의 뒤안에 묻혔던 죄를 끈질기게 캐물은 이는 재일동포 김병진(57·사진)씨다.

일본에서 태어난 김씨는 재일동포 3세다. 일본 간세이학원대학 문학부를 다니던 김씨는 고국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1980년 3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2학년으로 편입해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1983년 7월9일, 김씨는 집 앞에서 보안사 수사관 4명에게 느닷없이 끌려갔다. 한국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와 세상에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아들에게 말 한마디 전하지 못했다. 수사관들은 잠을 재우지 않거나 전기의자에 앉히며 김씨를 고문했다. 간첩으로 조작돼 구속된 다른 인물에게 포섭돼 간첩 활동을 했다는 거짓 사실을 인정하라며 윽박질렀다.

고문에 못 이긴 김씨는 거짓 진술서에 서명한 뒤 풀려났다. 보안사는 일본어에 능통한 김씨를 검찰이 기소 보류하도록 했고, 대신 강제로 2년간 보안사 군무원으로 일하도록 했다. 김씨는 1984년 1월부터 일본 출신 동포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수사에서 통역을 맡았다.

이듬해인 1985년 서울 송파구 장지동 수사분실에서 김씨는 추재엽 당시 수사관을 만났다. 벌거벗겨진 채 각목에 매달린 재일동포 유재길(70)씨의 눈코에 추씨 등이 고춧가루 물을 들이붓던 장면을 김씨는 생생히 기억한다.

“제가 고문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너무 고통스러워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지난 4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전화기 너머 일본에 있는 김씨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나중에 유씨는 무죄로 풀려났다.

애초 약속했던 2년 근무가 끝날 무렵, 보안사 수사관들은 김씨를 붙잡았다. “너무 많은 일을 목격했다고, 저를 풀어주지 말자고 의논하더군요. 상관에게 뇌물도 바치고 술도 사면서 겨우 나왔습니다.”

1986년 1월, 김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자신이 겪은 고초를 글로 써서 <보안사>라는 책으로 냈다. 1988년 한국어 번역판이 나왔지만 노태우 정부는 이를 곧 압수하고 김씨에게 지명수배를 내렸다.

여권 발급을 금지당한 김씨는 2000년까지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2009년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보안사는 김씨에게 구타 등 가혹행위를 가하고 보안사 근무를 강요하는 등 중대한 인권침해를 했다”는 내용의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일본에서 영어·일본어 학원강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오던 김씨는 지난해 10월 추씨가 양천구청장 3선에 나선다는 사실을 알고 기자회견을 열어 추씨의 고문 경력을 폭로했다. “아직도 과거 청산을 머뭇거리는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추씨를 고발했던 것”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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