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한겨레 기사/사설] 무책임하고 정략적인 NLL 공세

[사설]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이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어제 ‘통일이 될 때까지 엔엘
엘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며 슬쩍 끼어들었다. 통일비서관 출신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통일부 국정감사 발언으로 촉발된 논란은 새누리당에 이어 이 대통령까지 가세하면서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핵심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한 회담에서 ‘엔엘엘 포기 발언’을 했느냐이다. 이에 대해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은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단언했다. 여기서 생산적인 논의가 되려면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먼저 내놔야 옳다. 일부 보수언론이 ‘관계자’의 입을 빌려 전하는 출처불명의 보도를 근거로, 녹취록을 폐기했느니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라느니 하며 정치공세를 할 일이 아니다. 가장 사실을 잘 아는 정상회담 배석자들의 발언을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내놓지 못하면서 국정조사나 문서 공개 타령만 하는 것은 스스로 대선용 정략이라는 걸 시인하는 것이다.
애초 엔엘엘은 1953년 정전협상 당시 경계가 확정된 육상과 달리 해상에서 경계선이 정해지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이양호 국방장관이 말한 것처럼 “정전협정과 관계없이 우리 어선의 보호를 위해, 또 우리 해군 함정이 북측 가까이 못 가게 하기 위해 우리가 공해상에 그어놓은 선”이다. 하지만 북은 1973년부터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1999년에는 서해 5도를 모두 자기 영역에 포함하는 군사분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유엔사령부가 이 선을 선포한 뒤 북이 20년 가까이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우리 군이 이를 방어선으로 삼으면서 사실상 경계선으로 굳어진 면이 있지만 법적으로 분쟁이 종결된 건 아니다.
엔엘엘과 관련해 남북이 유일하게 합의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도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뒤 나온 10·4 남북공동선언엔 “남과 북은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과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문제 등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측 국방부 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 부장 간 회담을 금년 11월 중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고 나와 있다. 공식 문서 어디에도 엔엘엘을 포기한다는 말이 없다. 이후 벌어진 국방장관 회담에서도 엔엘엘을 양보한 바 없다.
공식 문서에도 없고 실제 그렇게 일이 진행된 적도 없는데 ‘엔엘엘 포기 발언이 있느냐 없느냐’고 논란하는 것은 무용·무익하다. 더구나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는 “북이 엔엘엘을 존중한다면 서해평화협력지대를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권이 옭아매려고 하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도 엔엘엘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유력 대선 후보들이 모두 엔엘엘을 포기가 아니라 갈등 해결의 기점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데도 새누리당이 당장 공개하기 힘든 정상회담 대화록을 까발리자고 물고 늘어지는 건 죽은 대통령을 대선용 ‘유령 놀음’에 불러내자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NLL 발언’ 공방 전말
정 “NLL 포기 발언은 사실…의원직 등 정치생명 걸겠다”
문쪽 “공식 대화록엔 절대 없어” 새누리는 폐기의혹 제기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우리 쪽에서 녹음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2007 남북정상회담 비밀 대화록’ 논란을 촉발한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의 발언은 신빙성을 잃게 됐다. 정 의원은 “북한 통전부가 녹취한 대화록을 우리 비선라인과 공유했다”고 주장했지만 우리 쪽이 녹음을 했다면 굳이 북한이 녹취한 대화록을 넘겨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캠프의 진성준 대변인은 18일 “회담에 관여했던 실무자들에게 알아보니 회담에 배석했던 조명균 당시 안보정책비서관이 녹음을 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진 의원은 “당시 우리 쪽 배석자인 조명균 비서관이 녹음을 했지만, 녹음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아 별도 녹취록을 남기는 대신에 녹음과 메모를 참고해서 (녹취록이 아닌) 대화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조 비서관은 책상 위에 녹음기를 올려놓고 공개적으로 녹음을 해 북쪽도 녹음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비밀 대화록’ 있나? 현 정부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지낸 정 의원은 지난 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의 단독회담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으며, 이런 내용이 담긴 ‘비공개 대화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2007년 10월3일 오후 3시 백화원초대소에서 남북정상은 단독회담을 가졌다”며 “당시 회담 내용은 녹음됐고 북한 통전부는 녹취된 대화록이 비밀합의 사항이라며 우리 측 비선라인과 공유했다”고 말했다. 또 “그 대화록은 폐기 지시에도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에 보관돼 있다”며 대화록의 일부 대목을 공개했다.
당시 정상회담을 수행한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 등도 10일 회견을 열어 “단독회담도, 비밀 합의도 없었다”며 “(배석자가 정리한 공식) 대화록은 있지만 녹취록은 없고, 북에서 받은 것도 없다”고 말했다. 정 의원이 말한 회담 시간에 대해서도 “오후 3시는 다른 회담이 한창 진행되던 시간”이라고 일축했다.
정문헌 의원은 민주당 쪽이 반박할 때마다 한 발씩 물러섰다. 그는 12일 국회 기자회견에선 “두 정상의 대화는 북한이 녹음했고 이 녹취와 우리 측의 기록을 토대로 대화록이 만들어졌다”며 “민주당은 내가 ‘비밀 녹취록’, ‘비밀 단독회담’이라고 했다가 말을 바꿨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의원이 애초 ‘북한 통전부가 단독회담을 녹취한 대화록을 우리 측과 공유했다’고 한 것과 달리, “북한의 녹취와 우리 기록을 토대로 남쪽이 (공식) 대화록을 만들었다”고 말을 바꾼 것은 분명하다.
 ‘NLL 포기’ 발언 있었나? 정문헌 의원은 ‘비공개 별도 대화록’의 존재가 부인되자, “문제의 본질은 회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2일 기자회견에서 “노 전 대통령이 단독회담 자리에서 ‘남측은 앞으로 엔엘엘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라며 “국회의원직을 포함해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말했다. 남쪽이 작성한 공식 회담록에 노 전 대통령의 ‘문제 발언’이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과 문 후보 쪽은 이 또한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문 후보는 15일 선대위 회의에서 “정상회담 대화록은 당시 국정원과 통일부에 의해서 실제 대화 내용 그대로 풀워딩으로 작성됐다”며 “(내가) 대화록을 직접 확인했고, 국정기록으로 남겼다”고 말했다. 공식 회담록엔 ‘엔엘엘 포기’ 발언 따위는 담겨 있지 않음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공식 회담록 작성자인 김만복 전 국정원장도 18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공식 회담록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정 의원이 공식 회담록 외에 어디선가 입수한 ‘가짜’ 대화록의 잘못된 내용을 토대로 허위 폭로전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진성준 대변인은 16일 “문제를 제기한 정문헌 의원이 그 가짜 대화록을 즉각 공개하고, 입수 경위와 절차, 배경, 과정들에 대해서 낱낱이 밝히라”고 요구했다. 민주당은 17일 정 의원을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문 후보 캠프의 문병호 법률지원단장은 “정 의원이 없는 자료를 있는 것처럼 사실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공무상 기밀누설이나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혐의로는 고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협박, 무고’라고 맞섰다.
‘진짜’ 회담록엔 문제 발언이 없다는 반박이 나오자, 새누리당은 이번엔 회담록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로 폐기됐다는 의혹을 17일 제기했다. 그러나 문 후보는 이 또한 직접 반박했다. 그는 “참여정부 때는 이지원(전자결재시스템)으로 모든 문서가 보고되고 결재됐다. 이지원에 (일단) 올라왔던 문서가 폐기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며 “더구나 회담록은 국정원에도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손원제 조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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