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8일 토요일

[한겨레] 한홍구의 현대사 칼럼: 유신과 오늘

세상이 바뀔까 두려워하는 수구세력이 “세상을 바꾸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것은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유신세력이 이번 대통령 선거를 과거 세력과 미래 세력의 대결이라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다. 혹자는 이번 선거를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고 하고, 또 1차 티비 토론 이후에는 다카키 마사오 세력 대 김대중 · 노무현 세력의 대결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박정희의 네 번째 대통령 선거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국가예산의 10%를 퍼부었던 1971년 대선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또 다시 없도록” 운운하며 군복을 벗는 소회를 밝혔다. 20세기 지구의 곳곳에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수많은 군인아저씨들은 거의 다 군복을 입고 통치했지만,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야 했다. 남북분단이 동서냉전의 대리전을 수행하던 현실에서 미국은 자신의 쇼윈도에 군복이 걸려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부 일각에서는 원래의 공약대로 군은 깨끗하게 원대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은 군정을 연장하라고 데모하기도 하고, 박정희는 오락가락 갈팡질팡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로 가장 표차가 적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승부가 갈린 것은 윤보선이 박정희의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된 좌익 전력을 거론하며 제기한 사상논쟁이었다. 사상논쟁은 윤보선의 기대와는 달리 역효과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좌익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해 여기서 승부가 갈린 것이다.
평생 권력을 움켜쥐고자 했던
박정희는 두 번의 임기뒤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고
유신쿠데타 통해 국민들이
대통령 뽑을 기회마저 빼앗았다
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배운 건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유신의 부활이냐 종말이냐
우린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재격돌했다. 야당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신민당이라는 통일대오를 만들었지만, 후보로는 윤보선을 다시 내세웠다. 51세 박정희와 71세 윤보선의 대결,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박정희와 서울의 대부호 양반가의 후예 윤보선의 대결은 구도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경제개발계획이 궤도에 오르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돈이 풀리면서 국내의 경제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박정희의 독재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고, 박정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박정희는 4년 전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윤보선에게 116만 표 차이의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제3공화국 헌법은 4년 중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중임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55세가 되는 박정희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삼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달 여 후인 6월8일에 치러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초유의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확보한 개헌가능 의석을 이용하여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했다. 다른 신문들은 ‘통과’라 썼지만, 동아일보만은 언론의 자존심상 ‘통과’라는 말을 쓸 수 없어 ‘처리’라고 했다고 한다.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비록 야당이 패배하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선거로 꼽힌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 둔 시점에서 신민당 유진오 총재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 야당으로서는 1956년과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갑자기 세상을 뜬 데 이어 또 다시 불행한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이때 신민당의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출마한 신민당 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돌입했다. 여기서 이변이 발생해 2위였던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의 6·8총선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김대중의 지역구인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 정도로 김대중을 싫어했다. 그런 김대중과 경쟁하는 것은 박정희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이렇다 할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윤보선과는 달리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등 참신한 공약을 쏟아냈다.
박정희는 사회의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화시킬만한 능력도, 품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한 것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부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박정희 측의 선거에 깊이 간여했던 강창성이 뒤에 고백한 것처럼, 이들은 “모든 부정을 저질러서 박 후보의 당선을 만든 것”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242억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선거에 국가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700억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런 엄청난 부정을 자행하고도 정치신인에 가까운 김대중과의 표차를 94만 표밖에 벌리지 못했다. 1956년의 조봉암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떠돌았다.
유신체제 의전서열 2위와 최태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총통제 문제였다. 김대중은 이번에 박정희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하면 박정희가 총통제를 실시하여 영구집권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김대중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서 이번이 국민여러분께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마지막 선거라고 호소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박정희는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유신쿠데타를 통해 국민들에게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에게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일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렸다. 당시 국민학교에서도 반장은 학생들이 직접 뽑았는데, 국민들은 제 나라의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72년과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두 번이나 더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이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놀음일 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구호는 복잡하지 않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16글자에 집약된 뜻은 한 마디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
박근혜 후보를 흔히 유신공주라 부른다. 그런데 공주라는 말은 가끔씩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74년 여름 이후 박근혜는 유신체제에서 어린 공주가 아니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왕비가 없는 상태에서 공주는 유신체제의 의전서열 2위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섰다. 박근혜는 외모는 어머니 육영수의 온화한 모습을 많이 닮았지만, 속은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의 생리와 운영방법을 배웠지만, 불행하게도 박근혜가 보고 배운 시기의 박정희는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언로가 막혀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부들부들 떨고 재떨이 집어 던질지언정 기자들하고 논쟁도 했고 대드는 기자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그래도 기자들과 막걸리를 앞에 두고 때로 고성이 오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던 반면, 박근혜는 처음부터 얼음공주였다. 선거의 핵심과제인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힘들게 모셔온 김종인 전 의원조차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상황에서 박근혜의 눈이 발하는 레이저광선 앞에 모두들 침묵해버리고 만다. 최근 교통사고로 숨진 이춘상 보좌관의 죽음은 그가 박근혜 후보에게 그래도 불편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의 90퍼센트 이상은 구국선교단 총재라는 최태민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주한미대사 버시바우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2007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소문의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동생인 박근령 등 최측근이나, 박정희를 가장 열심히 찬양한 조갑제나 요새 TV토론에 보수진영을 대표하여 가장 빈번히 얼굴을 내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같은 사람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박근혜는 박정희 사후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곧 이사장 직을 사임하고 평이사로 내려앉았다. 영남대학은 영남학원 상임이사 김정욱, 곽완석 사무부처장, 손윤호 영남병원사무장, 조순제 영남투자전무 등 박근혜가 임명한 측근 4인과 이사진이 1인당 2천만 원이라는 거액(현재는 2~3억 가치)을 받고 30여명을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들과 이사진은 마땅히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박근혜와 측근들이 영남학원에서 영원히 손을 떼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때 박근혜와 함께 사임한 이사진은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김창환, 손미자 등인데, 이들은 모두 정수장학회의 이사를 지냈다. 이들 중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김창환은 최태민의 사촌,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 아들, 손윤호는 최태민의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학원 이사진에서 부정행위로 쫓겨난 자들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여전히 이사로 기용했다. 현재 박근혜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진들의 골격은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가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시바우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평한 최태민의 그림자가 박근혜가 흉탄에 어머니를 잃은 황망했던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 80주기, 다카키 마사오를 생각한다
볼셰비키혁명을 촉발했다고 일컬어지는 제정러시아 시대의 괴승 라스푸틴은 황제까지 혹하게 만들었으나, 박정희가 최태민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자 술 친구로 10 · 26 사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김계원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처럼 박정희는 “그 X(최태민)가 그 X(박근혜)를 홀렸다”며 최태민과 박근혜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김계원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최태민은 박정희보다도 5살이나 많았는데, 최태민의 존재는 박정희는 물론이고 비서실장 김계원, 민정수석 박승규, 정보부장 김재규 등의 골칫거리였다. 운명의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는 항소이유서 보충서에서 10·26사건의 먼, 그러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박정희를 친형처럼 따랐던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 계기였던 것이다.
올해 대선일인 12월19일로부터 정확히 80년 전인 1932년 12월19일 일본의 처형장에서 벌어진 일.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린 뒤 10m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켜 핏자국으로 일장기 모양을 만들었다.
박근혜는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본 따 새마음 운동을 전개했다. 최태민이 부추긴 공주놀음에 푹 빠져 아버지 속을 지지리도 썩인 딸은 나이 지긋한 교장선생님이나 지역의 원로인사들을 모아 예행연습까지 시키며 몇 시간 씩 줄지어 세워놓고 효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영애님 오셨다고 큰 절을 했다. 육영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도 이런 절을 받지는 않았다며 김재규는 왜 어린 박근혜가 노인들 절 받느냐고 탄식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최태민 문제로 골치를 썩으며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고 봉건시대의 임금마냥 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행하는 등 최태민을 떼어 놓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썼으나 울며불며 난리 치는 박근혜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에미도 없는 게 시집도 안 가고 애쓰는 게 불쌍하다”는 박정희의 동정이 화를 키웠다면, 지금도 박근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일부 대중들의 값싼 동정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 과제는 경제민주화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한 발 오른 쪽으로 가긴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제헌헌법은 국가보안법에 깔려 질식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박정희라는 동일인물에 의해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나 짓밟힘을 당했고,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으면서 민주주의가 소생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또 다시 박정희의 경호장교였던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학살을 겪어야 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간신히 정치적 민주주의만을 회복했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민주화의 과실은 일반 시민들보다도 재벌과 관료와 수구언론이 따먹어 버렸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와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서 양극화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6월항쟁으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한국사회는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명박이 가져온 역사의 퇴행은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박정희의 부활이냐, 정치적 민주화에 이은 경제민주화를 성취하느냐의 갈림길에서 2012년의 선거를 치르게 된다.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의 80주기가 되는 날이다. 일제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윤봉길 의사를 처형했다. 일제는 25세의 청년 윤봉길의 무릎을 꿇려 낮은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렸다. 그리고 10미터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윤봉길 의사의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였으니 저들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으로 일장기를 그린 것이다. 박정희가 하필이면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명치유신의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골라 자신의 제삿날로 삼은 것도 심상치 않은 우연이지만, 윤봉길 의사의 80주기 되는 날이 18대 대선일인 것도, 그 날이 다카키 마사오를 숭상하는 세력과 민주세력의 한판승부가 벌어지는 것도 범상치 않은 우연이다.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프레시안] 론스타 소송, 한미 FTA와 ISD

김 익 태 변호사

미국의 자동차 번호판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주마다 번호판의 디자인과 문구가 다르다. 내가 살던 일리노이 주는 링컨의 고향인 이유로 "링컨의 땅(Land of Lincoln)"이다. 미연방에서 두 번째로 큰 주인 텍사스 주는 "론스타의 주(Lone Star State)"이다. 1845년에 26번째 주로 미연방에 가입하기 이전까지 별개의 독립 국가였던 텍사스 공화국의 국기에 담겨 있던 별 모양의 상징이었던 론스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론스타는 텍사스 주의 상징이다.

이 텍사스 주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고향이며 최근 대한민국을 상대로 투자자-국가 소송(ISD)을 제기한 '먹튀' 자본 론스타의 고향이기도 하다. 외환위기를 틈타 헐값에 외환은행을 인수하고 꽤 많이 챙겨서 작년 말에 떠난 걸로 알고 있는데, 2조 4000억 원 정도를 덜 챙겼다며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소장을 보자는데 정부는 안 보여준다. 궁금하면 500원 내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알 것 없단다. 2조 4000억 원은 소송에서 패소하면 전 국민이 5만 원씩 부담해야 하는 액수인데도 여전히 비공개이다. 그렇다면 지난번 중재의향서의 경우처럼 론스타가 먼저 보여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결국, 중재의향서에 기초하여 판단을 해보면 내용은 이렇다.

한국과 벨기에가 1976년에 맺은 투자협정에 의하면 벨기에 회사는 한국에서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으로 인한 수익금에 대해서 세금을 물렸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벨기에에 있는 론스타 회사가 페이퍼 컴퍼니라서 한국에 있는 론스타 코리아를 국내 고정사업장으로 판단하고 이에 과세를 했다고 한다. 한데, 문제는 한-벨기에 투자협정에 의하면 페이퍼 컴퍼니는 협정 적용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이 없다. 페이퍼 컴퍼니에 대한 협정 적용 배제 조항을 두었어야 하는데 협정 체결 시 이를 간과하였고 2006년 개정 시에도 역시 간과하였다. 따라서 한국 정부의 과세는 협정 위반이라는 것이다. 법리적으로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두 번째의 주장은 이른바 론스타가 산업자본인지 금융자본인지에 대한 판단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금융당국이 론스타의 자본 성격에 대해서 제때에 적절하게 판단하지 못함으로써 매각이 지연되었고 이로 인해서 론스타는 더 비싼 값에 외환은행을 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최초에 론스타가 한국에 들어올 때는 금융자본이라고 인정해 주고서는 왜 툭하면 자본의 성격에 대해 시비를 걸고 론스타 코리아의 대표를 구속하는 등 괴롭히면서 매각을 지연시켰냐는 말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론스타는 제때에 외환은행을 팔지 못하여 더 많은 매각 이윤을 얻지 못하였고 이는 간접적으로 재산을 빼앗아 가는 행위와 마찬가지이므로 간접수용이라는 주장이다.

법적으로 볼 때 이 주장 또한 설득력이 없지 않다. 한국 정부의 일관성 없는 비밀행정으로 발생한 문제의 성격이 크다. 결국, 금융당국의 무책임하고 비밀스러운 행정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인데, 이로 인한 책임은 고스란히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한민국이 ISD 소송에서 패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득을 보았을 텐데 책임은 국민이 져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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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SID와 한국 사법부 판결이 충돌한다면?
패소하면 억울하더라도 2조 4000억 원만 물어주면 끝인가? 아니다. 사법주권의 문제가 발생한다. 2012년 1월 금융당국은 최종적으로 론스타가 금융자본이라고 판정을 해줌으로써 스스로 면죄부를 발행했다. 이에 국회의원과 외환은행 소액주주들은 2012년 7월 헌법재판소에 금융당국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역시 2012년 7월에, 참여연대는 서울중앙지법에 론스타가 산업자본임에도 부당한 이익을 챙겨간 것에 대해 환수 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건 모두 론스타가 산업자본인지에 대한 판단이 핵심 쟁점이다.

그런데, 론스타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제투자중재재판소(ICSID)에 제소한 이번 ISD 사건의 내용 또한 론스타의 자본 성격에 대한 판단이 핵심 쟁점이다. 같은 내용에 대해서 국제중재재판소와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비슷한 시기에 판단을 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국제투자중재재판소의 심사는 사실관계와 근거법에 대한 해석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법적 해석의 영역과 중복된다.

론스타 사건의 경우, 우리의 은행법 하에서 론스타 자본의 성격에 대한 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국제투자중재재판소가 판단하게 된다. 이 투자중재재판소가 론스타의 손을 들어주면 우리 정부는 ICSID 협약에 의거하여 국내 사법 절차를 통해 배상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내사법 절차는 투자중재재판의 결과를 재차 심사하는 별도의 절차가 아니다. 국내법상의 배상 집행절차일 뿐이다. 3인의 패널이 진행하는 국제투자중재재판은 항소도 불가능하며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판 무효 신청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동일한 사안을 가지고 심사하는 국제투자중재재판소와 대한민국의 사법부의 판단이 충돌할 경우에는 어느 쪽의 판단이 우선할 것인가? 즉, 국제투자중재재판소는 론스타의 손을 들어주고 배상명령을 내렸는데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법원은 론스타에 불리한 판단을 내릴 경우, 국제투자중재재판소의 판단은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판단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한국 사법부의 판단이 무력화될 가능성이 있다. 한미FTA 논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ISD와 사법주권의 문제가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동일한 근거법을 가지고 국내의 사법부와 3인의 국제투자중재재판소가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때, 국내 사법부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중재재판부의 배상 명령을 이행해야 한다. 혹시, 국제투자중재재판소의 무리한 판단에 대해 별도로 국내 사법부가 심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 이 부분에서 사법부의 법리적 고민이 시작된다.

국제투자중재재판소의 보상 명령의 근거는 대한민국이 1966년에 가입한 ICSID 협약이다. 중재기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을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해외투자가 전무하던 사실은 차치하고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시절에 우리는 ICSID의 회원국이 되었다. 이러한 ICSID 협약은 국제조약으로서 헌법 제6조에 의해 국내법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국내법적 성격을 지닌 조약으로 인한 중재재판소의 판단이 헌법적 기준에서 국내법을 심사하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무력화할 수 있는 상황의 발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 헌법재판소. ⓒ뉴시스

미국 연방대법원과 메데인 사건
이 점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의 의미 있는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2008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메데인 사건(Medellin vs. Texas)이라는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 1993년, 18세의 멕시코 국적의 소년 메데인이 텍사스에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소년의 혐의는 입증되었고 소년은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대부분의 사형 확정 판결이 그렇듯이 소년의 변호인은 다양한 절차상의 문제점을 들어 항소하였다. 그중 하나가, 메데인은 멕시코 국적을 가진 멕시코 시민인데 멕시코 대사관에 소년의 체포에 관해 고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9년 체결한 비엔나 협약에 의하면, (미국을 포함한) 협약 가입국은 자국에서 외국인의 체포나 구금 시 지체 없이 자국에 있는 외국 대사관에 그 사실을 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데, 메데인이 체포되었음에도 그러한 사실이 주미 멕시코 대사관에 고지되지 않아서 텍사스 주가 비엔나 협정을 위반하였다는 것이다. 소년의 주장은 기각되었다.

그런데, 몇 년 후인 2003년 멕시코 정부가 메데인과 그 외에 미국에 수감되어 있는 51명의 자국민에 대한 수감 내용을 고지하지 않음을 들어 UN 산하의 국제재판소(ICJ)에 미국을 제소하였다. 이듬해, ICJ는 멕시코의 손을 들어주고 메데인을 비롯한 다른 멕시코 확정범들에 대한 판결과 형량에 관해 미국 법원이 재고할 것을 명령하였다. 사안이 국제적인 이슈로까지 번지자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은 국제재판소가 내린 결정을 따를 의무가 있으니, 사법부는 국제재판소의 판결을 존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2008년 연방대법원은 국제재판소의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비록 미국이 ICJ 가입국이기는 하지만, 국회에서 ICJ의 효력에 관한 상세한 연방법을 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이것은 국제법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이다. 국제조약에 관한 미국 사법부의 지나치게 보수적인 경향성 때문이다. 강대국의 오만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국의 사법 체제를 보호하려는 측면에서 보면, 현재 우리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국제중재법정에 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된 한-벨기에 투자협정은 체결 당시 국회 비준을 거치지 않고 발효되었다. 그런데, 헌법 제60조 1항에 의하면, "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 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2조 4000억 소송을 가능하게 한 한-벨기에 투자협정은 ISD 소송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음으로 인해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서 어떠한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외국인 투자자가 우리의 사법주권까지 무력화할 수 있는 ISD 소송을 바라보며 이제 우리의 사법적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되었다.

2012년 12월 5일 수요일

[프레시안] 안철수캠프의 한계와 오류

고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 

새로운 정치를 향한 안철수 후보의 실험은 야권단일화 과정에서 안 후보가 사퇴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난 거대한 에너지에 비해 현실정치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너무 싱거웠다. 안철수 후보는 출마선언 이후 줄곧 문재인 후보의 단일화 공세에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했으며, 사퇴까지 1%의 지지율도 올리지 못했다. 반면에 문재인 후보는 당내 경선승리 직후부터 사력을 다해 민주당을통합했으며 안 후보를 민주당에서 격리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문재인 후보는 호남과 40대를 중심으로 관망 층으로 남아있던 유권자들을 흡수하여 지지율을 10% 이상 끌어올렸다.

단일화 과정의 승패에는 문재인 후보 측의 선전(좋은 의미+나쁜 의미)도 있었지만, 안철수 후보 진영의 정치적 미숙함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안철수 후보에 대한 지지세는 조직과 세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이나 흔들림 없이 지속될 정도로 매우 견고한 것이었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안철수 후보는 진보성향, 호남, 20~40대의 다양한 연령의 유권자 층에서 문재인 후보보다 더 강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안 후보 진영은 자신의 강점을 하나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말았다.

안철수 후보 진영의 한계와 오류는 가치·노선, 조직·리더십, 전략의 세 가지 차원에서 짚어볼 수 있다.

▲ 캠프 해단식에 나타난 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스타일리시 중도?첫 번째, 안철수 후보 측은 가치·노선을 확고하게 정립해내지 못했다. 안철수 후보의 지지층은 진보에서 중도, 부분적으로는 합리적 보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다. 지지층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은 누구보다 폭넓은 정치세력을 형성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이지만, 이질적 세력들을 통합해내지 못할 때 심각한 정체성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약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미 열린우리당의 실패가 우리에게 보여준 바였다.

문제는 이질적 세력들을 어디에 '중심'을 두고 통합하느냐에 있었다. 내 견해로 그 중심이란 '새로운 진보'였다. 안철수 후보의 정책노선이 진보적으로 가야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우리 사회의 산적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노무현정부와 민주당의 불철저한 노선까지도 극복하고 더 혁신적인 내용의 구체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새로워야 하는 이유는 진영논리, 패권논리, 기득권논리에 사로잡혀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외면해 온 여야의 낡은 정치 틀을 과감하게 깨는 근본적 정치혁명을 요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후보는 출마선언 직후 중도에 방점을 두는 행보에 치중했다. 안철수 후보는 "좀 더 중도로 이동하라"는 내외의 권유를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먼저 정책의 측면에서 '혁신경제'라는 차별화된 담론을 내세운다는 것이 그만 경제민주화를 분리해냄으로써 참여정부의 '성장동력 육성정책'을 연상시키는 기술주의적 한계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다. 이 때문에 과감한 사회경제적 의제가 한 동안 거의 제기되지 못했다. 이런 관성은 막판 TV토론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출마선언 직후 안철수 후보의 행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스타일리시'였다. 진보적 정책과 의제를 충분히 깔지 않은 채 스타일만 앞세우다보니 자연스럽게 중도가 되어버렸고, 문재인 후보보다 개혁성이 뒤처지는 것으로 비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안철수 후보의 행보는 우선순위가 뒤바뀐 면이 있었다. 또 초기에 '덧셈의 정치', '통합의 정치'와 같은 담론들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었다. 정치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려면 권력, 선거, 정당의 패권, 특권, 기득권 구조의 타파를 요구하는 것이 옳았다.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여야 정치권의 무능과 배신을 질타하고 국회에서 당장 필요한 입법조치를 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새로운 정치에 훨씬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안철수 후보가 이런 문제들을 완전히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시점부터 안철수 후보는 혁신경제의 담론이 갖는 한계를 인식했으며 경제민주화의 담론으로 다시 복귀하기 시작했다. 재벌개혁위원회의 설치나 계열분리명령제의 도입, 막판에 나온 노동공약은 문재인 후보보다 진보적인 위치로 자리매김 되었다. TV양자토론에서 문재인 후보가 계열분리명령제 도입 공약을 두고 "재벌해체 아니냐?"고 물었을 때는 역공의 찬스였다. 하지만 타이밍이 많이 늦은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의제의 초점이 정치혁신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그 같은 변화는 별로 커다란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도 안철수 후보는 적어도 정치개혁공약만큼은 계속 중도적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일각으로부터 '반정치' 아니냐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정치권의 기득권·특권을 내려놓자는 문제제기는 안철수 후보 아니면 생각해 내기 힘든 매우 정확한 방향 설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총론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론에 있었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는 정치쇄신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제기하지 못했고, 단일화 협상과정에서 제대로 관철시키지도 못했다. 오히려 '의원정수축소'나 '반값선거비용' 같은 비본질적 문제에 발목이 잡혀버렸다. 특히 이 문제를 가지고 진보적 지식인·언론·시민운동세력과 불화구조를 형성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안철수 후보가 진보개혁진영 내부에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모습에 많은 야권성향 지지자들이 충격을 받고 급격히동요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문재인 후보는 지속적으로 노동, 일자리, 복지 등 경제민주화의 영역을 공략해 나갔다. 진보의제는 어느 사이 조금씩 문재인 후보의 브랜드로 굳어가고 있었다. 문재인 후보에게 '진보개혁'의 영역을 스스로 내준 것은 나쁜 선택이었다. 아직도 한국의 많은 정치전문가들은 선거승패의 최종적 관건은 중도적 유권자를 잡기위한 싸움이라고 믿고 있다. 안철수 캠프 역시도 중도적 무당파 유권자들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전략운영의 커다란 비중을 할애했다.

그러나 한국의 중도층은 양극단을 끌어당기는 중위투표자라기보다는 좌우 양쪽의 세력에 의해 견인되는 스윙보터의 성격이 더 강하다. 한국의 선거정치에서 진보적 세력이 외연을 확대하는 가장 유력한 전략은 자신의 핵심지지자들을 결집시켜 그들에게 열정을 불어넣고, 이슈와 바람을 만들어 투표율을 높이는 데 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치러졌던 수많은 중대선거에서 하나의 법칙처럼 입증된 결과였다. 이슈와 바람이 있을 때는 민주진보가 승리했고, 그것이 소멸되었을 때 보수가 승리했던 것이다.

이렇게 의제를 다루는 데서의 중도주의적 편향, 스타일 정치의 함정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안철수 후보는 지지기반의 응집성과 결집력, 내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에 환호했던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대부분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이런 요인들은 결국 야권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 측이 압박을 가해 왔을 때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단일화 프레임을 얕봤다두 번째로는 전략의 한계였다. 안철수 캠프의 지도부는 전략플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처해 나갔을 뿐이다. 그것을 만들려는 의지도,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능력부족을 메우기 위해 인적 자원을 보강한다든지 하는 생각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무엇보다 단일화 프레임의 위력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필자가 그것의 위력에 대해 5년 전 나름의 경험에 근거해 선제적 대응의 중요성을 누누이 역설했으나 지도부는 안일했다.

안철수 캠프의 지도부는 대중의 정권교체 열망을 과소평가했다. '새로운 정치'와 '정권교체'의 담론을 정교하게 양립시키지 못해 혼선을 빚은 결과 정권교체를 바라는 대중들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단일화 전략과 관련해서 안철수 후보는 양극단을 오가는 모양이었다. 초기에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에 대해서 너무 늦게 반응했고 방어적으로 대했다. 그러는 사이에 호남, 40대 유권자들이 문재인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고, 안-문간의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압박을 느낀 안철수 후보는 결국 11월 5일 광주방문에서 전격적 후보회동을 제의했고, 11월 6일에는 후보등록 전 단일화에 합의했다.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수용은 안 후보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무장해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을 제어할 수 있는 어떤 장치도 없었으며, 후보단일화 시점을 못 박아버린 것은 스스로의 발목을 옭아매는 결과가 되었다.

단일화 프레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안철수 후보 측이 일찌감치 '새로운 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상위 프레임을 만들어야 했다. '미래권력론'과 '정당혁신론'으로 새누리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까지도 기득권 정치의 틀로 묶어놓고, 민주당에 강력한 쇄신압력을 가해야 했다. 문재인 후보와 정책과 정치혁신에서 적극적으로 차별화하면서 최대한 세게 압박하고, 주도권에서의 명백한 우위를 유지해 나가야 했다.

그런 연후에 다음 단계에서는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민주당과 손잡고 함께 가는 것이 불가피함을 중도 및 무당파층에게 설득하면서 민주당과의 융합을 시도해야 했다. 융합의 방향은 낡은 체제를 넘어 새로운 체제로 가기 위한 수권 가능한 미래권력의 형성을 과감하게 제기하는 것이어야 했다. 미래권력의 형성은 정치쇄신-정당쇄신의 기반 위에서 민주당과 안철수 후보 진영이 결합하는 새로운 미래정당 건설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미래'와 '새로움'이라는 키워드 위에서 민주당과 안철수의 장점을 결합하는 정치세력의 형성이야말로 미래권력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이렇게 하면 안철수 후보는 새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민주당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 민주당의 테두리에 갇혀있는 야권성향의 지지층에 효과적으로 사다리를 놓을 수 있었고, 동시에 조직과 세력이 없는 불안한 후보라는 이미지를 일거에 걷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 측은 시종일관 민주당에 지나치게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했다. 민주당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매우 신중한 태도로 일관했는데, 후보야 좀 점잖게 할 필요가 있었다 치더라도 참모들까지도 후보와 똑같은 수준의 태도를 취했었다는 것은 정말 문제였다. 핵심참모들은 민주당에 거칠게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민주당에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민주당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민주당 쇄신이라는 목표를 일관되게 지향하면서 유연하고도 단호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또 안철수 캠프는 민주당에 정당쇄신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않았고, 사실 제기할 능력이 없었다. 정치·정당분야 공약을 끝내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이를 입증했다. 막판에 전남대 강연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통한 '국민연대'라는 방향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강제할 어떤 장치도 없었고, 너무 추상적이었다.

캠프 핵심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세 번째로는 조직·리더십의 한계였다. 안철수 후보 진영의 조직·리더십은 현장 및 대중의 흐름과 유리되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조직은 크게 리더십을 형성하는 코어집단, 활동조직, 추종세력으로 범주를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집단은 바로 코어집단이다. 코어는 철학적 원칙, 역사적 비전과 지식, 기본노선, 실행능력을 공유하는 훈련된 리더십집단이다. 그래서 코어는 철저하게 검증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개인의 명망을 앞세우는 사람, 자신의 권력을 키우는 데 몰두하는 야심가, 직업적 브로커들을 멀리해야 한다. 미국식 유행을 따라 한국에서도 기본전략을 정치컨설턴트들에게 많이 의존하는데, 그들은 조직의 철학·역사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만일에 코어가 잘못 짜이면 확장 과정에서 반드시 균열이 생겨 자체의 무게로 인해 쓰러지고 만다. 반면에 활동조직이나 추종집단은 여러 가지 재능과 역할의 필요성을 기반으로 구축된 집단이기 때문에 다소간의 이질성이 불가피하고, 윤리적 수준도 코어집단에 비해 순도가 훨씬 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코어만 튼튼하면 좀 순도가 떨어져도 용인될 수 있다.

그런데 안철수 캠프에서는 코어와 활동조직·추종집단 간의 관계가 다소 역전된 듯이 운영되었다. 먼저 안철수 캠프의 지도부는 구성의 원칙과 기준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한데다 구성되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능력을 제대로 검증받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도부는 캠프 내외의 비판에서 빗겨나 관대한 대우를 받았고, 반면에 활동조직이나 추종집단은 엄격한 잣대를 요구받았다. 순도가 떨어지거나 생각이 좀 다르다 싶으면 구태정치라고 인식하는 습관이 강했다. 이런 태도는 능력 있는 사람의 진입을 차단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이런 행태는 캠프가 민주주의적 조직운영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였다. 캠프의 핵심으로 통하는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문가와 활동조직이 오랜 시간 동안 토론하고 고민해서 올라간 의견은 정반대의 이상한 물건이 되어 최종안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결정하는 윗부분과 토론하고 작업하는 아랫부분이 따로 놀았다. 이런 틈새를 파고들어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한편 출마선언의 지연은 가치·노선의 정립과 코어의 팀워크 구축에 필요한 최소한의 절대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추석 이후 전략기조와 지도부의 신속하고 과감한 교체 내지 보강이 필요했으나 시간적 임박성과 대체 자원의 결여 때문에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출마선언 이후 안철수 후보가 펼친 정치실험에서는 그가 그전에 가다듬어 놓은 생각들이 대부분 굴절되고 증발되어 나타났다. 안 후보 역시 자신의 생각과 현실이 자주 괴리되어 나타나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현실이 발전되어 나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본성적으로 선한 사람인데다 완벽성, 완결성을 추구하는 강렬한 습관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자신이 했던 말이 대중들에게 빈 말이 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매사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몸속에 깊이 각인된 것으로 보인다. 의원정수축소 문제에 대해서 그가 강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런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신당 창당 유혹에 흔들릴 게 아니라...안철수 캠프에 참여했던 나의 지인이 얼마 전 안철수 후보가 DJ와 무척 닮은 것 같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안 후보가 DJ와 다른 점도 있다고 했다. 즉 DJ가 현장의 전문가, 이해당사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면서 결정을 해나갔다면, 안철수 후보는 그에 대한 노하우와 네트워크가 시간적, 경험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상당히 적절한 지적이 아닐까 싶었다. 바로 그런 점이 안철수 후보의 정치실험에 나타났던 한계와 오류를 신속하게 정정하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철수 후보가 짧은 시간의 정치실험을 통해 보여준 잠재력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객관적 현실여건에 비해 그 이상의 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틀린 것은 아니다. 정치와는 전혀 거리가 멀게 살았던 데다, 사회과학적 인식능력을 훈련할 시간과 기회도 없었던 사람이, 아무리 대중의 열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해도, 대통령선거에 뛰어들어 이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것도 조직화된 세력의 뒷받침 없이 거기까지 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정치를 꽤 해보았던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했던 숱한 실수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그는 노무현 후보에 비해 너무 정적이고 추상적이며 미괄식 화법을 쓴다는 약점도 갖고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으로 당분간 가치·노선, 전략, 조직·리더십의 전면적 쇄신을 위해 성찰과 정진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정치실험에서 보여준 것으로는 당장에 어떤 정치실험을 재개해도 기존의 한계와 오류를 반복할 것이다. 앞으로 그의 주위로부터 대선 후 신당을 만들자는 등의 여러 유혹들이 밀려들 것이다. 이런 유혹들에 그가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야권이 정권교체에 실패했을 경우 그런 유혹은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감히 그에게 제언하건대 당장의 남은 대선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를 쿨하고 화끈하게 도와주는 것 말고는, 자기성찰과 쇄신의 시간들을 가지면서 때를 기다리는 긴 호흡의 계획들을 짜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