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한겨레] 박노자 한국의 안과밖 "최악의 대통령"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이 글을 쓰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해야 하겠다. 실은 나는 대통령을 누가 하는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 대통령은 누가 되든 1997년 이후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한 번도 바뀌거나 수정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 문제가 된 철도를 보라.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바꾸는 등 대자본이 철도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최초로 만들어낸 것은 노무현 때였다. 또 고속철도 여승무원의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다단계 간접 고용도 노무현 때에 이루어진 것이고, 여승무원들이 2006년 이후로는 몇 년간 이에 맞서서 투쟁을 했는데도 ‘민주적’ 정권으로부터 받은 것은 탄압밖에 없었다. 2009년에 철도 파업을 탄압해서 169명의 해고자를 만든 것은 이명박이었다. 오늘날 파업은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 민영화 입법 철회를 위한 최초의 철도 파업은 김대중 시절인 2002년에 이미 일어난 바 있다. 과연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김대중이나 노무현과 같은 자유주의 정권과 그 후의 극우정권의 차이는 그렇게까지 클까?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정책의 핵심을 대통령이 주체가 되어서 정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재벌들의 두뇌집단들과 해외 대자본의 요구를, 당선에 성공한 정객들이 알아서 가감해서 경제정책이라고 내놓는 것이다. 사실 외교정책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통령이 햇볕정책, 곧 햇볕이 행인으로 하여금 옷을 벗게 하듯 북한의 시장화를 유도하겠다는 차원에서 제한적인 대북 경협 정도 할 권한까지 있다. 노무현 초기처럼 중국에 대한 친화적 제스처를 할 권한까지 부여돼 있으며, 또 워싱턴의 천자(天子)가 이라크 출병과 같은 일을 명령할 때에 내색을 하여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을 자유도 있다.

그러나 일개 후국(侯國)의 후왕(侯王)으로서는 제국의 출병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경쟁 제국인 중국에 제스처 이상으로 정치·군사적으로 가까워진다는 것은 대통령이 누가 돼도 거의 상상 밖의 일이다. 행여나 다시 한 번 노무현의 적자들이 정권을 잡아도, 예컨대 남북 공동의 군축을 해가면서 북한과 군사·안보협력을 시작하는 등 실제적인 미·일·한 삼각 동맹의 틀 깨기는 지난할 것이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기존의 보수적 기본틀이 남아 있는 한, 곧 어떤 급진적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정치·군사적 미 제국에의 복종은 우리에게 그저 존재의 기본 조건일 뿐이다. 그러기에 대통령이 누가 되고 대통령이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일희일비할 것이 있는가?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지난 25년을 통째로 돌아보면, 이 정도로 시대착오적이고 비상식적인 권력이 태어난 것은 처음인 듯하다. 사실, 이와 같은 수준의 극우정객이 정당 당수, 그리고 대통령 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 최고 선거직을 지향하는 정치인의 ‘품질’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박근혜의 지난 1년의 집권기간이 보여준 것은 극우 정객 출신의 대통령치고도 박근혜가 너무나 독보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지난 25년을 통째로 돌아보면, 이 정도로 시대착오적이고 비상식적인 권력이 태어난 것은 처음인 듯하다. 사실, 이와 같은 수준의 극우정객이 정당 당수, 그리고 대통령 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 최고 선거직을 지향하는 정치인의 ‘품질’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검증 시스템이 작동되었다면, 차후 보수에도 재앙이 될 ‘박근혜 집권’이라는 이름의 필패의 희비극을 사전에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에 비하면,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에 나선 노태우나,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하려고 했던 김영삼마저 통일지향적 진보정치인으로 보일 정도다. 촛불 사태에 밀려 대운하 등 가장 망상적인 계획들을 그래도 철회하거나 대폭 수정한 이명박은 소통할 줄 아는 정치인으로 보일 정도다. 사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 곧 재벌의 대주주들은 박근혜의 대통령직 수행 능력 수준이 다 들통난 지금쯤에 그들의 마름 격인 그녀를 해임해야 하지 않을까를 신중히 고려해볼 만하다. 이렇게 가다가는 종국에 가서는 그들의 부까지 ‘안녕’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전임자인 이명박의 대북 정책은 완패했다.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어간 햇볕정책을 포기했는데, 남한 보수 일각에서 기대했던 바와 정반대로 북한은 위축되긴커녕 정권 세습의 작업을 비교적 원활하게 하여 새로운 권력체계를 공고히 하는 한편 중국 투자와 대중국 무역,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자본주의라고 할 개인 소기업의 발전에 힘입은 경제성장을 계속해왔다. 이 와중에서 집권한 박근혜는 마음만 먹었다면 전임자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자신처럼 선조의 후광에 기대는 평양의 새로운 권력자와 건설적 관계의 수립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적대적 대북관계로 일관했으며, 대북관계 개선 대신에 과거의 ‘북풍’과 다를 바 없이 이북 문제를 계속해서 국내 정치에 이용해왔다.

정상적 대북 협력관계를 지속해온 노무현은, 거기에 힘입어 미국의 후국 신세를 비록 벗어나지 못했다 해도 그나마 동북아 균형자론 등 미국과 중국 사이의 등거리 외교의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제스처로 중국에 호소라도 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박근혜는 대북대립노선으로 내달리는 이상,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지금과 같은 중-미 갈등에서 한반도 주민들의 실질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으로 일관하여 대륙(중국·러시아 등)으로부터의 소외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는 대일관계에 있어서는 겉으로는 강경자세를 취함으로써 미·일·한 삼각 동맹에 사실상 올인한다는 사실을 덮으려 하지만, 극도로 편향된 대외정책이라는 것을 과연 감출 수 있겠는가?

박근혜의 국내 정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대민(對民) 투쟁’이라고 할 만하다. 신자유주의적 의제로 일관하는 것은 김대중이나 노무현과 별 차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노동계에 그때그때 양보도 하고 대화도 진행할 줄 알았던 김·노와 달리 그야말로 소통도 대화도 없는 무식한 탄압일 뿐이다. 역대 정권 중에서는 전교조와 갈등하지 않았던 정권은 없었지만, 박근혜는 전교조를 아예 법외노조로 만들어 대한민국을 산업화된 형식적 민주국가 중의 유일한 교원노조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등 대표적 공공부문 노조에 대한 탄압의 압권은 바로 이번의 철도 파업에 대한 파쇼적이라고 할 정도의 초강경의 대응이었다. 박근혜는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파업을 벌이는 노조의 지도부를 무조건 무더기로 구속하지 않는다. 참고로, 박근혜가 영국의 극우 국무총리 대처를 롤모델로 삼는다고 하지만, 대처마저도 1984~1985년의 광업노동자 파업 투쟁을 탄압하면서 그 지도부를 구속한 적은 없었다.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3명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20세기 후반기의 유럽역사상 가장 치열한 투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박근혜는 과연 ‘자유민주주의’ 의미를 알기나 하는가? 노조에 대한 살인적 배상금 청구, 가압류, 노조원 직위해제와 해고 등이 예사인 대한민국에서마저도 박근혜식 ‘대노(對勞) 전투’는 이미 비상식으로 보일 정도다. 그 수많은 ‘안녕들’ 대자보에서 철도 파업이 자주 언급되는 것은 과연 우연인가?

보수화돼가던 학생층까지 이제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에서 나타나듯이 저항모드로 급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최악의 대통령이 된 박근혜를 여태까지 밀어준 재벌가 등 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들은 이제라도 그 오류를 반성하여 선후책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박근혜는 커다란 오판을 한다. 그가 실제로 지향하는 것은 일종의 ‘반쪽 파시즘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북한과 연계했다”고 해서 가장 규모가 큰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을 마구 잡아 가두어도 되는 사회이면서도 아직도 물고문과 전기 고문, 그리고 학도호국단과 신문에 대한 보도지침이 없는, 그런 ‘중간적 파시즘’ 사회 말이다. 그러나 파시즘 건설에서 ‘중도’는 없다. 박근혜가 그 부왕(父王)의 말기와 같은 전체적인 파탄을 아예 각오하고 전체적인 유신의 부활로 가지 못하는 이상 초강경 ‘대민 투쟁’은 그저 민중의 커다란 반격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거야말로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보수화돼가던 학생층까지 이제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에서 나타나듯이 저항모드로 급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최악의 대통령이 된 박근혜를 여태까지 밀어준 재벌가 등 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들은 이제라도 그 오류를 반성하여 선후책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민주노총 난입까지 막나가는 정부...


정보기관 포함 정부기관이 동원된 선거부정 수사를 수수 방관하거나 방해하고, 종북몰이로 어린 백성들 선동질 하고, 대국민 사기성 대선공약에, 이제는 민주노총 난입에 이르기까지 막나가는 이런 정부를....어찌해야 할 지.... 


[한겨레 사설] 민주노총 난입,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경찰이 민주노총 사무실을 부수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과연 이것밖에 없었던 것일까 하는 착잡함이다.
이런 극단적인 방법은 다른 선택지가 완전히 막혀 있을 때나 쓰는 거다. 그런데 철도파업은 제3의 해법이 얼마든지 있다. 정부는 철도를 민영화하지 않겠다는 거고, 노조는 못 믿겠다는 거다. 그 골만 메우면 된다. 변재일 민주당 의원이 제출한 철도사업법 개정안은 그런 해법 중 하나다. 철도에 경쟁체제를 도입하더라도 민영화 금지를 법에 못박아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자는 거다. 교수들로 구성된 4개 학술단체가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어 대화하자고 제안한 것도 경청할 만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중재안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고 초강수만 구사하는 걸 보면, 민영화를 추진하겠다는 게 본심이거나 아니면 이번 기회에 민주노총을 짓밟아 버리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민주노총 강제진입은 1979년 신민당사 난입사건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그해 8월 신민당 당사에 무장경찰이 들어가 농성하던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노동자 172명을 무자비하게 강제연행했는데, 그때 동원된 경찰이 1000명이다. 이번엔 무려 5500명을 넘어선다. 당시 신민당 의원들이 경찰에게 멱살이 잡혀 끌려 나가는 등 봉변을 당했는데, 이번에도 야당 의원들이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농성하던 김경숙씨가 투신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번 진압의 경우도 건물 구조가 복잡하고 좁은 계단과 낡은 난간이 있어 큰 불상사가 날 수 있는데도 그냥 밀고 올라갔다.
민주노총은 제1야당 못지않은 상징적인 곳이다.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며 심장부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감히 강제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경찰이 들고 간 것은 노조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이지 민주노총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아니었다. 민주노총과 노동운동 자체를 적으로 돌리고 말살하겠다는 선전포고로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건물의 주인은 경향신문사다. 신문을 제작하기 위해 기자들이 회의하고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할 시간이었다. 경찰이 유리창을 깨고 최루액을 뿌리며 건물 전체를 아비규환으로 만든 것은 언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무시한 망나니짓이다. 신민당사 난입은 유신정권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이제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정부가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건, 정권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의 비극이다. 부디 박근혜 대통령이 이성을 찾기 바란다.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9.7%, 153만표’가 속았다면

[한겨레 아침 햇발] 김이택 위원 글

9.7%, 153만표'가 속았다면


1년 전 오늘, 서울 역삼동 한 오피스텔 문앞을 지키던 민주당 사람들이 철수했다. 서울경찰청 디지털증거분석팀은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컴퓨터를 넘겨받아 오후부터 분석을 시작했다. 그때 건네진 노트북과 데스크톱이 1년 내내 우리 정치판을 뒤흔들 판도라의 상자가 되리라고는 아마 국정원 사람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 "대통령 사퇴" 주장까지 불러왔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수구보수언론의 응원 속에 "대선 불복"이라며 천주교 신부를 처벌하고 야당 의원은 제명하라고 난리다.

그러나 찬찬히 따져보면 "부정선거로 당선됐으니 사퇴하라"는 신부들과 장하나 의원의 주장은 틀린 데가 없다. 문재인 의원이 최근 펴낸 책에서 거론했듯이 한 여론조사기관 대표는 "두 후보 지지율이 뒤집혔다가 경찰 발표 뒤 박 후보 우세로 복귀했다"고 했다. 리서치뷰 설문조사 결과는 '부정선거'였음을 수치로 말해주고 있다. 유권자 2000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 중 9.7%는 '경찰이 사실대로 밝혔다면 문재인 후보를 찍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를 박 후보 득표수(1577만표)로 환산하면 153만여표다. 지난 11월19~20일 조사니까 그 이후 2200만건의 트위터글 공개 상황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락을 뒤집고도 남을 만한 수치다. 여기에 트위터글 자체가 당시 부동층 유권자들에게 미친 영향도 추가돼야 하니 부정선거가 맞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도움받은 것 없다" "댓글로 당선됐단 말이냐"며 국민을 바보 취급하려 들었으니 사퇴 주장은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 행사다.

따지고 보면 선거부정이 국정원만의 책임도 아니다. 10월8일 정문헌 의원의 첫 '엔엘엘' 발언에서 12월14일 김무성 의원의 대화록 낭독까지, 선거 후반으로 갈수록 판세가 흔들리자 국정원은 물론 여권이 총동원돼 '종북 시나리오'를 써댄 의혹이 짙다.

그러니 장 의원과 박창신 신부가 못할 말을 한 게 절대 아니다. 시효가 지난 탓에 법적으로 '선거 불복'을 할 방법이 없을 뿐이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퇴진론을 불러온 건 바로 박 대통령 자신이다. 선거부정도 그렇거니와 공약 자체도 '사기성'이 농후하다. 후퇴한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만이 아니다. 후보가 되자마자 첫 방문지로 전태일 흉상을 찾았던 그가 전교조·전공노 탄압에 이어 철도노조까지 퇴로 없이 몰아붙이는 걸 보면 '100% 대한민국' '국민 대통합' 약속이 지켜지리라고 믿은 사람이 바보다.

정보기관엔 정치공작 부활시키고, 검찰엔 권력의 시녀 되길 강요하며, 역사 교과서는 유신코드에 맞춰 뜯어고치고 있다. 대선 전 "후보 주변 5.5m 안에 55살 이상은 들이지 마라"(홍사덕)더니 이제는 아예 70대의 '유신 법률가'를 옆에 끼고, 당에는 5공의 사위 출신을 실세로 앉혀놓은 게 한편의 사기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남은 4년, 성장기 18년을 궁궐 속 공주로 살아온 대통령이 스스로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건 무망한 일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다. 불법을 응징하고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하게 하려면, 권은희·윤석열이 지켜낸 진실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제도를 뜯어고치는 데 감시의 눈을 부릅떠야 한다.

'선거 부정' '사기 공약'에도 대통령 지지도가 추락하지 않는 건 기울어진 정치구도뿐 아니라 보수편향의 언론구도 탓도 크다. 국기문란까지 옹호하는 수구보수언론의 곡필에는 응징이 필요하다. 153만표나 뺏기고도 아직 여당인 줄 착각하는 무능 야당, 민주당도 이제 정신차릴 때가 됐다.

김이택 논설위원rikim@hani.co.kr

2013년 12월 1일 일요일

[교황]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도전 -프레시안 이승선기자 번역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몇가지 도전

52. 이 시대 인류는 수많은 분야에서 이루고 있는 성취에서 보듯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다. 건강, 교육 그리고 통신 같은 분야에서 사람들의 복지 개선에 취해지는 조치들에 찬사를 아낄 이유가 없다.

동시에 대다수가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급급한 끔찍한 현실이 도래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많은 질병들이 퍼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은 공포와 절망의 포로가 되어 있다. 이른바 부자나라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삶의 기쁨은 빈번히 사그러들고, 타인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고, 폭력이 늘고 있다. 그리고 불평등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생존 투쟁, 그것도 종종 최소한의 존엄도 유지하지 못하는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질과 양, 속도과 규모 면에서 엄청난 진보가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일어나고, 즉각적으로 자연과 생명 분야의 다양한 곳에 적용되는 신기원의 변화가 진행돼 왔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사회는 새롭고,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권력들을 탄생시켰다.

배제의 경제는 안된다

53.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분명한 규제였던 것처럼, 오늘날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에 대해 "그래서는 안돼"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경제는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나이 들고 집 없는 사람이 노숙을 하다가 죽었다는 것이 뉴스가 되지 않는 반면, 주가지수가 2포인트 떨어졌다는 것이 뉴스가 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이것은 배제의 사회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음식이 버려지는 상황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있나? 이것은 불평등의 사회다. 오늘날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 아래에 모든 것이 지배되고 있다.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며 살고 있는 사회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비참한 존재가 되고 있다. 그들은 일자리도 없고, 미래도 없고, 탈출할 수단도 없다.

인간 자체가 쓰고 버려지는 소비재로 간주되고 있다. 인간이 쓰고 버려지는 존재가 된 문화를 우리가 만들었고,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착취와 억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문제다.

배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떨어져나가는 문제와 관계가 있다. 배제된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의 밑바닥이나 주변에 속한다거나, 권리가 박탈됐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 사회의 일원도 아니라는 것이다. 배제된 사람들은 착취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이며, 잉여가 된 것이다.

54.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낙수효과 이론을 옹호하고 있다. 낙수효과는 자유시장 체제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통합을 가져오는 성공적인 효과가 발휘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사실로 확인된 적이 없다. 이 가설은 경제적 지배권력의 선의와 지배적인 경제체제의 신성화 작업에 대한 막연하고 순진한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

배제된 사람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삶의 양식 또는 이기적인 이상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관심은 세계로 확산됐다. 거의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고통을 함께 느끼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슬퍼하고, 그들을 도와야한다고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마치 이런 문제들이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처럼.

풍요의 문화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다. 시장에 새로 살 만한 신제품이 나오면 우리는 흥분한다. 하지만 기회 부족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그저 낯설은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돈을 숭배하는 새로운 우상은 안돼

55. 이런 상황이 초래된 원인 중 하나는 돈에 대해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있다.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금융위기가 심각한 인간사회의 위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인간이 주인이라는 것을 부정했다는 것이 금융위기의 근원이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들을 창조했다. 고대 황금 송아지에 대한 숭배(출애굽기 32:1-35 참조)가 돈이라는 우상과 인간을 위한 진정한 목적이 결여된 비인격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 잔인한 형태로 변신했다.

세계적으로 금융과 경제에 닥친 위기는 불균형과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결여된 사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욕구를 지닌 인간은 하나의 욕구를 가진 존재로 축소됐다. 바로 소비다.

56. 소수의 소득은 확대되고, 행운의 소수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에서 다수를 멀어지게 하는 간극도 확대되고 있다. 이런 불균형은 시장의 절대적 자율과 금융투기를 옹호하는 이념의 결과로 초래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이념들은 국가가 공공선을 위해 어떤 형태의 통제를 행사할 권리를 거부한다. 이렇게 해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종종 가상적이라고 할 새로운 독재가 등장했다. 일방적이고 쉼없이 자신의 법과 규칙을 강요하는 독재다.

부채와 부채에 대한 이자가 늘어나는 나라들은 그들 경제의 잠재력을 깨닫고, 국민이 진정한 구매력을 누리도록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에 전세계를 무대로 벌어지는 부패와 자기 잇속만 차리는 탈세가 가세하고 있다.

권력과 소유에 대한 갈망은 한계를 모른다. 이런 체제는 이익 증대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익 증대에 방해가 된다면, 환경처럼 망가지기 쉬운 모든 것들이 유일한 규칙이 된 신성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무력화된다.

봉사보다 군림하는 금융체제는 안돼

57. 이런 태도 뒤에는 윤리와 신에 대한 거부가 도사리고 있다. 윤리는 조롱받고 경멸을 받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윤리는 돈과 권력을 절대적으로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고 깨우치기 때문에, 비생산적이고 너무 인간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인간에 대한 조작과 존엄을 무시하는 행위를 비난하기 때문에 윤리는 위협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사실 윤리는 시장의 영역 밖에서 진지한 응답을 촉구하는 신으로 연결된다. 시장이 절대화될 때 신은 통제가 안되고, 관리가 안되고, 심지어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신은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고 모든 형태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길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 -이념과 관계없는 윤리- 는 균형 있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질서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금융 전문가와 정치지도자들이 고대 현자 중 한 분의 말씀을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훔친 것이며 그들의 삶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58. 윤리를 고려한 금융개혁은 정치지도자들이 접근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나는 정치지도자들에게 촉구한다. 결연한 의지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갖고 이 도전에 나서달라고. 물론 사안 별로 특수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해야 할 것이다.

돈은 봉사의 수단이지 지배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교황은 모든 사람들 사랑한다. 그가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똑같이 사랑한다. 하지만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반드시 돕고, 존중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울 의무가 있다.

나는 그들에게 관대한 연대와 인간을 위한 윤리에 바탕을 둔 경제와 금융으로 복귀할 것을 권고한다.
 

2013년 11월 26일 화요일

[박노자칼럼] 통합진보당 탄압과 민주주의의 증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를 명기해 두어야 한다. 나는 의회 활동에 중점을 두는 정당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며,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한국 진보정당들의 의회주의적 경향에 대해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집권 극우파는 '민중'과 같은 단어를 문제 삼아 통합진보당을 '사회주의'로 몰고 있지만, 내가 본 통합진보당은 '한국 특색의 온건 사민주의 정당'에 가깝다. 요즘 논란이 된 통합진보당의 강령이라도 한 번 정독해보라. 통합진보당은 자본주의 그 자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려고 한다고 거기에 명기돼 있다. 그렇다면 폐해가 없는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또 거기에서 통합진보당이 노동자·농민과 함께 중소상공인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나오는데, 중소상공인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아무 언급도 없다. 비정규직들에게 한달에 100여만원을 주는 여느 재벌 하청공장의 주인도 중소상공인이라면 그와, 그가 착취하는 노동자들의 이해를 정말 동시에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의 기준으로는 통합진보당이 좌파라면 한참 온건해 빠진, 현존의 사회와 거의 제대로 대립의 각을 세우지 못하는 좌파다.

그렇다면 이석기 의원의 체포부터 시작해서 이번의 전례 없는 정당해산심판 청구까지, 왜 하필이면 이 온순하기 짝이 없는, 거의 우파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형 사민주의자들이 극우정권 공안몰이의 첫 희생물이 됐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돈밖에 아무것도 없는 요즘 세상에 우습게 들리지만, 박근혜 정권과 통합진보당 사이에 엄연히 이념갈등은 존재한다. 박근혜는 극단적인 대북대립을 피하는 등 전 정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처신하려 하는 듯하지만, 다소 타협적인 대북접근이라 해도 이는 박근혜 정권 차원에서는 철저하게 적대적 타자에 대한 접근일 뿐이다. 곧, 현실 국제정치를 어떻게 한다 해도, 박정희의 파시즘을 계승한 현 지배자들에게 북한은 이념 차원에서는 근원적으로는 언젠가 '우리'에게 흡수당해야 할 적일 뿐이다. 이 적과 대결해서 결국 적을 이겨야 하는 것은 '우리 국민'이라는, 배타적 충성을 요구하는 집단인데, 이 집단의 경계선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관리는 파쇼적이라고 할 만큼 철저하다. 적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대다수와 다른 생각'을 한다면 벌써 '적과의 내통자', 곧 배제·탄압 대상인 비국민이다. 통합진보당 이외의 진보정당들은 대체로 '우리 국민' 집단 안에서의 계급갈등만을 문제 삼는 것이고, 일단 '국민'이라는 집단의 경계선을 대놓고 전복하려 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민족주의적인 사민주의 정당인 통합진보당은 '같은 민족'인 북한을 적이 아닌 통일의 한 주체로 보고 북-미 갈등 구조에서 북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친화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만큼 '국민'의 경계선을 가장 크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만큼 배타적 이념으로 무장된 지배집단의 정치보복을 당한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민족주의적인 사민주의 정당인 통합진보당은 '같은 민족'인 북한을 적이 아닌 통일의 한 주체로 보고 북-미 갈등 구조에서 북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친화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만큼 '국민'의 경계선을 가장 크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만큼 배타적 이념으로 무장된 지배집단의 정치보복을 당한다.

둘째 이유는 현실 정치에 있는 듯하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겠지만, 지난 19대 총선 때 통합진보당이 발표한 당원 수는 7만5000명 정도였다. 다수의 유령당원 등이 있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나머지 모든 진보정당보다 두 배 이상의 숫자다.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보인 득표율은 10.3%였는데, 이 정도라면 비교적 덜 알려진 나머지 진보정당들과 달리 마이너이긴 하지만 '주요 정치세력'의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다. 참고로, 동아시아의 가장 유서 깊은 진보정당인 일본 공산당의 경우에도 올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의 득표율은 10% 정도였다. 최근의 주류 언론 비방 캠페인 등으로 잠재 득표율이 떨어졌다 해도 5~10%의 유권자를 동원할 수 있는 정당이라면 예컨대 야권연대 건설 등에서는 꽤나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으며 정권에 대한 상당한 압박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박근혜 정권의 입장에서는 통합진보당만 제대로 제거한다면 나머지 진보정당들은 그저 게토화되어서 이렇다 할 정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보일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몰락할 경우에는 진보정치 섹터 그 자체는 일부 이념형 사회주의자나 노동운동가만의, 대중성이 결여된 게토가 될 것이며, 정권에 대한 상당한 잠재적 위협이 제거되는 셈이다. 이승만 시절의 진보당 간첩조작·박살내기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진보당의 강제된 몰락과 조봉암의 법살은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을 거의 40년 동안 정지시켜 놓았다. 그 뒤에도 몇 군데의 군소 혁신정당들은 명맥을 유지했으며 그중 하나인 사회당 출신의 이재문과 김병권은 1970년대 후반에 남민전을 조직해 유신정권에 대한 가장 치열한 지하투쟁을 전개했지만, 대중적인 혁신정치는 2000년에 이르러서야 민주노동당의 결성과 함께 복구된 것이다. 40여년 만에 말이다. 지금 박근혜 정권이 바라는 대로 통합진보당이 탄압을 버티지 못해 죽어버리면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파멸적일 듯하다. 그렇다면 왜 나머지 진보진영은, 아무리 통진당과 이런저런 실천과 이념 차원의 모순이나 갈등 등이 있다 하더라도, 탄압받는 동지들에게 연대의 손을 제대로 내주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하나는 '통합진보당만이 희생되면 우리야 무사하겠지'라든가 '인기 없는 북한 편들기에 민심을 잃을 수밖에 없는 통합진보당을 옹호해봐야 득 될 게 없고, 차라리 통합진보당이 없어지면 그 틈새를 우리가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와 같은 약삭빠른 계산이다. 그러나 이 계산에는 진보정치의 영혼이라고 할 도덕성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정확한 예측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역사 속의 전례로 봐서는 통합진보당의 몰락은 진보정치 자체의 대중성을 크게 떨어뜨릴 것이고 사회의 전체적 우경화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런 타산보다 더 자세히 다루어봐야 할 것은 둘째 이유, 곧 이념적 이유다.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를 '주사파'로 파악하는 일부 좌파들은 '북한 민중을 억압하는 북한 지배자들의 어용 사상에 동조하는 정당'에 대한 동류의식 자체를 아예 갖고 있지도 않다. '주사파'의 민족주의는, 모든 민족주의들이 다 그렇듯이, 그 본질상 위험하다는 경계의식도 여기에 같이 깃들어 있다.

나는 통합진보당의 당원도 지지자도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만큼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통합진보당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그 탄압 속에서 진보의 가능성들이 죽고 민주주의가 증발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야 그 위험성을 백번 이야기해도 부족할 정도지만, 모든 이데올로기가 다 그렇듯이 민족주의의 함의도 상황적이다. 같은 민족주의라 하더라도 이라크 침략에서의 참전을 '애국'으로 보는 미국 백인 지배자의 헤게모니적 민족주의와, 미 침략군에 목숨을 걸고 맞섰던 이라크 애국자들의 민족주의를 과연 같은 선상에서 논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들(이라크보다 강한 북한의 군사력부터 후견국가로서의 중국의 존재까지) 때문에 같은 '악의 축' 국가들 중에서 이라크는 미국의 침략을 이미 당했고 북한은 아직도 당하지 않았지만, 미 제국주의를 국제주의적 입장에서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그 침략을 언제 당할지 모를 북한의 민족주의 속에서 반제적이고 저항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요소들을 발견하고 긍정해야 결국 우리가 북한과 동등한 대화를 나누고,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평등하고 민중 본위의 통일로 갈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삼성 경영권의 3대 세습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만큼 북한의 3대 세습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삼성 사내의 이병철가 숭배 분위기를 역겹게 여기듯이 주체사상의 수령론에 반대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주체사상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북한 지배자들과 달리 권력자들이 아닌 무력하고 가난한 아웃사이더들이며 그들의 '주사' 지향은 결국 남한 지배계급과 그 사대주의적 풍토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과 북한 지배자들을 동일시하는 것도, 소수의 주체사상 애호가와 통합진보당 전체를 동일시하는 것도 아주 위험한 일이다. 통합진보당을 찍은 유권자들이 다 '주사파'인가?

나는 통합진보당의 강령과 달리 '자본주의 폐해'도 아닌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을 바란다. 그러나 서로간에 차이가 있어도, 오히려 그만큼 탄압으로부터 통합진보당을 지켜야 한다. 그 탄압 속에서는 진보의 가능성들이 죽고 민주주의가 증발하기 때문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2013년 11월 25일 월요일

[김종구칼럼] 조국이 어디냐고 묻는 당신에게

불불통 비보통(不不通 非普通). 불통이 아니고 보통이 아니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김지하 시인이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를 한자 여섯 글자로 표현한 말이다. 박 후보가 원주로 김 시인을 찾아와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고 지학순 주교의 묘소를 참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흐뭇해진 김 시인은 박 후보가 불통하는 사람이 아니며 정치 단수가 높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김 시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박 대통령의 취임 이후 행태를 보면 실로 ‘비보통’이라는 말이 합당하다.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담대함, 교묘한 여론몰이 등의 정치행보는 보통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렇지만 소통은 제로다. ‘불통 비보통’, 소통하지 않으면서 보통이 아닌 국정운영 행보를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박 대통령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일지도 모른다.

사실 박 대통령이 눈 덮인 베론성지의 지학순 주교 묘소를 찾은 것은 유신에 대한 반성도, 피해자에 대한 속죄도, 통합을 위한 과거 껴안기도 아니었다. 단지 표를 얻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했음은 그 뒤의 행적이 웅변한다. 반유신운동의 정신적 지주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탄생의 모태였던 지 주교를 기리는 경건한 마음이 있다면 지금 정의구현사제단을 대하는 태도가 이럴 수는 없다.

박창신 원로신부의 연평도 포격 발언 등에 대해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그 사람들의 조국이 어디인지 의심스럽다”고 비난했고,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는 “사제복 뒤에 숨어 대한민국 정부를 끌어내리려는 반국가적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박 신부 발언의 진의를 따질 겨를은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수석이나 윤 부대표가 박 신부를 향해 ‘조국’이니 ‘반국가적 행위’니 하는 말을 할 자격은 없다는 점이다.

박 신부는 신군부가 저지른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하다 무자비한 테러를 당했고 그 결과 평생 한쪽 다리를 저는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다. 그때 두 사람은 무엇을 했는가. 한 사람은 광주의 선연한 핏자국 위에 전두환씨가 건설한 민정당을 위해 투신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한때 그의 사위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39년간의 사제 생활 동안 박 신부가 그려온 조국의 모습은 선명하다. 민주화된 나라, 소외된 이웃이 없는 나라,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다. 지금 박 신부를 향해 종북몰이를 하는 이들이 추구해온 조국은 과연 어떤 나라였던가.

여권은 박 신부 발언 중 몇 대목을 꼬투리 잡아 사제단에 대한 붉은색 덧칠하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이 그것이 아님은 권력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지학순 주교는 40년 전 양심선언문에서 이렇게 포효했다. “(유신헌법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행위 역시 민주헌정의 파괴요, 국민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일종의 사기극이며, 그래서 지난 대선은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박 신부는 느낀 듯하다. 야당도 시민사회단체도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한 ‘대통령 사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으리라.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데 지금은 비극의 시대다. 박정희 시대에 귀가 닳도록 들었던 “체제전복세력”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일부 종교인들”은 이제 ‘종북구현사제단’ 따위의 다른 버전으로 대체됐다.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사목자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대주교의 말씀은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을 접하고도 모호한 태도를 취했던 당시 주교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사회정의를 위한 종교계 활동을 대하는 박정희-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참으로 닮은꼴이다. “국민분열 발언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분노에 찬 발언은 민주화운동에 노발대발하며 “모두 잡아넣으라”고 다그친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 다가온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또다시 신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될지 모르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대통령의 불통·비보통이 빚어내는 비극의 끝은 어디인가.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2013년 11월 23일 토요일

[법륜스님] 네 마음이 어떤데?

한겨레 -> 휴심정에 올라온 법륜스님 글: 원본 링크  http://well.hani.co.kr/434315?_fr=mb2

달마대사가 중국에 왔을 때 양무제가 인도에서 도인이 왔다 하니까 당연히 궁중으로 초빙해 식사대접을 하고 나서 물었어요. “지금 이 나라 불교 상황은 어떻고, 제가 절을 몇 백 개 짓고, 탑도 세우고, 경전도 번역하고, 스님들도 교육시켰습니다. 이 정도면 공덕이 얼마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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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와 양무제

달마대사가 딱 한 마디로 “무!” 이랬어요. 양무제는 화가 확 올라오지만 그래도 도인이라니 “너 누구냐?” 하고 물었어요. 속마음은 ‘도대체 네가 누구인데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느냐?’ 이 말이죠. 달마대사가 “나도 모르오” 했어요. 임금이 참다못해 감정이 폭발해서 칼을 빼려고 했어요. 절을 몇 백 개나 지은 불자가 제 맘에 안 든다고 칼을 빼 고승을 죽여 버리려고 하는 그게 그 사람의 수준이지요. 그건 불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제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한다고 큰스님을 죽이려 합니까? 절만 지으면 불자입니까? 탑만 세우면, 경전만 유포하면 불자입니까? 마음을 닦아야 불자이지요.

그래서 달마대사는 양나라를 떠나 소림사에 가서 침묵했단 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달마권법 가르쳐 달라, 산스크리트어 가르쳐 달라, 경전 번역해 달라, 전부 다 무엇인가를 얻으러 왔는데 이 깨달음의 법은 줄래야 줄 게 없으니까 침묵할 수밖에. 사람들은 얻으러 와서 못 얻으니까 결국 하루 만에 가는 사람도 있고, 한 달 만에 가는 사람도 있고…….

9년을 침묵하니까 수많은 사람이 왔다가 다 떨어졌어요. 그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안 가고 대사가 일하면 자기도 같이 일하고, 참선하면 같이 참선하고, 밥 먹으면 같이 밥 먹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늘 같이 있는 거예요. 온갖 떨거지가 다 떨어져나갔는데 오직 한 사람이 안 가고 있으니까 9년이 지난 어느 날 대사께서 물어봤어요. ‘너는 왜 왔니?’ ‘안심입명의 도를 얻으러 왔습니다.’ ‘네 마음이 어떤데?’ ‘예, 제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그래? 불안한 마음 이리 내놔라. 내 편안하게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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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먼저 돌아봐야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EBS

불안한 마음 내어 놓으려면 어디를 봐야 해요? 자기를 봐야 되겠죠? 한참 후에 ‘내놓을래야 내 놓을 게 없습니다’ 했어요. 그래서 대사께서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스승은 밖으로 향한 제자의 눈을 안으로 돌려준 거예요. 눈이 안으로 향했을 때 이미 편안해진 거예요.

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국제학업성취도(PISA) 토대로 국가별 인재수 집계 결과


23일(현지시간) 미국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인사이더(BI)에 따르면 듀크대 영재발굴프로그램(TIP) 연구소의 과학자 겸 심리학자 조나선 와이 박사가 국제학업성취도(PISA)의 2009년 점수를 토대로 국가별 인재수를 집계한 결과
국가별로 PISA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들의 비율을 토대로 해당국 전체 인구에서 고급인재의 수를 추정했다. 중국은 PISA에 상하이 지역 학생들만 참여했기 때문에 이번 조사에선 제외됐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2009년 PISA 조사에 69만8272명의 만 15세 모집단 가운데 5123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PISA는 3년 주기로 진행되는 검사로 2009년에는 총 65개국이 참여했다.

[프레시안] 고용노동부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함 통보

방하남 고용노동부장관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24일 '노조 아님'을 통보하면서 "노동3권이 부정될(제한받을) 수 있다"고 말해 논란이 예상된다. 전교조는 즉시 서울행정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저녁에 촛불집회를 여는 등 이번 사태를 '노조 탄압'으로 규정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노동부 장관 "노동3권, 단체교섭권 이런 것들이 부정될 것"

방하남 노동부 장관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이날 오후 2시 과천정부청사 노동부 브리핑룸에서 공동 입장 발표를 했다. 이후 노동부는 전교조가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는 규약을 시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조합법 시행령과 교원노조법 등에 따라 전교조에 '법외노조 통보 공문'을 팩스로 통보했다. 이 공문은 전달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전교조의 '노조 아님' 통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방하남 장관이 헌법상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이 부정될 수 있다고 말해 논란을 예고했다. 방 장관은 "정부 입장은 실정법상 노조 아님을 통보하기 때문에 일반노조법과 교원노조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3권, 단체교섭권 이런 것들이 부정되게 된다"고 밝혔다.

방 장관은 이와 관련해 "교원노조특별법 제정 취지가 헌법에 근거하고 있다. (헌법상) 노동3권 보장 뿐 아니라 그 보장을 받는 단체는 사회적 책임과 책무가 강하다는 것으로 해석할수 있다"고 말했다. 전교조가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헌법상 노동3권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 방하남 고용부장관은 (현지시각 2013년 6월12일 12시) 제102차 ILO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방 장관은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를 하지 말라는 ILO의 권고를 무시하고 24일 전교조에 '노조 아님' 통보를 했다. ⓒ고용노동부

방 장관은 "현행법이 있기 때문에 먼저 현행법을 준수하려는 노력을 하고 이후에 (노조나 정치권이) 국내법 개정 노력도 할 수 있다"며 "전교조가 그런 (헌법상) 자기 권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법적 절차(소송)라든지 헌법 소원 등을 통해 밝혀내면 될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까지 했다. 법을 집행하는 장관이 법 집행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하는 자리에서 '억울하면 헌법 소원을 하거나 소송을 걸라'고 한 것이다.

방 장관은 "(법 개정이나 헌법 소원시) 고려돼야 할 것은 우리 일반노조법이 50년대에 만들어진 이후 반세기 지나서야 1999년 교원노조법이 이뤄질 정도로 우리 사회 국민 정서는 교사는 일반 근로자와 달리 사회적 책무가 강하다는 것"이라며 "따라서 법을 개정하더라도 국민적 정서에 부합하게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노조와 정치권에 '훈수'까지 뒀다.

이같은 발언은 방 장관 본인이 이번 통보의 위헌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해석될수 있다. 학자 출신인 본인의 '소신'과 맞지 않는 일을 진행하면서 말이 꼬이고 있다는 것이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이어 "교육부도 유감스럽고 안타깝다"면서도 "교육부는 어떤 경우에도 학생들의 학습권이 존중되고 학교 교육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런 기조 아래 앞으로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전교조는 향후 단체협약체결을 요구할 수 없게 됐다. '노동 3권' 중 하나를 상실하게 되는 셈이다. 또 사무실 임대료 등 50억 원 정도의 교육부 지원금도 끊기게 됐다. 조합비 원천징수 등의 행정적 편의도 제공받을 수 없다. 노조전임자 70여 명도 교육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 고용노동부가 24일 전교조에 보낸 '팩스' ⓒ전교조 홈페이지

단 9명 때문에 6만 조합원을 노조로 인정 않는다?

앞서 전교조는 "해직자를 조합원으로 계속 인정할 경우 노조 지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노동부의 통보를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거부했다. 전교조는 지난 16~18일에 실시한 찬반 투표를 진행한 결과 '고용노동부의 시정 명령을 거부한다'는 의견이 68.59%에 달했다고 밝혔다. '수용한다'는 의견은 28.09%였다.

정부가 노조 자격 배제를 요구한 해직 조합원은 단 9명이다. 9명 때문에 6만 명이 소속된 노조에 '법외 노조' 통보를 강행한 것이다. 이들 중에는 학내 비리 비판, 우열반 운영 비판 활동 등을 하다 해직된 교사들도 포함돼 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수차례 권고했고, 국가인권위원장까지 나서서 "조합원 자격 때문에 노동조합 자격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단결권과 결사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위헌 소지가 있음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부는 전교조에 대한 '법외 노조' 통보를 밀어붙였다.

또한 금속노조 등 산별노조는 해고자도 조합원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에 따른 형평성 논란도 불거지면서, 노동부의 '전교조 찍어내기' 논란은 거세질 전망이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초기업적 노조에 대해서는 해고자 등 실업자도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는 현실에 비추어도 부당하며 국제적 관행에도 맞지 않는다. 인권위원장의 촉구까지 있었음에도 사회적 합의로부터 등을 돌린 채 정권의 구미에 맞지 않는 조직이라면 법을 흉기 삼아서라도 제거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김정훈 전교조 위원장은 이날 긴급 서신을 통해 "최종 책임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다. 전교조에 대한 '노조 아님' 통보는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통령 아님 통보'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될 것"이라며 "우리는 모든 법적인 대응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겨례사설] 전교조를 법 밖으로 쫓아낸 '야만 정부'

정부가 24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노조 아님’을 통보했다. 부당 해고된 조합원 9명을 핑계 삼아 14년간 합법적 지위를 유지해 온, 6만 조합원의 전교조를 하루아침에 법의 울타리 밖으로 쫓아내고 만 것이다.

거듭하는 얘기지만, 해직교사를 조합원으로 인정하지 않은 노동조합법 시행령은 시대착오적이며,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본질적인 내용 침해 금지와 과잉금지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일반 사기업은 물론, 공공기관 및 공기업의 모든 산별 노조에서는 예외 없이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유독 전교조만 해직자의 조합 가입을 문제 삼는 것은 분명 평등원칙에 위배된다.

정부의 이번 조처로 국제적인 망신살이 뻗쳤다. 이미 국제노동기구(ILO)의 긴급개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와 국제교원연맹(EI)의 항의 서한 등 국제적 비난이 쏟아졌다. 더 나아가 이들 국제기구는 ‘전교조 노조 설립 등록 취소 및 한국의 제반 노동기본권 탄압 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국제 공동조사단’ 파견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우리나라가 인권 탄압을 일삼는 아프리카의 어느 후진국쯤으로 전락하고 만 느낌이다. 오죽했으면, 무늬만 인권위원회라고 비판받아 오던 국가인권위원회조차 성명을 내어 정부의 법외 노조 통보를 뜯어말렸겠는가.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가 무리수를 두는 건, 박근혜 대통령의 독선과 편견을 떼어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은 2005년 12월 당시 한나라당 대표 시절에 전교조를 ‘한 마리 해충’에 비유해 전교조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바 있다. 또 교원노조 탄압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이어받은 것이어서 ‘부전여전’이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원노조는 1960년 4·19 직후 설립됐으나, 5·16 쿠데타 세력은 교원노조를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강제 해산하고, 교사 1500명을 용공으로 몰아 교단에서 쫓아내는 만행을 저지른 바 있다.

하지만 전교조를 법외노조화한다고 전교조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전교조는 조합원의 80.96%가 참가한 총투표에서 68.59%가 해직교사를 조합원으로 껴안고 가는 길을 선택했다. 대다수 조합원들이 불이익을 받더라도 정부의 부당한 간섭을 거부하고 노동조합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기 바란다. 법외 노조 통보를 취소하고, 국정 기조 전반을 다시 가다듬어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박근혜 정부는 범국민적인 거센 저항에 직면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2013년 9월 7일 토요일

Distributive justice and the argument for an unconditional basic income

Title: Distributive justice and the argument for an unconditional basic income.
Author: Zelleke, Almaz
Citation: Journal of Socio-Economics Feb2005, Vol. 34 Issue 1, p3-15
Year: 2005
Abstract: The defense of selective work requirements depends in part on a belief in the fairness of the capitalist economic system, in which property can be acquired, concentrated, and handed down in ways that lead to vast economic inequality. This belief supports the enforcement of work requirements on recipients of redistribution. But a problem inherent in theories of distributive justice, the inability to apply the same criteria of fairness to subsequent generations, undermines the legitimacy of this belief. I argue that an unconditional basic income is preferable to work-conditioned income support on distributive and political grounds. [ABSTRACT FROM AUTHOR]

Behavioral welfare economics and redistribution

a  Woodrow Wilson School, Princeton University, Princeton, NJ 08544, Belgium
b  Department of Economics, University of Leuven, Naamsestraat 69, 3000 Leuven, Belgium 

Abstract


Behavioral economics has shaken the view that individuals have welldefined, consistent, and stable preferences. This raises a challenge for welfare economics, which takes asa key postulate that individual preferences should be respected. We argue, in agreement with Bernheim (2009) and Bernheim and Rangel (2009), that behavioral economics is compatible with consistency of partial preferences, and explore how the Bernheim-Rangel approach can be extended to deal with distributive issues. We revisit some key results of the theory in a framework with partial preferences, and show how one can derive partial orderingsof individual and social situations. (JEL D03, D63, D71, H23).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papers to read

  • “The Impact of Regulation on Supply and Quality of Care in the Childcare Market,” (with V. Joseph Hotz), American Economic Review, 2011, 101(5), 1775-1805.

2013년 6월 3일 월요일

6/4인생경 강의 내용 일부

지배적 전략: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와 무관하게 항상 자신의 효용(보수)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의미

        C        N
C (10, 10) (0,20)

 N (20, 0)  (1,1)          

(1,1)이 유일한 내쉬균형
죄수 딜레마에서 비협조N은 지배적 전략이다.

지배적 전략들로 구성된 내쉬균형을 지배적전략 균형이라한다.

정부를 구성하여  N을 처벌punish하도록 강제기구를 설정하면 (처벌의 강도 p)  위의 게임의 구조는 아래와 같이 바뀌고 p가 충분히 크게되면(p>10), (10,10)이 내쉬균형이 될 것이다. 단, (1,1)도 내쉬균형.
       C        N
C(10,10) (0,20-p)
N(20-p,0) (1,1)

이런 정부의 설립에 대한 사회계약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정부설립에 찬성 혹은 반대
둘 다 찬성해야 정부 설립되어 위와 같은 p가 있는 상황이 얻어지고 그렇지 않으몆ㄴ 원래의 죄수딜레마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찬성            반대
찬성    (10,10)         (1,1)
반대     (1,1)            (1,1)
이러한 계약의 내쉬균형은 두 가지, (10,10) 혹은 (1,1)
현실적인 균형은 (10,10)
두 사람이 (10,10)의 균형으로 조정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기 때문에 (1,1)의 균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합리적인 주체들간의 사회계약의 결과 정부를 통한 사유재산권의 강제기구가 합의를 통하여 얻어진다.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한겨레: 크리틱] 스피노자를 위한 각주 / 서해성

[크리틱] 스피노자를 위한 각주 / 서해성


서해성 소설가
나는 암스테르담에 각주 하나를 달고자 왔다. 도시를 꿰고 흐르는 운하는 미궁으로 엉켜 길을 흩뜨려놓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암스테르담과 레인스뷔르흐와 덴하흐(헤이그)에서 렌즈 깎는 집을 찾지 못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세 도시에는 그의 이름이 붙은 안경점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시계를 흐리게 하는 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
포르투갈 출신 유대인 마라노였고 배교 혐의로 파문당한 자였고 마흔 살 넘은 늙은 총각으로 죽었을 때 스피노자에게는 상속자도 물려줄 재산도 없었다. 사후 정리한 목록에는 책과 옷 몇 벌, 발로 돌리는 렌즈 물레와 렌즈 몇 개가 고작이었다. 그 연마공에게 렌즈를 구해 간 이는 갈릴레오가 ‘토성의 귀’로 남겨둔 것을 위성으로 확정한 천체학자 하위헌스였다. 그때는 별들이 싱그러워서 막 새 이름을 얻어갈 때였다. 저지대연합 네덜란드 또한 자본주의의 꽃 검은 튤립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돈 세상을 창조할 무렵 암스테르담은 두번 빛을 발했다. 한번은 스페인 왕조와 싸워 처음 공화정을 탄생시켰고 다른 한번은 스피노자를 파문하여 그를 버림받은 자유인으로 만들어낸 일이다.
그를 내쫓은 암스테르담 포르투갈 유대인회당 시나고그 마룻바닥에는 모래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물을 끼고 사는지라 습기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날 청년 스피노자의 발자국은 모래 위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에 더 분개한 회당 사람들은 그에게 첫 각주를 남겼다.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저주받을지어다.’ 파문에 따라 4엘렌(2m)보다 가까이 다가가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던 스피노자는 인간해방을 4엘렌 안쪽으로 근접시키고자 했다. 자유도시 암스테르담의 억압은 그의 렌즈 연마 능력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주었던 셈이다.
그가 밟던 낡은 물레가 놓여 있는, 스피노자 기념관이 된 레인스뷔르흐 집 바깥벽에는 선험적 각주가 박혀 있었다. 그 인근에서 먼저 살다 간 디르크 라파엘스의 시였다. ‘아, 만약 모든 사람이 현명했고/ 그저 뜻대로 되었다면/ 세상이 천국이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냥 지옥이다.’ 그는 신의 독선과 세속권력에 명징한 반역으로 맞서는 거룩한 이단자로, 물의 도시에서 자유의 불을 지펴 올렸다. 그 집 2층 구석 방문자 명단에는 1920년 11월2일 베를린 사는 아인슈타인이 찾아왔노라는 서명이 여적 선명했다. 대략 그해 그 물리학자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 투로 스피노자를 향한 수줍은 시를 썼으되, ‘얼마나 그 고귀한 사람을 사랑하는지/ 말로 하는 것보다 더.’ 훗날에도 그는 서슴없이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렌즈는 낮에만 깎을 수 있었다. 밤에는 글을 썼다. 그의 렌즈는 신의 별들을 지상으로 끌어왔고 글은 자유와 이성의 렌즈였다. 방안에 퍼지는 미세한 유리가루가 햇볕에 무지개로 퍼질 때마다 그의 폐는 닫혀갔다. 가톨릭 칼뱅 루터 시나고그, 데카르트파 모두가 집요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럴수록 그의 몸은 투명해지고 렌즈를 닮아갔다. 그는 자신이 갈아낸 렌즈로 미래를 먼저 보았다. 스피노자라는 근대의 렌즈는 제 가슴에 유리가 가득했던 것이다.
달랑 명패 하나뿐인 덴하흐 그의 집 바로 건너 작고 초라한 집창촌 더블스트라트 골목에서는 부슬비 속에 중씰한 사내 몇이 얼쩡거리고 있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신교회 마당에 서 있는 무덤 빗돌에는 단 두 단어가 오목새김되어 있었다. 히브리어로 ‘너의 사람’ 위에 그가 편지를 부칠 때면 장미 문장과 함께 사용했던 ‘조심’이라는 낱말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양도할 수 없는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모든 시대와 사람을 대신하여 스피노자의 빗돌이 스스로 각주를 달면서 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서해성 소설가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경향신문: 최장집칼럼] 마키아벨리기능주의

새 정부 출범을 보면서, 나는 야권 입장에서 지난 선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여러 여론 조사에서 나타났듯이, 절반을 훨씬 넘는 유권자들이 정권교체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대선은 패배로 끝났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가 손짓했지만, 이를 자기 것으로 거머쥘 수 있었던 담대한 능력, 즉 비르투(virtu)는 없었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거 결과는 이념적 진보성, 민주 대 반민주, 진정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누가 더 실제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신뢰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경쟁, 즉 정당의 실력에 대한 평가가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대선이야말로 지극히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의 선거였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은 왜 좋은 정당(들)을 건설하고,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을 배출하는 데 실패했는가 하는 것은 비단 이번 선거 패배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난 시기 집권에 성공했을 때조차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하나의 성공모델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들은 민주진보파들이 정치와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그 특징적인 방법과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권력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권력을 부정하고 그에 저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자기 것으로 수용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에너지로 삼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권력은 권위주의적 힘의 원천이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정의이자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권력을 부패하고 타락한 사적 욕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치의 길을 우회하거나 회피하고자 했다. 권력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목적 의지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권력의 적극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는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별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정당정치 대신 시민정치를 앞세웠고, 정당조직보다 뉴미디어를 통한 네트워크의 형성과 온라인상의 소통 공간이 더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정치는 (만약 그것을 정치라고 생각한다면,)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공유하는 사회 집단들을 대표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정치를 낳을 뿐이다. 나아가서는 짧은 사이클로 변화하는 여론과 정서의 부침에 이끌리는 포퓰리즘 이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정치는 두 방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각성된 의식을 갖춘 시민들의 직접 참여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기존 정치를 대체하거나 새롭게 선도하려는 ‘영구적 운동론’의 방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가들이 좋은 정책대안을 만들어 정책과정에 투입하는 것이 정책결정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산출 중심의 기술합리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이다. 어느 쪽이든 이런 정치관 안에서는 정당과 리더십, 권력 수단을 통한 통치 기술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정치와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강한 한국의 지적 환경에서, 마키아벨리는 특히 민주진보파들에게 필요한 철학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권력의 긍정적 측면을 일깨우고, 어떤 정치인이 바람직한 목적 의지를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가치인가를 앞세우기보다 실제로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치는 ‘가능주의’(possibilism)의 정치 이론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앨버트 허시만이 말하듯이, 그것은 “결과를 만들어낼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중시한다. 마키아벨리의 철학에 있어 이 가능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는, 마키아벨리 정치철학의 중심 아이디어로서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비르투라는 말이다. 비르투와 짝이 되는 포르투나라는 말이 운명 또는 기회라는 말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비르투는 용기, 위용, 추진력, 힘, 결단력, 에너지, 의지력 등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를 지닌다. 운명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지만, 비르투를 가진 리더십은 운명조차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말하자면 권력을 다루는 장인, 또는 정치적 리더로서의 자질이자 덕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르투는 도덕적 규범과 담론을 통해 그려진 이상적 정치 환경에서가 아니라, 현실 정치로부터 도덕과 이상을 분리시킨 연후에 나타나는 진짜 현실에서 발현돼야 할 정치인의 능력이다. 정치는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면도 있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도덕적 감성과 충돌하는 권력의 어두운 악마성이 꿈틀거리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라면, 자신의 목적의지 내지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혐오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정치의 부정적 힘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 서야 하고 또 그것을 넘어 좋은 목적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의 효과를 위해 잔혹무비의 폭력을 승인하고 군주에게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교활함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통치에 필요하다고 해서 잔인함과 폭력, 교활함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수단을 필요로 할 만큼 긴요한 상황에서 실현돼야 할 높은 수준의 이상이나 목적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도덕하거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수반되는 대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수준에서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적 규범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진정으로 공익에 봉사하는 목적 의지가 있다. 정치는 그 둘의 변증법 내지 대차대조표로서 저울질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주인공인 체사레 보르자 이외에 그의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의 한 사람은 시라쿠사의 군주 아가토클레스이다. 두 사람 모두 잔혹무비의 폭력을 효과적이고도 경제적으로 사용했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크다. 보르자는 그의 행위가 비록 권력추구의 욕망에 의해 추동됐다 하더라도 공익의 증진을 가져왔던 반면, 아가토클레스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잔인한 폭군에 불과했다. 전자가 비르투를 가진 통치자라면, 후자는 대량학살의 범죄자 이상이 아니다. 통치자는 그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사용된 방법이 어떠하냐 하는 것보다, 그의 행위의 최종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점에서 철두철미하게 결과주의적인 것이 정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현실주의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인 ‘더러운 손’(dirty hands)의 문제와 연결된다. 정치지도자의 역할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정치가는 통상적 의미에서 명백히 부도덕한 행태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갖는) 정치가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도덕적 계율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한편으로 노예해방이라는 높은 비전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비도덕적 술수와 반대파들과의 뒷거래를 서슴지 않는 정치의 교활함을 가진 정치인 링컨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줘 화제가 됐다. 신화화된 링컨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히는 것임에 분명하겠지만, 마키아벨리를 이해한다면 그 점이야말로 링컨을 더 위대한 정치인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은 한국현대사의 중요 테마의 하나이다. 민중은 반란을 통해 통치 권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통치자가 될 수 없었고, 그들이 제기했던 문제는 기존 통치세력에 의해 수용되어 다뤄졌다. 문제제기 집단과 문제해결 집단의 괴리, 요구와 변화는 계속되지만, 돌아보면 기존 구조는 변함없이 건재한 상황을 뜻하는 수동혁명은 민주화 이후에도 되풀이되어 왔다. 이런 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유능한 정당, 유능한 정치지도자의 출현은 야권의 좋아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이 과제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우선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한국 여성고용 최악: 차별과 무관심


한국 여성고용 최악… "차별과 무관심"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오예진 기자 =
입력시간 : 2013.01.20 06:02:43

한국 여성 고용의 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악의 수준인 것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제도적 무관심이 근절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입사 과정에서 남성에 비해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더라도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경력이 단절되기 일쑤다.

전문가들은 여성인력의 활용성을 높이고 고용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 OECD내 고학력 고용률은 최저ㆍ임시직 비중은 최고

20일 OECD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고등교육기관을 졸업한 국내 고학력 여성고용률은 2011년 60.1%로 OECD 평균인 78.7%와 큰 격차를 보였다. 이는 비교 가능한 OECD 33개국 중 가장 낮은 비율이다.

반면, 국내 고학력 남성고용률은 89.1%로 OECD 회원국 평균 87.6%보다 높았다.

고학력 여성의 고용률이 낮은 것은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상황을 봐도 여실히 드러난다.

국제의원연맹(FIU)에 따르면 제19대 국회기준으로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은 전체 의원의 15.7%(47명)다. 이는 세계 190개국 가운데 105위이고 북한(106위)과 비슷한 수준이다.

또 공공기관 경영정보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국내 공공기관 임원 중 여성 비율은 9.1%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절반 이상의 공공기관에서는 한 명의 여성임원도 존재하지 않았다.

금융투자업계에서 꽤 큰 기업 규모를 가진 국내 10대 증권사도 여성 임원의 비중은 전체의 1.5%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체 고용 중 여성 임시직이 차지하는 비율은 한국이 27.7%로 OECD 회원국 평균(12.5%)을 크게 웃돌았고, 비교 가능한 22개 회원국 중에서도 가장 높았다.

여성 임시직 근로자 수도 계속 늘어 1990년 165만9천명에서 2011년에는 289만5천명으로 74.5%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남성 임시직근로자는 151만2천명에서 209만5천명으로 38.6% 증가에 그쳤다.

여성정책연구원 김태홍 본부장은 "OECD에서 임시직을 분류하는 기준이 국내와 달라 좀 더 작게 집계된 측면이 있는데 실제로 여성 임시직 비율은 전체 여성 고용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 첫 입사때도, 재취업때도 '차별'시달려

한국 여성 고용의 질이 다른 국가와 비교해서 현저히 떨어지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가부장적 문화가 잔존하는데다 제도적 뒷받침도 부족한 데서 원인을 찾았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과거와 비교해 많이 높아졌고 표면적으로는 양성평등 사회에 도달한 듯하지만 현실에서는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금재호 선임연구위원은 "사회문화적으로 '여성 상위 시대'가 됐다고 하지만 취업 전선에서는 일부 대기업과 공공기업을 제외하면 여성에 대한 차별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김정숙 회장은 "채용에서 남성을 우대하는 관행이 아직까지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고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도 많아 채용 과정에서 실력과 관계없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합격이 결정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언급했다.

또 여성은 어렵게 직업을 구하더라도 그 직업을 유지하기보다는 경력의 단절을 겪는 경우가 많다.

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11년 한국의 25∼29세 여성 고용률은 72.6%지만 35∼39세 여성 고용률은 56.1%로 급격히 하락한다.

김 본부장은 "30대는 결혼·출산·육아로 인해 상당수의 여성이 경력 단절을 겪고 특히 고학력 여성은 출산·육아기에 퇴직한 이후 더 이상 노동시장에 재진입하지 않는 특징을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여성은 재취업에 성공해도 그 지위나 업무 환경은 예전보다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김 회장은 "출산 후 여성은 재취업이 매우 힘들어 전문직에 있던 여성도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진단했다.

◇제도적 뒷받침 시급

전문가들은 여성 고용의 질이 앞으로도 급격히 개선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국가의 경제성장률(GDP)이 연간 4∼5%에 이르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2~3%대에 머무는 '저성장' 시대에 돌입해 전반적인 고용률도 크게 나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금재호 선임연구위원은 "경기 침체가 지속됨에 따라 기업에서도 고용에 적극 나서기 힘들 것이고 채용을 하더라도 비정규직이나 남성 위주로 진행돼 당분간 여성 고용률은 질과 양에서 모두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여성 고용의 질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다는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집중됐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태홍 본부장은 "정부 정책이 보육이나 고용 어느 한 쪽에 치우치기 보다 양쪽을 모두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여성 고용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기업의 모성보호 환경 조성을 위해 정부 지원이 강화돼야 하고 어린 자녀가 있는 여성의 고용유지율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김정숙 회장은 "가부장적 문화로 인한 고용에서의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양성평등 교육을 강화하고 '의무적 여성 임원 할당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노르웨이는 공기업과 상장기업에서 이사진의 40%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한 결과, 세계에서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라며 한국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제도개선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경향신문] 세습사회의 오늘/ 김민아

2006년 2월 외국 기자들과 터키 이스탄불을 방문했다. 일정 가운데 70여개 기업을 거느린 거대그룹 회장과의 간담회가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여성 총수의 영어 실력은 원어민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재벌이라 그렇겠거니 여겼다. 아니었다. 다른 자리에서 만난 관료와 교수, 언론인도 영어 실력이 탁월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살 만한’ 집 자녀들은 대부분 외국어로 가르치는 사립고교를 졸업한 뒤 현지의 외국계 대학에 진학하거나 해외 유학을 떠나는 게 관행이라고 했다. 반면에 평균적인 고교 졸업률은 해당 연령대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교육이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아니라 계층을 공고화하는 장벽이 되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 라고 생각했다.

7년이 흘렀다.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로 10시간 걸리는 대한민국도 터키를 닮아가고 있다. 어린 시절을 청와대에서 보낸 영애(令愛)는 아버지의 ‘잘살아보세’ 구호를 외치며 청와대로 돌아갈 예정이다. 차기 정부의 요직으로 가는 길목은 ‘박정희 키드’가 선점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서승환·장순흥·안상훈 위원과 대선 이후 최대 미스터리의 주인공이 된 최대석 전 위원이 ‘유신 2세’다. 정계만 이런 것도 아니다. 개교한 지 30년도 안된 대원외국어고 출신 현직 판검사 수가 개교 100년이 넘은 경기고 출신을 앞질렀다. 부모의 재력과 정보력으로 무장한 아이들이 파워엘리트로 성장하는 사이, 해마다 3만명이 넘는 고교생은 학교를 떠나고 있다. 뭐가 새로운 얘기냐고 시덥잖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에게 직장을 ‘선물’했다가 국사 교과서에나 등장하던 ‘음서’(고려시대의 특권적 채용제도)를 포털 검색어 순위에 올려놓은 일도 있었으니.

신(新) 세습사회가 만개했다. 가진 것 없는 부모들은 자식에게 미안한 시대다. 특히 50대 후반 이상에겐 ‘철없는 운동권’의 대명사이고 20~30대에겐 ‘이기적 변절자’의 상징인 386세대는 미안함을 넘어 죄스러워해야 할지 모른다. 386세대의 상당수가, 그토록 증오하던 독재자 덕분에 계층상승을 이뤘기 때문이다. 한 지인이 그런 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아버지를 잃었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지금처럼 사교육이 기승을 부렸다면 대학 문턱도 밟기 어려운 처지였다. 학살을 저지르고 권좌에 오른 독재자가 과외금지라는 ‘포퓰리즘’적 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교과서 위주로 충실히 예습·복습해’ 대학에 갔다.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고 거기서 미래의 남편을 만났으며 지금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여고 시절의 한 급우는 조금 다른 경우다. 모 재벌가의 셋째딸이었는데, 조개탄 난로 피우는 교실에서 함께 도시락 먹고 자율학습을 했다. 지금 같으면 이 친구가 서울 강북의 평범한(사실은 열악한) 일반고에 다녔을 리 없다. 외국어고나 자율형 사립고, 최소한 강남의 명문고를 택했을 것이다. 조기유학을 떠났을 수도 있겠다.

요즘 10대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이 되고 싶기는 한데요, 저는 안될 것 같아요’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정도는 꿈꿔야 할 푸른 나이에 세상을 향해 금을 그어버리다니. 계층상승과 소셜믹스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는 참혹하다. 2000년 헌법재판소가 과외금지에 위헌을 선고할 때 유일하게 반대(합헌)의견을 낸 이영모 전 재판관의 말을 곱씹어본다. “과외는 교육을,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하고 후대에까지 세습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13년 전 경고는 적확했다. 위헌 결정을 뒤집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비상한 각오로 세습사회를 완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출발점은 가난한 아이들, 부모의 보살핌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좋은 대학에 가는 길을 넓혀주는 데 있다. 대학 졸업장 없이도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게 이상적이지만, 당장은 가능한 일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는 입학하기 힘든 외고·국제고·자사고 체제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대입 전형을 단순화하고 지역·기회균형선발 비율을 대폭 늘려야 한다. 부모나 전문가 도움 없이 준비하기 어려운 수시모집과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축소하고, 논술 가이드라인도 부활시켜야 한다. 특별히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교육에 조금만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떠올릴 만한 해법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세습사회의 도래가 내심 반가울 기득권층은 변화를 반대하거나 최소한 외면할 것이다. 덜 배우고 덜 가진 부모들이, 먹고사는 일이 힘겹더라도, 어깨를 겯고 정부와 국회를 압박해야 한다. 노후자금 털어 자녀 사교육에 퍼붓는 식의 각개약진으로는 백전백패다.

터키 얘기로 돌아가자. 지난해 이내찬 한성대 교수가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삶의 질 구조에 관한 연구’를 보면, 한국의 삶의 질 순위는 34개 회원국 중 32위다. 한국 뒤에 있는 나라는 터키와 멕시코뿐이다. 세 나라는 모두,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빈자는 점점 더 가난해지는 병을 앓고 있다.

김민아 논설위원

2013년 1월 7일 월요일

New microeconomic theory textbook


Microeconomic Foundations I: Choice and Competitive Markets

 By David M. Kre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