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5일 월요일

[경향신문: 최장집칼럼] 마키아벨리기능주의

새 정부 출범을 보면서, 나는 야권 입장에서 지난 선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여러 여론 조사에서 나타났듯이, 절반을 훨씬 넘는 유권자들이 정권교체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대선은 패배로 끝났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가 손짓했지만, 이를 자기 것으로 거머쥘 수 있었던 담대한 능력, 즉 비르투(virtu)는 없었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거 결과는 이념적 진보성, 민주 대 반민주, 진정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누가 더 실제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신뢰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경쟁, 즉 정당의 실력에 대한 평가가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대선이야말로 지극히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의 선거였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은 왜 좋은 정당(들)을 건설하고,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을 배출하는 데 실패했는가 하는 것은 비단 이번 선거 패배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난 시기 집권에 성공했을 때조차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하나의 성공모델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들은 민주진보파들이 정치와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그 특징적인 방법과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권력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권력을 부정하고 그에 저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자기 것으로 수용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에너지로 삼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권력은 권위주의적 힘의 원천이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정의이자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권력을 부패하고 타락한 사적 욕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치의 길을 우회하거나 회피하고자 했다. 권력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목적 의지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권력의 적극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는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별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정당정치 대신 시민정치를 앞세웠고, 정당조직보다 뉴미디어를 통한 네트워크의 형성과 온라인상의 소통 공간이 더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정치는 (만약 그것을 정치라고 생각한다면,)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공유하는 사회 집단들을 대표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정치를 낳을 뿐이다. 나아가서는 짧은 사이클로 변화하는 여론과 정서의 부침에 이끌리는 포퓰리즘 이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정치는 두 방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각성된 의식을 갖춘 시민들의 직접 참여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기존 정치를 대체하거나 새롭게 선도하려는 ‘영구적 운동론’의 방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가들이 좋은 정책대안을 만들어 정책과정에 투입하는 것이 정책결정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산출 중심의 기술합리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이다. 어느 쪽이든 이런 정치관 안에서는 정당과 리더십, 권력 수단을 통한 통치 기술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정치와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강한 한국의 지적 환경에서, 마키아벨리는 특히 민주진보파들에게 필요한 철학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권력의 긍정적 측면을 일깨우고, 어떤 정치인이 바람직한 목적 의지를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가치인가를 앞세우기보다 실제로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치는 ‘가능주의’(possibilism)의 정치 이론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앨버트 허시만이 말하듯이, 그것은 “결과를 만들어낼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중시한다. 마키아벨리의 철학에 있어 이 가능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는, 마키아벨리 정치철학의 중심 아이디어로서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비르투라는 말이다. 비르투와 짝이 되는 포르투나라는 말이 운명 또는 기회라는 말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비르투는 용기, 위용, 추진력, 힘, 결단력, 에너지, 의지력 등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를 지닌다. 운명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지만, 비르투를 가진 리더십은 운명조차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말하자면 권력을 다루는 장인, 또는 정치적 리더로서의 자질이자 덕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르투는 도덕적 규범과 담론을 통해 그려진 이상적 정치 환경에서가 아니라, 현실 정치로부터 도덕과 이상을 분리시킨 연후에 나타나는 진짜 현실에서 발현돼야 할 정치인의 능력이다. 정치는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면도 있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도덕적 감성과 충돌하는 권력의 어두운 악마성이 꿈틀거리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라면, 자신의 목적의지 내지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혐오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정치의 부정적 힘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 서야 하고 또 그것을 넘어 좋은 목적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의 효과를 위해 잔혹무비의 폭력을 승인하고 군주에게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교활함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통치에 필요하다고 해서 잔인함과 폭력, 교활함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수단을 필요로 할 만큼 긴요한 상황에서 실현돼야 할 높은 수준의 이상이나 목적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도덕하거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수반되는 대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수준에서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적 규범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진정으로 공익에 봉사하는 목적 의지가 있다. 정치는 그 둘의 변증법 내지 대차대조표로서 저울질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주인공인 체사레 보르자 이외에 그의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의 한 사람은 시라쿠사의 군주 아가토클레스이다. 두 사람 모두 잔혹무비의 폭력을 효과적이고도 경제적으로 사용했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크다. 보르자는 그의 행위가 비록 권력추구의 욕망에 의해 추동됐다 하더라도 공익의 증진을 가져왔던 반면, 아가토클레스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잔인한 폭군에 불과했다. 전자가 비르투를 가진 통치자라면, 후자는 대량학살의 범죄자 이상이 아니다. 통치자는 그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사용된 방법이 어떠하냐 하는 것보다, 그의 행위의 최종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점에서 철두철미하게 결과주의적인 것이 정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현실주의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인 ‘더러운 손’(dirty hands)의 문제와 연결된다. 정치지도자의 역할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정치가는 통상적 의미에서 명백히 부도덕한 행태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갖는) 정치가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도덕적 계율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한편으로 노예해방이라는 높은 비전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비도덕적 술수와 반대파들과의 뒷거래를 서슴지 않는 정치의 교활함을 가진 정치인 링컨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줘 화제가 됐다. 신화화된 링컨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히는 것임에 분명하겠지만, 마키아벨리를 이해한다면 그 점이야말로 링컨을 더 위대한 정치인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은 한국현대사의 중요 테마의 하나이다. 민중은 반란을 통해 통치 권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통치자가 될 수 없었고, 그들이 제기했던 문제는 기존 통치세력에 의해 수용되어 다뤄졌다. 문제제기 집단과 문제해결 집단의 괴리, 요구와 변화는 계속되지만, 돌아보면 기존 구조는 변함없이 건재한 상황을 뜻하는 수동혁명은 민주화 이후에도 되풀이되어 왔다. 이런 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유능한 정당, 유능한 정치지도자의 출현은 야권의 좋아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이 과제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우선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