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5일 토요일

[한겨레: 크리틱] 스피노자를 위한 각주 / 서해성

[크리틱] 스피노자를 위한 각주 / 서해성


서해성 소설가
나는 암스테르담에 각주 하나를 달고자 왔다. 도시를 꿰고 흐르는 운하는 미궁으로 엉켜 길을 흩뜨려놓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암스테르담과 레인스뷔르흐와 덴하흐(헤이그)에서 렌즈 깎는 집을 찾지 못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세 도시에는 그의 이름이 붙은 안경점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시계를 흐리게 하는 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
포르투갈 출신 유대인 마라노였고 배교 혐의로 파문당한 자였고 마흔 살 넘은 늙은 총각으로 죽었을 때 스피노자에게는 상속자도 물려줄 재산도 없었다. 사후 정리한 목록에는 책과 옷 몇 벌, 발로 돌리는 렌즈 물레와 렌즈 몇 개가 고작이었다. 그 연마공에게 렌즈를 구해 간 이는 갈릴레오가 ‘토성의 귀’로 남겨둔 것을 위성으로 확정한 천체학자 하위헌스였다. 그때는 별들이 싱그러워서 막 새 이름을 얻어갈 때였다. 저지대연합 네덜란드 또한 자본주의의 꽃 검은 튤립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돈 세상을 창조할 무렵 암스테르담은 두번 빛을 발했다. 한번은 스페인 왕조와 싸워 처음 공화정을 탄생시켰고 다른 한번은 스피노자를 파문하여 그를 버림받은 자유인으로 만들어낸 일이다.
그를 내쫓은 암스테르담 포르투갈 유대인회당 시나고그 마룻바닥에는 모래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물을 끼고 사는지라 습기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날 청년 스피노자의 발자국은 모래 위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에 더 분개한 회당 사람들은 그에게 첫 각주를 남겼다.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저주받을지어다.’ 파문에 따라 4엘렌(2m)보다 가까이 다가가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던 스피노자는 인간해방을 4엘렌 안쪽으로 근접시키고자 했다. 자유도시 암스테르담의 억압은 그의 렌즈 연마 능력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주었던 셈이다.
그가 밟던 낡은 물레가 놓여 있는, 스피노자 기념관이 된 레인스뷔르흐 집 바깥벽에는 선험적 각주가 박혀 있었다. 그 인근에서 먼저 살다 간 디르크 라파엘스의 시였다. ‘아, 만약 모든 사람이 현명했고/ 그저 뜻대로 되었다면/ 세상이 천국이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냥 지옥이다.’ 그는 신의 독선과 세속권력에 명징한 반역으로 맞서는 거룩한 이단자로, 물의 도시에서 자유의 불을 지펴 올렸다. 그 집 2층 구석 방문자 명단에는 1920년 11월2일 베를린 사는 아인슈타인이 찾아왔노라는 서명이 여적 선명했다. 대략 그해 그 물리학자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 투로 스피노자를 향한 수줍은 시를 썼으되, ‘얼마나 그 고귀한 사람을 사랑하는지/ 말로 하는 것보다 더.’ 훗날에도 그는 서슴없이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렌즈는 낮에만 깎을 수 있었다. 밤에는 글을 썼다. 그의 렌즈는 신의 별들을 지상으로 끌어왔고 글은 자유와 이성의 렌즈였다. 방안에 퍼지는 미세한 유리가루가 햇볕에 무지개로 퍼질 때마다 그의 폐는 닫혀갔다. 가톨릭 칼뱅 루터 시나고그, 데카르트파 모두가 집요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럴수록 그의 몸은 투명해지고 렌즈를 닮아갔다. 그는 자신이 갈아낸 렌즈로 미래를 먼저 보았다. 스피노자라는 근대의 렌즈는 제 가슴에 유리가 가득했던 것이다.
달랑 명패 하나뿐인 덴하흐 그의 집 바로 건너 작고 초라한 집창촌 더블스트라트 골목에서는 부슬비 속에 중씰한 사내 몇이 얼쩡거리고 있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신교회 마당에 서 있는 무덤 빗돌에는 단 두 단어가 오목새김되어 있었다. 히브리어로 ‘너의 사람’ 위에 그가 편지를 부칠 때면 장미 문장과 함께 사용했던 ‘조심’이라는 낱말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양도할 수 없는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모든 시대와 사람을 대신하여 스피노자의 빗돌이 스스로 각주를 달면서 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서해성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