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3일 목요일

[한겨레/아침햇발] 애국가와 난지도/김의겸

정말 애국가 노랫말을 쓴 이가 친일파 윤치호일까. 어느 시민단체가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이달 말 미국 에머리대를 방문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아직은 갑론을박 단계라고 하지만 걱정이 쉬 가시지는 않는다. 작곡가 안익태가 이미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판에 작사자마저 그렇다면, 우린 도대체 애국가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첫째는 부정이다. 애국가를 국가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는 거다. 우리의 순정이 배신당했으니, 냉정하게 돌아서면 그만이다. 이석기 의원이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한 것도 이런 정서를 깔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둘째는 타협이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처럼 나라 잃은 지식인 윤치호의 고뇌를 감싸주는 거다. “대일협력에 이르는 길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것보다 훨씬 복잡했고, 그 동기는 일신상의 영화보다 훨씬 다양했다”고 인정해주는 거다.

둘 다 내키지 않는다. 전자는 너무 단순하고, 후자는 너무 혼돈스럽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문득 난지도가 떠오른다. 쓰레기 더미 위에 흙을 갖다 붓고, 나무를 심고, 물길을 냈다. 철 따라 꽃이 피고 새가 깃들이기 시작했다. 고였던 악취는 쏟아부은 땀으로, 스며나오던 침출수는 수고로운 눈물로 씻겨나갔다. 난지도를 덮어버린 억새풀 군락에서 생명의 위대함을 느꼈다면, 그건 쓰레기 위이기에 더 각별했을 게다.

애국가도 마찬가지다. 설사 작사자의 훼절이 당혹스럽더라도 우리는 압도적인 기억을 축적했다. 1919년 3월1일 일제의 총칼에 도륙을 당하면서도 우리의 백성은 애국가를 불렀다. 임시정부 국무원들은 매일 아침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합창한 뒤 일을 시작했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신촌에서 시청까지 백만 인파가 목이 터져라 부르고 또 불렀던 노래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윤치호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의 변절에 아파할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그렇다. 친일과 독재라는 생채기가 있지만, 아픔을 다독거리며 새살을 돋게 했다. 오히려 지금의 자긍심은 과거의 남루함이 있었기에 더 빛이 난다. 초라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그 곤궁함을 ‘부정’하거나 ‘타협’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고쳐나가려는 용기만이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주는 법이다. 시인 김수영이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거대한 뿌리>)고 노래한 것도 그런 까닭일 게다.

반면, 북한은 정통성을 자랑하며 국가의 기틀을 세웠건만, 나무 한 그루 서 있기 힘겨운 민둥산이 돼버렸다. 김일성이 겨우 나이 스물에 친구 아버지가 사준 총 40자루를 들고 항일유격대를 만들었을 때(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그보다 빛나는 청춘이 어디 있었겠는가. 지금의 초라한 성적표는 인민의 창조성과 자발성을 백두혈통의 울타리 안에 가둬버린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경계해야 할 것은 과거의 뒤틀린 역사에서 연유하는 독소다. 난지도 곳곳에는 파이프가 묻혀 있다. 새나오는 메탄가스를 모아 발전소로 보내기 위한 시설이다. 그걸 덮어버리면 고이고 썩어서 성냥불 하나로도 폭발하기 마련이다. 우리도 역사의 환부를 정교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치료해 나가야 한다. 아픈 곳을 덮어버리는 건 말기 암 환자에게나 하는 법이다. 설사 윤치호 작사가 확인되더라도 애국가는 ‘마르고 닳도록’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김수영 시처럼 우리에겐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고,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김의겸 논설위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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