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7일 금요일

[경향신문기사] 탐욕의 제국



[리뷰]대답 없는 삼성얼음처럼 차가운 영화···'탐욕의 제국'
삼성전자 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뇌종양 등 직업병을 얻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지난 6일 개봉했다.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인천인권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소개돼 큰 관심을 끌었던 영화 '탐욕의 제국'은 삼성과 싸우는 전직 직원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시네마달 제공

■ 병명은 달라도 하고 싶은 말은 같은 이들
영화는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다눈만 보이는 하얀색 방진복을 입은 이들은 다름 아닌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을 얻은 노동자들이다.영화에는 다양한 직업병을 얻은 노동자들이 등장한다갑작스레 발병한 백혈병으로 미래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던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황씨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주인공이다.또 뇌종양 수술의 후유증으로 눈물을 흘리지도말을 하지도걷지도 못하게 된 한혜경씨살아있는 동안 남들 다 가보는 청계천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이윤정씨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유방암을 선고 받은 박민숙씨두 아이를 위해 남편의 죽음을 반드시 규명하겠다는 정애정씨 등.각자 앓고 있는 병은 다르지만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 결 같다"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리고회사의 사과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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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처럼 차가운 영화
기자는 앞서 '또 하나의 약속' 리뷰에서 분노 등 감정이 폭발하는 영화 '변호인'을 불에 비유하고잔잔하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물에 비유했다이에 비하면 '탐욕의 제국'은 얼음이다.이 영화는 내레이션도 없고인물들의 대사도 많이 담겨 있지 않다얼음처럼 차갑게 인물들의 모습그들의 말을 전달한다카메라의 움직임도 많지 않다카메라는 극단적 클로즈업 또는 극단적 롱샷(인물이나 피사체를 멀리서 촬영해 작게 보이게 하는 것)을 통해 천천히 그들을 응시한다.물론영화에는 등장인물들이 근로복지공단·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삼성전자 본사 등을 찾아가 시위를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그 장면에서 인물들은 분노를 하고 있지만카메라는 매우 정제된 시선으로 그들을 담았다.영화를 촬영·편집·연출한 홍리경 감독은 "피해자들에 대해 여러 얘기가 있다회사가 잘못해서 이들이 병을 얻었다는 말도 있고운이 없어서 병에 걸려 놓고 억지를 부린다는 얘기도 있다그래서 그냥 보여지는 것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얼음은 불이나 물보다 강렬하지는 않다그러나 얼음만큼 원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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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하지 않는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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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 조금 넘는 영화 속에서 삼성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2012년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최우수 삼성전자 부사장의 "회사로서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말이 유일무이하다.그러나 최 부사장 역시 국정감사 쉬는 시간에 찾아간 한혜경씨와 한씨의 어머니의 항변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그는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며 물을 마신다.삼성전자 본사를 찾아가 소리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마치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것처럼 보인다이를 보면 이 영화가 한 쪽의 입장만 가득 담은 일방적인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영화는 이 모습이 법정 밖에서는 응답하지 않는 삼성의 실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힘 없는 이들의 싸움힘 있는 이들의 무응답 등을 극명하게 상징하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중간 중간 등장하는 컨테이너 장면이다부산의 한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촬영한 이 장면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하역장에 가득 쌓여있는 무수한 컨테이너들을 아무 말 없이 보여준다.커다란 컨테이너이를 실어 나르는 배에 비하면 인간은 개미처럼 매우 작게 보인다인간을 위해 컨테이너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컨테이너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영화의 제목은 장 지글러의 저서 '탐욕의 시대'에서 따왔다고 한다'탐욕의 시대'의 원제(L'empire de la honte)와 이 영화의 영어 제목(The Empire of Shame)이 같은 이유다인간이 탐욕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그러나 무소불위의 '제국'이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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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만 봐도뒷모습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반도체 공장 직원은 말한다"우리가 왜 방진복을 입는지 알아사람을 보호하려고 입는 게 아니라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입는 거야."
눈만 보이는 방진복을 입은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은 모두 똑같은 사람들처럼 보인다그러나 그곳에서 일했던 이들은 "눈만 봐도뒷모습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안다"고 한다.중요한 건 관심이다아무리 개성 넘치는 치장과 옷을 입는다 해도 관심이 없다면 기억도 나지 않고똑같이 생긴 쌍둥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한혜경씨도 마찬가지였다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한씨가 하는 말은 영화 초반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의 말을 들을 때 자막이라도 넣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들어서자 한씨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이들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관심이다누구의 말이 맞고누구의 말이 틀렸는지에 앞서 우선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것이 이들의 심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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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간간히 삼성 반도체 공장 기숙사의 모습이 등장한다이들 기숙사동의 이름은 '개나리''라일락'이다.영화 '탐욕의 제국'은 꽃다운 청춘을 회사에 바쳤지만 남은 건 죽음상처뿐인 이들의 이야기다꽃피는 봄이 영화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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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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