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1일 화요일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 그후 1년 / 사회평론<길> 1998년 1월호

그는 '죄인' 부끄러운 역사는 '무죄'였다.

"탕! 탕! 탕! 탕!" 1949년 6월 26일 12시 30분경, 경교장에는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백범 김구는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47년 뒤, 안두희는 양손이 하얀 노끈에 묶이고 목이 졸린 상태로
                    머리에 둔기를 맞아 피를 흘린 채 죽임을 당했다.
       그를 죽인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박기서란 버스운전사였다.

"기서야, 이놈아!"
96년 10월 23일 오후9시. 비명과 같은 외마디를 내지른 박준서씨는 살인을 저지른 동생의 모습을 보고 이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옆의 '살인자'의 아내 원미자씨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짜야?"라고 남편한테 되묻고 되물었다.
사실을 인정하는 남편 앞에 원씨는 자신을 속여왔던 남편이 원망스러워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안숙이 시험이 20일 밖에 안남았는데....세상에 어쩌자고...."
"나도 많이 걱정했어. 당신 눈치 안채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살인자'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미리 말하면 못하게 할 게 뻔하잖아...,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어..."
형사들은 조서에 그의 인적사항을 하나하나 써내려갔다. 1948년 생 주소/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직업/부천 소신여객 버스 운전사,. 가족/ 처 원미자. 맏딸 박안숙, 둘째딸 박정아, 막내아들 박찬종.
  경찰서에서 비극적으로 마주한 부부의 첫 대화는 딸애 시험 걱정을 나누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 있던 안숙이는 오히려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얼마 앞두지 않은 자신의 수능시험 때문에 아버지가 미안해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사건이 나고 이틀 뒤(10월25일). 안숙이는 점심시간에 학교 뒤뜰에 갔다가 밧줄에 묶여 경찰이 이끄는 데로 끌려가는 아버지를 가까이서 보았다. 현장검증을 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 텔레비전에서만 만났던 아버지의 얼굴. 하지만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한 일이 역사에 남을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한 생명을 죽였다는 현실 앞에 괴로워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숨어서 보다가 그 표정을 읽고선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아빠! 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고 계세요? 더 당당하게 걸으세요. 아빠가 밧줄에 묶여 경찰한테 질질 끌려 갈망정 다른 범죄자들과는 다르게 의연하셔야죠!"
박기서한테 죽임을 당한 안두희의 시신은 인천의료원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곳에 마련된 영안실에는 이날 밤 부인 김명희씨만 잠시 들렀을 뿐 그의 죽음을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미국에 있는 아들딸들 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안두희. 수십년 동안 '진실'과 '분노'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쳐왔던 그의 삶은 이렇듯 쓸쓸하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49년 6월 26일 백범을 살해하고도 버젓이 두 계급이나 특진했고, 제대후 군납공장을 지어서 군대부식을 공급하며 큰 돈을 벌었던 그. 그러나 4.19혁명은 이런 그의 생활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도망자로서 그의 삶은 시작이 된다. 역사는 '잠시' 제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61년 4월. '김구선생진상규명투쟁위원회' 간사였던 김용희씨는 마침내 그를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 하지만 경찰에서 돌아온 답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것. 역사에도 공소시효는 있었다. 이처럼 운좋게 풀려난 그였지만 4년 뒤 이번엔 곽태영씨한테 칼로 두군데나 목을 찔려 생사를 헤매야 했다. 87년에는 권중희씨한테 민족정기봉으로 머리를 맞았고 92년엔 권씨의 손에 이끌려 효창공원 백범묘소에서 뒤늦은 울음을 토했다. 하지만 '진실'과 '분노'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버스운전사 박기서씨로부터 '정의봉'을 맞고 백범 살해 이후 47년을 비참하게 버티고 버텼던 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96년 12월18일부터 시작되어 13차례에 걸쳐 진행된 박기서에 대한 재판에는 문한성, 임통일 변호사 등 모두 7명의 변호인들이 참여했다. 그들은 박기서의 살인이 "올바르지 못한 역사가 개인한테 준 폭력"임을 분명히 하고 그에 대한 무죄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를 위해 성대 사학과 서중석 교수를 증인으로 세우는 등 '현대사'에 대한 재판으로 밀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서교수에 대한 증인 신문 이후 더 많은 역사학자들을 증인으로 세우려 했던 변호인들의 노력에 "한 사람만 하면 됐지 않느냐"며 현대사 재판으로 이어지는 걸 가로 막았다. 그리고 97년 7월31일 재판부는 박기서한테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임통일 변호사는 지난 9월9일 이에 반발하고 상고를 냈다.
"비록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에 의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은 부인됐으나, 우리 헌법상 법통은 이어져 있으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을 안두희가 살해하게 된 과정, 그리고 일제 패망 후 친일파의 현황과 백범 살해의 배후를 잘 살핀다면, 현 헌법체계하에서 피고인의 행위는, 다른 실정법적인 법적 절차를 통해 실현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불가피하게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행위로, 도저히 실형을 선고할 수 없음에도 원심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심리를 하지 않고 미진한 상태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습니다.
'피고'박기서는 상고 이유를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안두희는 한 개인의 생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식민과 분단의 감옥에서 반민족, 반통일, 반역사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를 뜻합니다. 설령 안두희가 자연사 했더라도 보통명사로서 안두희는 이미 역사의 족적을 새겼습니다. 한 자연인 안두희를 살해한 나의 행위가 실정법을 어긴 것이라고 법은 일심과 항소심에서 이미 지적했습니다. 전 여기에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은 한가지를 더 발언해야 합니다. 보통명사로서 안두희를 우리 법이 어떻게 정리할 것이고, 그 정리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 될 건지 걸림돌이 될 건지 법은 발언해야 합니다.
역사를 상대로 한 재판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11월 17일. 이 상고에 대한 마지막 판결이 내려 졌다. "피고인의 이 사건이 범행동기나 목적이 주관적으로 정당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우리 법질서 전체의 관점에서는 사회적으로 용인할 만한 정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징역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다." 재판부의 판결에는 박기서와 변호인이 바랐던 현대사에 대한 '판단'은 없었다. 또 한사람의 징역 3년형 짜리 '죄인'은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49년 6월 26일 백범의 몸에 총탄 네발을 퍼부어 그의 생을 끝장냈던 안두희의 죄과를 낱낱이 심판하지 못한 47년 동안의 부끄러운 "역사"한테는 단 하루의 징역형도 내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상고심을 지켜본 박기서의 아내 원미자씨는 그 판결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3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또 볼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이 감옥에 있어 생계가 막막해진 아내는 사건이 있은 네달 뒤부터 시흥동 한 해장국집에 일을 나간다. 아는 친구 소개로 들어간 그 식당에선 한달에 70만원을 주고 여기다 택시비를 조금 보태준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시계는 4시를 가리킨다. 새벽, 이제 피곤한 몸을 누일 수 있다.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는 날이 잦아 졌다. 엄마는 꼭 깨우라고 일러두었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챙겨서 학교에 나가곤 한다. 비록 남편은 감옥에 있지만 이처럼 꿋꿋하게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든든하기만 하다. 가정에 충실했던 남편은 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아이들은 그런 아빠를 그리워 한다. 지난 12월9일 원씨는 권중희씨, 조문기씨와 함께 남편 면회를 갔다. 이날은 남편의 50번째 생일날이었다.
"찬종이가 아빠 생일이라고 따라오려 했어요. 근데 학교에 가야 하니까..., 대신 아빠한테 이런 말을 전해 달래요. 독서학원 잘 다니고 글 잘써서 선생님들한테 칭찬듣고 있다구요. 그래서 아빠 기뻐하시라구요."
"아, 그래."
남편은 활짝 웃었다.
어느새, 면회시간 5분은 끝나가고 있었다. 원씨는 다음엔 곧 방학을 하는 아이들과 함께 온다는 약속을 하고, 언제 이감될지 모르는 남편을 뒤로 했다. 이날 원씨는 감옥에서 고생하는 남편이 힘들어할까봐 차마 입에서 떼지 못한 말이 있었다. 남편이 상고심 공판을 받은 다음날인 11월 18일 어머니(이순덕 옹)가 세상을 떠나 고향 정읍 선산에 묻히셨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 주간지에 나온 아들의 사진을 일년 내내 보듬고 살다가 그렇게 가셨다고 한다.


(박기서 옥중인터뷰)
12월 10일 2시. 안양교도소 3호 면회실 투명플라스틱판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박기서의 얼굴은 추운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쪽 편에서도 입김이 펄펄 나왔지만 건너편 박기서의 목소리에도 입김이 묻어 있었다.
그의 푸른 조수복에는 죄수번호 1552번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는 기자 옆에 있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김인수 위원장이 반가웠는지 서로를 가르고 있던 '투명 플라스틱 판에' 손을 얹고 소리내어 웃었다.
"아이구, 안녕하셨어요."
"이게 얼마 만입니까. 그동안 면회도 못와서 죄송합니다."
둘은 박기서가 자수한 직후 경찰서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1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셈이었다. 잠시 둘 사이의 대화가 이어졌고, 김위원장은 곧 그한테 기자를 소개했다. "예....안녕하세요."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서 '시골 아저씨' 분위기가 느껴졌다.
- 감옥생활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 제가 독방에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혼자 책 읽고, 편지 쓰고... 운동은 하루 한시간 할 수 있지요."
-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 얼마전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다 읽었습니다. 요즘엔 '새벽에 길어 올린 한 생각'..."
- 박노해..<사람만이 희망이다>요?
" 예, 맞아요...
- 읽으니 어떻던가요.
"(쑥스럽게 웃으면서)아유, 그냥 좋죠...뭐."
- 편지는 누구한테 주로 보내나요.
" 가족들하구요. 요즘엔...이해인 수녀님하고 편지를 나누고 있어요."
- 이해인 수녀님이요? 어떤 내용으로 나누시는데요.
" 서로 시 써서 보내구...그러지요.(또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 3년형을 받았는데, 후회는 없습니까.
" 결코 후회는 안합니다. 가족들한테 미안하지만 적은 희생은 있어야지요. 전 머릿속으로 안두희를 수천번 죽였어요."
- 가족들이 상당히 그리워하고 있던데요....
" 저도 그렇죠. 아내가 아이들을 잘 키워주고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아이들이 밝고 힘차 보이더군요.
" 원래 없이 산 사람들은 그렇게 착하고 밝은 거예요."
- 감옥에 같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 잘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 늙은 사람 왜 죽였냐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래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 보고 싶은 사람은 없나요.
" 편지도 많이 나누고, 사람들이 면회를 자주 와서 특별히 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모두한테 고마울 뿐이지요."
건너편 문에서 교도관 한 사람이 문을 열었다. 끝났다는 신호였다. 시계는 2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기서는 이쪽을 바라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시 차가운 독방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5일 후, 그가 "오늘(15일)새벽 청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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