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1일 화요일

박기서씨 최근 인터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212111155&code=100100

1996년 10월23일 오전 11시30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가 살고 있는 인천의 한 아파트. 안두희의 부인이 외출하는 순간을 틈타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장난감 권총으로 안두희를 위협하고는 미리 준비한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애초부터 ‘너(안두희)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계획된 거사였다. 30분이 지났을까. 안두희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 그는 택시를 잡아탔다. 시간이 멎은 듯했다. 공황 상태에 빠졌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고교생인 작은딸이 울먹였다. “아빠, 지금 어디야? 집에 형사들이 왔어. 무슨 일이야?” 현장에서 피가 채 마르지도 않은 정의봉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보고 경찰이 움직인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성당으로 가서 고해성사를 했다. 자수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그날 입건됐다. 1년5개월여간 옥살이를 한 그는 지금 개인택시를 몰고 있다.

18년 전 안두희를 죽인 박기서씨(64)를 21일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묘소에서 만났다. 김구 선생을 뵙고 싶다는 그의 말에 따른 것이다. 그는 참배 후 제단에 놓인 한 장의 종이를 집어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생이라는 신모양의 글이었다. “백범 할아버지 책을 읽고 앞으로는 우리나라를 위한 어린이가 되어야겠다고 느꼈어요.” 박씨는 이 편지를 소리내어 읽다가 갑자기 흐느꼈다.

“가방끈이 짧은 저는 정치란 걸 몰랐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정신이 없었죠.” 아이들이 갖고 있던 <백범일지>를 우연찮게 손에 잡은 후 수없이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는 박씨는 “1000만분의 1도 그의 성품에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그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더듬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백범을 존경하게 된 그는 “민족 지도자를 죽이고도 권력의 비호하에 호의호식해온 안두희를 가만둘 수 없다”는 다짐을 거듭했고, 그날 실행에 옮긴 것이다.

동기야 어쨌든 그는 법이 용납하지 않는 죄를 저질렀다. 그는 1997년 9월 대법원에 낸 상고이유서의 일부 내용으로 심경을 대신 전했다. “(신앙인으로서) 안두희의 영혼이 영면하기를 기원하며… 진심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죽는 날까지 내 안에 가슴앓이로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박씨는 “안두희 살해사건을 한 개인의 사건으로만 치부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 ‘안두희’는 성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반민족, 반통일, 반역사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라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되물었다. “권력의 이권 다툼, 역사를 기만하고도 응징되지 않은 세력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까. 세월호 참사는 또 어떻습니까. 이런 것들은 살인이 아닌가요.”

세월호 참사 후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아온 그로선 안두희가 핵심 간부로 몸담았던 ‘서북청년단’의 재현은 충격에 가까웠다. 서북청년단 재건위의 ‘노란 리본’ 철거 소동을 두고, “어처구니없다”고 운을 뗀 박씨는 “남북 화해를 꾀했던 백범을 암살한 사건은 안두희 세력에 의한 정치적 살해였다”면서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조직이 나타나 세월호 참사를 막지 못한 정권의 무능을 감싸고 있는지, 난센스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박씨는 ‘통일’을 되뇌었다. 그는 “현 정권이 과연 통일에 의지가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대통령이 ‘통일 대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서로를 못 믿는 마당에 통일이 가당키나 한 건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는 김구기념관을 둘러본 후 “대선 직후 박근혜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는데, 김구 선생의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렸을지 궁금할 따름”이라며 몰고 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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