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8일 월요일

[한겨레21] 행복지수 1위 국가 부탄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이 전하는 ‘행복지수’ 1위 국가 부탄의 모습…
국민소득 규모는 후진국이지만 삶의 만족도는 가장 선진국인 나라의 속살을 들여다보다
국내총생산(GDP) 같은 지표로는 한 사회의 경제를 측정할 수 없다는 반성과 함께 국내총행복(GDH)이 새로운 지표로 주목받고 있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로 알려진 부탄의 한 마을에서 주민이 밝게 웃고 있다. 한겨레 김현대
국내총생산(GDP) 같은 지표로는 한 사회의 경제를 측정할 수 없다는 반성과 함께 국내총행복(GDH)이 새로운 지표로 주목받고 있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로 알려진 부탄의 한 마을에서 주민이 밝게 웃고 있다. 한겨레 김현대
성장 귀신이 지배하는 나라가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오로지 경제성장 외길을 달려 100달러도 안 되던 1인당 국민소득을 단기간에 2만5천달러로 끌어올린 나라. 그래도 여전히 성장에 배고픈 나라. ‘경제’를 위해 천연기념물인 산양의 서식처를 앗아가는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나라. 대통령이 입만 열면 경제와 성장을 외치는 나라. 대통령과 대척점에 있는 야당 지도자들도 ‘유능한 경제정당’ ‘소득주도성장’ ‘공정성장’ 등 여전히 경제와 성장을 외치는 나라.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그리고 국민 행복을 다투지만 당선 뒤에는 도로 ‘경제성장’으로 돌아가는 나라. 정당은 유권자의 표를 의식하는 것이니, 국민 다수가 경제와 성장 귀신에 사로잡힌 나라.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발표한 세계의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조사 대상 143개국 가운데 118위로 거의 꼴찌에 가까운 나라. 우리의 자랑스럽고 부끄러운 조국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이 2천달러에도 미치지 못함에도 유럽 신경제재단이 행복지수 1위,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나라가 있다.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보다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을 더 중시하는 나라. 한 푼의 외화가 아쉬움에도 나무를 잘라 팔지 않고 숲을 보호하는 나라. 그래서 호랑이 개체 수가 늘어나는 나라. 신호등을 거부하고 수신호로만 교통정리를 하는 나라. 히말라야 동쪽 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왕국 부탄의 얘기다.
국민의 97%가 행복하다는 나라
남한 절반 면적의 부탄에는 대략 75만 명이 살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작은 나라는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 사이에 끼여 있다. 부탄이 외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부탄은 히말라야 산속 은둔의 왕국 혹은 마지막 샹그릴라로 불리기도 했다. 부탄에 라디오가 처음 개통된 것이 1973년이고,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 1999년이니 그럴 만도 하다.

부탄 국영항공사인 드루크항공을 통해 외국인이 처음 들어온 것이 1983년이고,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관광을 자유화했다. 1992년에 입국한 외국인 관광객은 2850명에 지나지 않고, 이 수는 1999년에도 8천 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부탄을 찾는 외국인이 급격히 늘어나 2014년에는 6만3천 명의 ‘국제 관광객’이 부탄을 찾았다. 국제관광객 이외에 남아시아지역협력체(SARRC) 가운데 인도·방글라데시·몰디브 세 나라로부터 무비자 ‘지역관광객’ 6만5천 명이 부탄을 찾았다. 여기에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 초청비자로 입국한 사람, 취업비자로 입국한 사람도 상당수 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연간 부탄 인구의 약 20%에 가까운 외국인이 부탄을 찾고 있다. 부탄을 여행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2008년 97명에서 2013년 596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부탄은 독특한 비자 시스템을 갖고 있다. 부탄을 여행하려면 하루 250달러(성수기) 혹은 200달러(비성수기)를 여행사를 통해 미리 납부해야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여행사는 이 돈 가운데 65달러를 관광세로 정부에 바치고, 나머지 돈으로 관광객의 숙식·교통·가이드 등 관광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지불한다. 부탄이 외국인 관광객을 국제관광객과 지역관광객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인도 등의 지역관광객에게 비자를 면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사람이 부탄에 가려면 하루 200~250달러를 미리 지불하고, 희망 일정을 제시하면 그쪽 여행사가 제공하는 정해진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반면, 인도 등 지역관광객은 자유롭게 숙박과 식사, 관광 일정 등을 조절할 수 있다.
행복을 위한 정책은 어떤 모습일까?
이처럼 부탄이 국제관광객과 지역관광객에 대해 차별대우를 하는 것은 인도 등과의 특수한 외교관계 때문이다. 하루 200달러 혹은 250달러는 일체의 관광비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비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배낭여행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부탄이 이러한 관광정책을 견지하는 이유는 인구 소국인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들어오면 부탄의 환경이나 문화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이 때문에 부탄 정부가 외국인 관광객 수를 제한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부탄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관광객 수를 현재로서는 연간 최대 20만 명(국제 및 지역 관광객)으로 설정하고 있다.
사람들이 적지 않은 돈을 내며 부탄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탄관광위원회 국장은 부탄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를 꼽는다.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에서 가난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보전하면서 좋은 자연환경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부탄 사람들의 모습은 물질 만능과 극심한 경쟁 그리고 개인주의적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경이와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위안을 준다. 그들의 눈에 비친 부탄의 이미지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이다. 과연 부탄 사람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내가 부탄에 대해 꽤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접적 동기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2010년 8월부터 2013년 7월까지 충남발전연구원(지금의 충남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2010년 7월 시작된 민선 5기 충남도정은 ‘행복한 변화, 새로운 충남’을 표방하고 있었다. 나는 ‘행복한 변화’란 어떠한 변화인가, 행복은 주관적인 것인데 어떻게 정책적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내가 대학교수 신분으로 외도를 해서 연구원장을 맡은 이유는 평소 주장해오던 ‘내발적 발전’을 충남도정에서 실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지역은 외부에서 공장이나 자본 혹은 정부 재정을 유치해 경제성장을 이루는 외생적 개발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외생적 개발로 경제성장에 성공한 예도 매우 적지만, 설사 지역경제가 성장해도 지역민의 행복 증진에는 기여하지 못한 게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내발적 발전은 경제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을 벗어나 경제와 사회·문화 그리고 환경이 통합적으로 발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역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가 부탄에 주목한 이유는 GDP보다는 GNH를 중시하고, GNH의 증진을 위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본 전략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지속 가능하고 공평한 사회·경제 발전. 둘째, 생태계의 보전과 회복. 셋째, 부탄의 전통과 정체성을 실현하는 문화의 보전과 증진. 넷째, 앞의 세 가지를 달성할 수 있는 좋은 거버넌스가 그것이다. 부탄의 이러한 GNH 전략은 내가 주장하는 내발적 발전 전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히말라야의 은둔국 부탄의 유권자들이 2008년 팀푸의 한 투표소에서 투표하기위해 줄 서있다. 부탄은 100여년간의 절대왕정에 종식부를 찍고 새 의회선거를 치름에 따라 세계 최신생 민주국으로 변신했다. 팀푸/AP 연합
히말라야의 은둔국 부탄의 유권자들이 2008년 팀푸의 한 투표소에서 투표하기위해 줄 서있다. 부탄은 100여년간의 절대왕정에 종식부를 찍고 새 의회선거를 치름에 따라 세계 최신생 민주국으로 변신했다. 팀푸/AP 연합
부탄을 직접 방문해 ‘행복한 나라, 부탄’을 만나보고 싶었다. 아직 부탄에 관한 여행 정보가 충분하지 않을 때라 비자 획득부터 비행기 예약까지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2011년 10월 말 연구원 4명과 함께 네팔의 카트만두를 경유해 부탄 여행에 나섰다. 부탄 입국 전 2박3일간 체류한 카트만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었음에도 심각한 가난과 환경오염 그리고 교통 지옥 등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무질서한 카트만두 공항을 뒤로하고 도착한 부탄의 파로 공항에서 우리 일행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깨끗한 공기와 맑은 하늘 아래 전통 양식으로 잘 지어진 공항청사, 그리고 전통 복장을 한 부탄 사람들의 친절한 미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한 나라’에 온 것을 실감했다. 3박4일의 짧은 체류 기간이었지만 부탄의 국민총행복위원회(GNHC)를 방문해 실질적 총책임자인 카르마 치팀 차관을 만나 장시간 설명을 듣고 토론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나는 2013년 5월의 두 번째 방문에 이어, 2015년 5월 세 번째로 부탄을 찾았다. 이번에는 여행이 아니라 두 달간 부탄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초청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하루 250달러의 법정 체류비를 낼 필요가 없었고, 나 스스로 아파트를 빌려 생활했다.
절대군주국에서 민주국가로의 극적인 변화
2개월간의 부탄 생활 동안 나는 GNH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부탄연구소 무급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부탄의 동쪽 끝까지 ‘고난의 여행’을 다녀왔고, 부탄 정부의 주요 기관을 방문해 그들이 국민의 행복 증진을 위해 어떤 정책을 사용하는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최고 관리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지난 두 번의 여행과 달리 부탄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2개월 동안 몸무게가 5kg이나 빠진 것이 단적인 예다.
부탄은 짧은 기간에 민주화와 사회·경제 발전을 함께 달성한 나라다. 1960년대의 부탄은 150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자동차 도로는 전혀 없었고, 국민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의사는 단 두 명밖에 없었고, 평균수명은 38살에 지나지 않는 국민소득 51달러의 최빈국이었다. 그리고 국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군주국가였다.
그러나 오늘날 부탄은 전혀 다른 나라로 변모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500달러로 우리나라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후진국이지만, 부탄 국민의 삶은 여느 후진국과는 전혀 다르다. 부탄에서는 모든 교육과 의료가 무상이다. 부탄 헌법은 “국가는 모든 어린이에게 10학년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여야 하고, 기술적·전문적 교육을 일반적으로 보장하여야 하고, 실력에 따라 고등교육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부탄 어린이들은 모두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여느 후진국과 달리 거리에서 구걸하는 어린이를 찾아볼 수 없다.
부탄 헌법 제9조는 “국가는 근대 의학과 전통 의학 모두에서 기본적인 공공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해야 하고,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적절한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질병이나 장애 혹은 부족이 발생한 경우에 안전장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부탄은 의료서비스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적어도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일은 없다. 부탄 사람의 기대수명은 69살로 크게 높아졌다.
사회·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부탄은 환경보호에서도 놀라운 성취를 이룩했다. 전 국토의 70% 이상이 숲으로 덮여 있고, 생태적 보호지역이 전 국토의 51%에 달하고, 동식물의 다양성이 잘 보전되고 있다. 부탄은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에서도 다른 나라의 전범이 되고 있다.
부탄에서 국가 프로젝트는 총행복지수를 높여주는 것만 실행에 옮겨진다. 국민총행복지수를 처음 도입한 부탄의 싱기에 왕추크 국왕. 사진 한겨레 자료
부탄에서 국가 프로젝트는 총행복지수를 높여주는 것만 실행에 옮겨진다. 국민총행복지수를 처음 도입한 부탄의 싱기에 왕추크 국왕. 사진 한겨레 자료
부탄의 민주화 과정도 극적이다. 부탄은 1907년 통일 왕국을 수립한 이후 100년 동안 국왕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군주국이었다. 그러나 부탄의 4대 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는 “한 사람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인민들이 자신의 힘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다”는 신념으로 2001년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적 입헌군주제로 전환하기 위한 헌법 초안의 마련을 지시했다.
2005년 헌법 초안이 토론을 거쳐 완성 단계에 이르자, 4대 왕은 민주화와 분권화의 원활한 이행을 위해 2006년 불과 51살의 젊은 나이에 왕좌를 아들에게 양위했다. 절대왕제에 익숙했던 부탄 국민은 절대군주제의 폐지와 왕의 선위에 두려움을 느끼고 반대했으나, 국왕 스스로 국민을 설득해 관철했다. 2008년 5대 왕에 의해 민주헌법이 선포되고, 상원과 하원 의원 선거를 실시해 의원내각제가 성립되었다. 2013년에는 선거를 통해 정권이 평화적으로 교체될 정도로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정착되고 있다.
부탄이 짧은 기간에 민주화와 사회·경제 발전에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GDP보다는 GNH가 더 중요하다”는 발전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통일 왕국 이전의 부탄 법전은 1729년 “정부가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면, 정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 정신을 계승해 1972년 4대 왕은 즉위와 함께 GNH를 국정 비전으로 제시했다.
GNH는 개념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부탄 정부는 행복을 다차원적 그리고 집단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행복은 주관적 웰빙만이 아니라, 물질적 웰빙과 비물질적, 정서적·문화적 웰빙 사이의 균형에서 실현된다. 또한 행복은 개인과 사회의 상호 연관 속에서 실현되고, 개인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의미에서 집단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탄 정부는 경제, 사회·문화, 환경 그리고 민주주의의 통합적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빠른 변화를 겪는 부탄은 어디로 가는가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부탄은 여전히 후진국이다. 생활수준은 매우 낮고 국민의 기본권은 충분히 보장돼 있지 않고, 시민의식과 시민사회도 성숙하지 않았다. 여기에 부탄은 경제성장에 따른 이농과 도시화, 개인주의의 만연, 공동체 붕괴와 사회안전망 위축, 청년실업과 늘어나는 자살률, 전통문화 훼손, 환경 파괴 등 성장통을 동시에 앓고 있다. 부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부탄은 동남아 국가에 비하더라도 특별히 행복하지는 않지만, 다만 다른 나라에 비해 정책적으로 국민 행복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부탄 관리)이다. 앞으로 부탄의 국민 행복과 그 정책의 실체를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자.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은 2000년대 중반 한국사회경제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원로급 경제학자다.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등도 맡아 이론과 현실을 함께 고민했다. 지난 5월부터 두 달 동안 박 이사장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불리는 부탄에서 지냈다. 부탄의 속살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구조와 역사를 살폈다. 경제학자의 눈으로 그 행복의 비결을 톺아보는 글을 <한겨레21>에 보내왔다. 앞으로 6차례 정도에 걸쳐 연재한다.

2015년 9월 24일 목요일

[한겨레기사] 김종인 “재벌 도와주면 경제 성장? 잘못된 정책 여전”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낸 김종인(75) 전 의원이 재벌에 의존한 경제성장률 높이기 신화에서 벗어나 2%대 성장에서도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경제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 30년 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경제민주화 헌법 조항에 대한 인식조차 부족하다고 쓴소리를 했다.
김 전 의원은 2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25차 동반성장포럼에서 ‘한국경제가 나아갈 길’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박정희의 성장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해 너도 나도 성장률을 높일 수 있다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다”면서 “우리 경제의 현실에서는 3%대 성장도 힘들고 오히려 2.5% 정도의 성장이 정상”이라고 말했다. 동반성장포럼은 정운찬 전 총리가 주도하는 동반성장연구소가 주관하는 행사다.
김 전 의원은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의 대표공약인 경제민주화를 입안하는 등 핵심 역할을 했지만 대선 이후 박 대통령이 사실상 경제민주화 공약을 파기하면서 관계가 멀어졌다.
“이젠 성장 컴플렉스 벗어나야
2.5%대로도 조화로운 사회 가능
경제민주화 헌법조항 30년 돼가는데
박근혜 대통령 제대로 인식 못해”
김 전 의원은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 잘못되면 환자가 나을 수 없듯이, 경제정책 수립자들이 잘못하면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면서 “정부가 재벌을 도와주면 높은 성장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정책 때문에 외환위기를 자초했는데, 지금도 그런 잘못을 지속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어 “최근 독일을 방문했다가 한국이 연간 3%의 성장을 지속하면 2030년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를 달성할 것이라는 예측 자료를 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한국이 연간 3% 성장을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면서 “선진국들은 성장률이 우리보다 낮아도 조화로운 사회를 이뤘듯이, 한국도 4% 성장에 연연하지 말고 2.5%대 성장을 하더라도 안정과 조화를 이룩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전 의원은 “2012년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면서 “대통령이 이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데,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119조2항)을 넣은 지 3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아직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있다”며 박 대통령을 비판했다. 이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려면 리더의 결심이 중요한데 우리는 불행히도 그런 리더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는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를 못하면 결국 국민이 직접 경제민주화를 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다만 그렇게 될 경우 사회적 비용이 커지는 게 부담”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최근 최대 이슈인 노동시장 구조개편과 관련해서 “(정부가) 소수 강경 노조의 모습만 부각시키며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하는 것은 대한민국 전체 노동시장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잘못된 처방을 내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