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5일 수요일

[한겨레 시론] 한국의 의견시장과 대선 여론왜곡 / 방정배

[시론] 한국의 의견시장과 대선 여론왜곡 / 방정배

천동설은 중세시대의 지배적 여론이었다. 다수 의견이었고 믿음이었다. 참 인식과 거리가 먼 거짓이었다. 감정·비합리성·충동이 동반된 다수의 여론이, 지성과 합리성을 갖춘 지식과 과학을 압도하고 이긴 것이다.

개인의 사적 의견이 공적 집합의견이 될 때 그것을 여론이라고 칭한다. 독재사회는, 의견이 공적으로 집합할 수 있는 의견시장이 닫혀 있어 폐쇄사회라 하고, 힘 있는 자의 독단적 의견이 공식 여론으로 행세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선 의견의 자유시장이 열려 있어 누구나 개별 의견과 주장을 이 공개장에 내놓을 수 있고 공개리에 검증되고 동의나 거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거짓과 악의 의견이 여론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아주 낮다. 그런데 이 의견시장의 장터 제공과 의견 제출, 의견 중재 등 여론 형성의 거간꾼 역할 담당자가 언론매체다. 의견소비자로서의 국민들은 뉴스·해설 등 언론정보에 의존해 의견을 형성하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는데 언론이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의견 중재를 못하면 여론 왜곡이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론매체는 여론의 모태에 비유할 수 있고, 모태가 건전해야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듯 건전한 언론활동에 기대어서만 튼실한 여론이 형성된다.

민주주의를 위해 정부와 언론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언론을 선택하겠다는 제퍼슨 대통령의 명언은 언론에 의해서만 여론이 형성되고 여론에 의해서만 민주적 지배가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언론은 건전한 여론 형성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에 의해 거짓과 왜곡 여론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견시장에서 언론의 정론 직필과 공정하고 중립적인 보도활동은 건강한 여론 형성의 충분조건이다. 지명도 높은 학자나 논객 등 오피니언 리더의 이름으로 5·16을 무혈혁명이라느니, 유신정권을 산업화를 위한 불가피한 구국이라느니, 4대강 파괴 공사를 4대강 살리기 공사라느니 하며 의견소비자인 국민을 기만한 것이 주류 언론들이다.

천하의 춘원도 친일을 애국으로 착각했듯 오늘의 저명 지식인도 착각과 망조의 의견 자유는 있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인식과 의견을 곡필로 의견시장에 내놓는 순간, 그것은 정신적 오염상품이 되어 대중여론을 오도한다. 목하 대선 의견시장에서 어용 언론인이나 학자들의 곡필과, 독단적이고 편파적인 의견들이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다자대결이니 대세론이란 주류 언론의 허구성 논리가 그 대표적 실례다.

여야 후보가 대선에서 맞붙게 돼 있지 어떻게 다자대결이 가능한가. 그래서 다자대결 때 ㅂ후보가 월등하게 1위다라는 언표는 의견소비자 기만이다. ㅇ이라는 잠재후보가 인기리에 티브이에 한번 출연하니, 지지도 1위가 주르르 무너지는 것이 대세론의 허구성이며, 한국적 천동설과 무엇이 다른가. 5·16이나 10월유신 같은 불법수단으로 용꿈을 이루겠다는 후보를 주류 언론이 띄우기 하려니 온갖 정치수사를 동원하고 곡필을 휘두른다. 이런 추태는, 의견시장을 어지럽히고 왜곡 여론을 선전하여 대선에서 의견소비자 대중의 바른 선택행위를 저해한다. 언론의 자유가 곡필과 아세의 특권으로 착각되는 현금의 언론자유는 경계돼야 한다. 그것이 대선 여론을 심히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래서, 계몽된 의견소비자의 매체 선택과 거부운동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지금의 한국 소비대중은 에스엔에스(SNS)와 연대하여, 충동에 휘둘리는 비합리적 대중이 아니다.
방정배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한겨레 사설] 장준하의 ‘두개골 구멍’, 유신독재 증거인가

[사설] 장준하의 ‘두개골 구멍’, 유신독재 증거인가

진실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결국 모습을 드러내고야 마는가. 유신 시절 박정희 정권에 맞서다 1975년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던 장준하 선생의 타살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가 나왔다고 한다. 이달 초 그의 유골을 경기 파주시의 공동묘지에서 통일동산 ‘장준하공원’으로 옮기면서 검시가 이뤄졌고, 그 결과 머리 뒤쪽에 난 6㎝ 정도 크기의 구멍과 머리뼈 금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검시를 담당한 의사의 1차 소견이 ‘인위적인 상처로 보인다’는 것이니, 그가 숨진 원인은 흉기에 의한 충격일 가능성이 크다.

장준하가 75년 8월17일 경기 포천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을 때부터 타살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경찰은 “높이 14m의 낭떠러지에서 실족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경사 75도의 암반에서 굴러떨어진 사람치고는 몸에 큰 외상이 없었고 사인으로 지목된 ‘오른쪽 귀 뒤의 두개골 파열’이 단순 추락으로 생기기 어려운 상처였던 탓이다. 그럼에도 장준하의 주검은 의사의 간단한 검안만을 거친 뒤 매장됐다. 하지만 장준하는 자신의 몸에 생생하게 남겨진 증거를 통해 37년 만에 진실의 문을 열게 만들었다.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로 확정된다면 이는 유신독재의 가장 추악한 살인 행위로 기록될 것이다. 장준하는 1960~70년대에 숱한 체포와 투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체제에 대항한 사상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 대위로 항일투쟁을 한 그는 1953년 월간 <사상계>를 창간했다. 장준하는 지성계의 구심이 된 <사상계>와 다양한 정치활동을 통해 박정희의 굴욕적 한-일 수교 협상, 베트남 파병, 10월 유신 등에 맞선 치열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특히 그는 박정희의 친일 경력을 줄기차게 제기한 것으로 이름높다. 박정희로선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타살 여부에 대한 분명한 확인과 함께 누구의 지시로 어떻게 이런 일이 진행됐는지 밝혀내는 일이다. 앞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장준하의 죽음을 조사한 뒤, 유일한 목격자가 중앙정보부(중정) 사설정보원이라는 증언을 중정 직원한테서 받아낸 바 있다. 중정이 75년 초 장준하를 상대로 공작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만든 사실도 찾아냈다. 중정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런 의혹들을 낱낱이 확인해 가해자를 찾아 역사적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책무다.

[한겨례]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은 왜 독도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
[곽병찬 칼럼]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칼럼]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군사독재 정권이나 보수정권이 가장 거론을 기피했던 문제는 희한하게도 독도였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면 일쑤 들고나와,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면을 전환시키곤 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이걸 모르고, 정치적 퍼포먼스에 말렸다가 선의의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다.

역사적으로 독도를 지킨 건 국가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조선조 울릉도와 독도에서 왜구를 내쫓은 건 민간인 안용복이었다. 해방 후 독도를 지킨 건 예비역 특무상사 홍순칠과 33인의 민간인이었다. 홍씨는 전쟁을 틈타 독도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정부 지원도 없어, 가산을 처분하고 의연금을 모아 기관총·박격포 등을 구입하고 의용대도 모집했다. 수비대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침범을 두 차례나 격퇴하고, 가짜 해안포를 설치해 일본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문제는 그 열정이었다. 수비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다. 박정희 정권은 부담스러웠다. 홍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씨는 전했다. 학교 조례 때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떠들도록 한 정권이 왜 그러는지 홍 대장은 알 수 없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서도 똑같았다.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독도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홈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우노 소스케 의원이 하나의 메모에 사인을 했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에 따라 성안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도밀약이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노 다니엘 저 <독도밀약>) 결국 미해결 상태를 해결로 간주하고, 독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주일 뒤 1년 넘게 교착됐던 정상회담 예비회담은 재가동됐고, 6월22일 한-일 협정이 체결됐다. 함께 발표된 한-일 어업협정은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했다. 밀약 내용 그대로였다. 공동규제수역 혹은 중간수역 규정은 지금까지 지켜진다. 임기 말에 돌연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일전불사를 외쳤던 김영삼 정부도 독도 인근 해역을 잠정적 조치수역(중간수역)으로 수용했다.

밀약도 밀약이지만,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일본 정부와 민간에게서 막대한 정치성 자금을 받아 썼다.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 이외에 1965년까지 5년 동안 6개 민간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일본 나카소네 정부로부터 40억달러의 차관을 받았다. 그러니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홍 대장을 가만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공세를 높이고 있다. 일왕까지 거론했다. 물론 뒷감당도 못하면서 쏘아대는 말대포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 박종우 선수는 그 피해자였다. 그러니 진정성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 독도밀약의 진상과 파기 여부를 말이다. 그래야 ‘독도 쇼’니 정치 선동이니 하는 소모적 논란을 막고 홍순칠, 박종우 같은 어이없는 희생도 막는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한겨레21] 새마을 비리와 추징금


[줌인] 1988년 비리특위 용두사미되고 2년 복역 뒤 1991년 추징금도 없이 사면… 대체 몇 사람 명의로, 어디에, 얼마나 숨겨져 있는지 오리무중


 

»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이 1988년 7월18일 ‘새마을 비리’ 재판 당시 법정에 출두하고 있다. 그는 5공화국 때 ‘관직 없는 2인자’로 국정을 주물렀다는 의혹을 샀다. 한겨레 자료

 

전경환(70)과 검은 안개. 그의 재산 문제를 비유하는 데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 <일본의 검은 안개>의 제목을 빌려쓰는 게 나아 보인다.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명예회장이 형성하고 은폐한 재산은, 검은 안개 속에 서 있다. 검고 흐릿하며 거대한 실루엣만 보인다. 친형 전두환(81) 전 대통령만큼 흐릿하다. 전 전 회장과 관련한 법원 판결들을 검토해 풀리지 않는 의혹과 질문을 정리했다.

1988년 당시 횡령액 73억여원으로 추정

안개가 잠시 걷히고 재산의 일부가 엿보일 때가 있다. 1988년 전 전 회장의 새마을 비리 재판이 그렇다. 형이 광주 시민을 죽이고 집권한 뒤 동생도 권력자가 됐다. 전 전 회장은 서른여덟이 된 1980년 대통령 경호실 보좌관이 됐다. 1981~85년 새마을운동중앙회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법적 권한을 넘어 돈과 사람을 움직였다. 1985년부터 1987년 2월까지 회장 자리에 앉았다. 1981년 10월6일부터 1987년 7월20일까지 산하법인 ‘새마을신문’ 대표이사로도 재직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바뀌었다. 전 전 회장과 관련한 비리 의혹이 여럿 제기됐다. 1988년 4월16일 전 전 회장이 구속 기소됐다. 횡령 등 모두 8가지 죄목이었다. 새마을신문 간부 등 12명도 함께 기소됐다. 애초 검찰이 기소할 때 횡령액을 73억6700여만원으로 추정했다. 1심 재판 과정에서 횡령액이 76억원으로 늘었다. 대법원은 1989년 5월23일 전 전 회장에게 징역 7년에 벌금 22억원 추징금 9억7200여만원의 선고를 확정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0년 소비자물가지수를 100으로 기준 삼았을 때 1988년은 37이다. 그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24만원(약 4435달러)이었다. 그 시절 76억여원은 거금이었다.

새마을신문에서 빼돌린 돈만 30억8678만8349원(1988년 기준)이다. 국세청이 새마을신문을 특별세무조사했다. 전 전 회장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내부용 장부(비밀장부)와 세무신고용 장부를 따로 만들었다. 경리 담당 직원에게 이중장부 작성을 돕도록 했다. 매출을 누락시키거나, 가상 비용을 장부에 적었다. 세무조사 결과, 이와 같은 매출누락액이 1983~87년 30억8678만8349원에 달했다. 국세청은 전 전 회장이 이 돈을 개인 돈으로 가져갔다고 보고 법률상 ‘상여’로 판단해 1988년 4월 수억원의 근로소득세를 부과했다. 매출을 누락시킨 만큼 법인세와 방위세도 추가로 부과했다. 이길녀(80) 가천 길재단 회장(가천대 총장)한테서 새마을운동 성금 명목으로 1700만원을 받는 등 여기저기서 ‘성금’을 받았다.

‘76억원’을 전 전 회장의 재산의 전부로 보는 전문가는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은 이 재판에서 아예 다루지 않았다. 1988년 7월 여소야대 시절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던졌던 바로 그 13대 국회다.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야 3당이 국회 5공 비리 특위 1차 조사 대상을 추렸다. 야 3당이 이견 없이 먼저 조사하기로 한 비리 의혹만 30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나고 1990년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보수대연합 민주자유당이 태어났다. 광주특위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남겼지만, 비리특위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이들 비리 의혹은 지금껏 검은 안개 속에 있다. 개미집처럼 얽힌 민법과 상법의 난맥 속에서 전경환 전 회장이 횡령한 돈이 어느 개인이나 법인으로 언제 어떤 형태로 흘러간 뒤 어떤 수익률을 올렸고, 다시 그 재산을 누구 명의로 어떻게 감추었는지 확인하기 난망하다. 어떤 학자들은 한국의 발달한 자본주의가 6월 항쟁을 잉태했다고 주장한다. 발달한 자본주의의 민법은 6월 항쟁으로 물러난 독재자의 재산도 곧잘 감춰준다. 약 2년간 복역한 전경환 전 회장은 1991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서 사면받았다. 거액의 추징금과 벌금도 내지 않았다.


토지 매수인에 등장하던 ‘청송원’의 정체


판결 내용을 보면, 검은 안개의 실체가 보인다. 우선 명의신탁이다. 1987년 3월 전 전 회장은 새마을운동본부에서 횡령한 돈을 포함해 80억5500만원을 한 재미동포 사업가에게 꿔줬다. 이 사업가는 작은 회사를 인수한 뒤 화훼사업을 벌이려 했다. 부동산 경매 매물로 나온 상가 건물을 매입하려는데 자금이 모자랐다. 전 전 회장에게 손을 벌렸다. 전 전 회장은 이 사업가가 돈을 다 갚을 때까지 재미동포 사업가의 회사를 직접 경영하겠다고 나섰다. 전 전 회장은 1987년 5월 재미동포 사업가로부터 회사 주식을 다른 사람 명의로 양도받았다. 전 전 회장의 처제 손영숙씨, 전 새마을본부 경리부장 정장희씨 등이 이름을 빌려줬다. 정씨는 전 전 회장과 같이 기소돼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전 전 회장은 1985년 새마을지도자에게 주기로 한 격려금을 빼돌려 당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경리부장 김기수씨 개인 명의로 입금시켰다.

전 전 회장은 1983년 10월7일 기금을 내어 ‘지도자육성재단’을 설립했다. 새마을지도자 자녀 등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의 명분을 내걸었다. 전 전 회장은 이런 명분으로 전국의 명망가와 단체로부터 이른바 ‘성금’을 모았다. 성금의 일부를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경리부장 정장희씨와 총무부장 김진택씨 등 몇몇 간부 명의의 계좌로 빼돌렸다. 이처럼 전 전 회장에게 명의를 빌려준 사람은 가족부터 부하 직원까지 다양했다. 전 전 회장의 아들 전창규씨는 1994년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사업가 이용호(79) 전 에이씨티에스 회장의 딸과 결혼했다. 전 전 회장이 거느린 넓고 깊은 혼맥과 인맥을 생각하면, 전 전 회장의 재산이 대체 몇 명의 명의신탁으로 숨겨져 있는지 추측하기 어렵다.

가족도 검은 안개의 일부다. 아내 손춘지씨는 조용한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 협력자였다. 남편의 비리를 열심히 도왔다. 손씨는 전 전 회장이 횡령한 돈으로 인수한 화훼업체의 이사로 활동했다. 탈세 행위도 도왔다. 전 전 회장은 ‘지도자육성재단’ 회장으로 재직하던 1984~85년 당시 총무부장 김진택씨를 시켜 땅을 사 모았다. 김씨는 땅주인에게 세무서와 협조해 양도소득세가 많이 부과되지 않도록 처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김씨는 땅주인의 탈세를 도우려고 계약서의 토지 매수인에 자신의 이름이나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써넣는 대신 ‘사회복지법인 청송원’이라고 썼다. 손춘지씨가 청송원 이사장이었다. 일종의 부동산 명의신탁인 셈이다.

검은 안개 사이사이, 뜻밖의 인물이 전 전 회장 주변을 스쳐갔던 게 보인다. 박용상(68) 전 헌법재판소 사무차장은 5공화국과 인연이 깊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언론기본법을 만들었다.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보통 ‘언론학살법’으로 불리는 법이다. 당시 서울민사지법 판사인 박용상 전 차장이 법안 작성을 도왔다. 세월이 흘러 1995년 박 전 차장은 서울고법 시절 전 전 회장과 다시 연이 닿았다.


‘언론학살법’ 만든 박용상과의 인연

 

» 새마을 비리 관련자들은 거의 연락이 닿지 않는다. 홍보회사 베컴 회장인 문청씨는 “사건(새마을 비리 재판) 이후 전경환 전 회장과 다른 직원들을 만나본 적이 없어 근황을 모른다”고 했다. 박용상 전 헌법재판소 사무차장은 5공 초기에 국보위를 도왔다. 훗날 전경환 전 회장과 관련된 소송을 맡아 석연찮은 취지로 전 전 회장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진 한겨레 김정효

 

전 전 회장은 부정 축재 혐의가 짙어지자 언론의 주목을 피하려고 1988년 3월10일 자신이 만든 지도자육성재단을 스스로 해산시켰다. 전 전 회장의 비서 격인 김진택씨도 이사의 한 명으로 해산을 결정한 이사회에 참여했다. 그 뒤 비리 수사를 피해 전 전 회장과 김진택씨 둘 다 해외로 도망쳤다. 그사이 재단 쪽은 1988년 5월 청산위원회를 처음 열어 자산 정리 등을 시작했다. 뜻밖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김진택씨가 “법인 해산을 결정한 1988년 이사회 결의는 무효”라며 지도자육성재단을 상대로 이사회결의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시기도, 소송 내용도 모두 뜻밖이었다. 지도자육성재단 쪽은 전 전 회장과 김씨 둘 다 수사를 피해 외국으로 도망쳤고 법인 해산에 오랫동안 반대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며 반발했다. 전 전 회장이 지도자육성재단을 재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으며, 전 전 회장이 법으로 금지된 ‘소송신탁’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아직 청산되지 않은 재단의 자산을 가져가려는 것으로 전 전 회장의 의도를 추측했다.

당시 서울고법 판사로 이 사건의 재판장이던 박용상 전 차장은 1심을 뒤집고 전 전 회장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 제소 동기가 전경환의 피고법인에 대한 장악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독립된 법주체인 피고법인의 내부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하자 그 자체를 문제 삼는 이 사건 제소가 그와 같은 사정만으로 신의칙에 반하는 위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썼다. 박 전 사무처장은 인정사실을 나열하다 갑자기 단 석 줄로 “이사회는 소집 개최된 바 없다”고 판결했다. 사실상 전 전 회장이 재단으로 복귀해도 된다는 취지였다. 박 전 차장의 판결은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어졌고 전 전 회장은 패소했다.

전 전 회장의 재산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와 일했던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간부들일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접근해도 당시 간부 대부분 현재 직업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사업가한테서 돈을 받은 혐의 등으로 전 전 회장과 함께 기소돼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은 당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홍보실장 및 비서실장 문청(68)씨는 홍보업체인 ‘베컴’ 회장이다. KBS에 오래 근무했다. 문청 회장에게 전 전 회장의 남은 재산과 당시 직원의 근황을 물었으나 문 회장은 “재산문제는 전혀 알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전 전 회장도 그 사건(새마을 비리)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 전 회장은 망각 뒤에 숨는다. <한겨레> 1988년 11월10일 1면 기사를 보면, 이창수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주재대사가 1988년 10월31일 국회 5공비리 특위 요청에 따라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재산이 오스트레일리아 안에 있는지에 대해 조사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는 구상서를 오스트레일리아 외무부에 전달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해외 재산 의혹이 여럿 제기됐다. 그해 12월2일치 기사를 보면, 통신발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불법 재산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겨레21>이 지난 7월23일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당시 구상서 전문과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제출한 조사 결과 보고서를 공개하라”며 정보공개 청구했다. 외교부는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8월1일 답했다. 외교부는 외교사료관의 1988년 외교문서 목록을 열람한 결과 전 전 대통령의 재산 조사를 요구하는 ‘공식 외교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대사가 보냈다는 구상서가 공식 외교문서가 아닌 ‘서한’으로 추측되며 이 경우 ‘중요한 일이 아닌 한’ 한국의 외교부 본부에 구상서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답변서도 기록되지 않는다고 외교부는 덧붙였다.


기록되지 않은 ‘조사 협조 구상서’

논리와 명분을 앞세워 5공화국의 역사를 소리 높이 옹호하는 지식인은 많지 않다. 그러나 용서의 논리와 망각의 습관이 전경환 전 회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 주변을 묵묵히 감싼다. 검은 안개처럼.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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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은과의 대화 (47)


[고은과의 대화](47) 중공군 인해전술이 세상을 공포로 채울 즈음 입대 통지서를 받았어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전쟁 같은 거대한 상황은 아무리 많은 퍼즐을 맞춰도 온전히 복원되거나 재현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더구나 민감한 정서와 사유를 가진 인간들에게 도무지 ‘자기주도’적인 전개가 불가능한 불가항력의 상황은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한번 전선으로 떠난 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란 말은 그가 살아서 돌아올지라도 이미 전선과 죽음을 겪기 이전의 그는 아닐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6·25는 선생님은 물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되고 있어야 할 유년의 연장선들을 전쟁이 터진 ‘1950년’쯤에 묻어버림으로써 어떤 파괴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자아의 ‘간극’을 지니게 만든 것 같아요.

고은=6·25 사변 실전에 미국군 장교로 참전한 뒤 탁월한 전쟁기록자가 된 페렌바크의 <한국전쟁>은 폭우가 쏟아지는 신새벽 화천 지역 38도선에서의 북한 인민군 총좌 이학구의 만세소리와 함께 전쟁을 열더군. 그가 전투개시명령을 즉각 실행하는 광경이 인상적으로 그려졌어. 페렌바크의 기록은 한국전쟁 기록물들 대부분이 장군이나 지휘관 쪽인데 대해서 최전방 전투실무자인 직업군인 쪽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실감나더군.

김형수=동시대의 같은 시공간을 경험하면서도 각자가 기억 속에 새겨두는 광경과 인물들은 아주 상이한 것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그런데 그 인민군 최전선의 영웅적인 존재인 이학구가 낙동강 다부동 전선의 어느 날 부하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 자진 항복하는 것을 자세히 그려냈어. 며칠 동안의 백병전으로 잠을 못잔 나머지 곯아떨어진 미군 하사관에게 마치 적군이 아니라 아군을 만난 듯 다가가 잠든 몸을 조심스레 흔들었어. ‘나 항복이야’ 하는 뜻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렸어. 비참한 몰골의 인민군 부하 약간 명도 일제히 두 팔을 들었지.

김형수=주검이 쌓이고 포연이 가시지 않은 전쟁터의 긴장을 순식간에 ‘일상’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코믹하기까지 한 ‘비참’이군요. 왠지 웃다가 울어야 하는 극적인 순간 같습니다. 이학구에 이입된 저의 자아가 ‘나 항복이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섬뜩해지기도 하고요.

고은=1950년 9월 하순이었지. 이미 북한군은 화력도 동나고 병참 지원도 끊어진 상태로 북쪽으로 후퇴하다가 사살되거나 생포되기 시작할 때였지. 더 이상 김일성의 후퇴즉결명령이 유효할 수 없었지. 이런 전세역전의 긴박한 상황을 그리는 나머지 다음과 같은 진술이 빚어 나오데그려.

“한국인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어떤 표준으로 보더라도 용감한 국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은 한순간에 기고만장해지고 순식간에 실의에 빠지는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루는 순교자인가 하면 다음날은 벌써 배신자인 것이다. 그들이 동양의 아일랜드인이라고 불리는 연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강력한 공산주의 훈련을 받지 않고도 인간의 기본적 본성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이 한국 농민의 성격이다.”

김형수=페렌바크의 논평에 흥미로운 점이 있어요. ‘용감한 국민’ ‘배신자’ ‘순교자’ ‘농민의 성격’ 같은 상반된 측면을 파악했다는 것은 그가 꽤 날카로운 직관을 가진 ‘미국인’이란 생각이 들게 합니다. 특히, 논평의 대상으로 삼은 국민이 농민이라는 점도 인상 깊어요. 하지만 그는 김남주 시인이 “주인이 종더러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하자 종이 그 낫으로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 버리더라” 하던 반응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농민, 종, 혹은 농본주의의 순수성이 백열하는 분노와 열정, 결단, 포기 같은 것으로 전환되는 찰나의 속성을 상상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고은=순둥이가 독종이라는 말이 있지. 페렌바크의 이 진술은 비단 이학구가 개전 당시의 영웅적이던 기상을 후퇴 시기의 비굴한 행색에 대조시킨 것만도 아니고 인민군 쪽만을 지적한 것만도 아니고 남과 북의 한국인을 총칭하는 셈이지. 극한상황에서의 인간에 대한 고찰에는 국적이나 인종 및 민족의 혈통 따위로 분류하는 것은 철딱서니 없어. 하지만 그 전쟁 주도국의 장교에게 그 당시 헐벗은 산야와 초라한 지붕의 납작한 농촌 취락의 풍경 속에 들어 있는 문맹자인 한국인을 박대하기 일쑤이지.

▲ 마을 사람들은 나에게 술을 먹였고 ‘무운장구’ 어깨띠를 걸어주었어
김형수=응축된 굴욕과 오래 견디는 자의 미덕이 품고 있는 대지(大地) 같은 것을 모르는 이방인의 무례함 아닐까요? 북·미 회담이나 외교전을 둘러싼 이해의 ‘결여’도 이 같은 무지와 무관치 않을 것 같고요.

고은=이런 현상은 미국뿐 아니라 대부분의 참전국 군인의 시각을 대표하는지 모르지. 과연 나이 차이가 많은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한참 연하인 미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위상은 은인 이상이고 상전(上典) 이상이었어. 서울 수복 당시 맥아더가 동경에서 날아와 김포 비행장에 도착해서 아직 불타고 있는 전투 직후의 서울 국회의사당 건물 안에 들어설 때 그는 구세주였지. “대통령 각하, 자비로운 하나님의 덕택으로 위대한 희망과 인류의 열망을 밑받침으로 하여 싸운 우리 군대는, 즉 유엔군은 이 오래된 한국의 수도를 해방시켰습니다. (…) 유엔군 덕택으로 이제부터 각하께 귀국의 헌법에 의한 의무를 더 잘 완수할 수 있는 귀국의 정부가 있는 자리를 돌려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라는 이른바 ‘덕망 높은 유시(諭示)’를 내렸지. 그뿐이 아니지. 그는 주기도문까지 읊어대니 국회의사당 참석자 모두가 따라서 읊었어. 그는 골수의 성공회 신도였어.

김형수=‘한국전쟁과 맥아더의 주기도문’입니다. 일본 천황의 항복사인을 직접 받아낸 전승국 사령관의 종교적 도취라고 할까요?

고은=과연 맥아더는 아시아의 황제였어. 그의 아버지가 지난 시기 미국이 스페인을 몰아낸 뒤의 육군 중장으로 필리핀 총독을 지냈으나 그 아들이 아시아 제패의 상속자가 된 셈이네그려. 이 필리핀의 미국 통치를 국제적으로 정당화할 때 일본의 조선반도 지배를 승인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이 드러난 것이 태프트-가쓰라 밀약 아닌가. 그게 네가 조선을 먹어라, 나는 필리핀이면 된다는 흥정이었어. 그것이 을사늑약이고 ‘합방’이니 한반도 현대사의 원초적 치욕으로 된 것이네. 맥아더는 일찍 별을 단 군인의 행운 속에서도 참호 속에서 단련된 사람이지. 이 점에서 그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더 수고가 많은 운명을 맡은 반면 그가 장군일 때 아직 영관급이던 ‘미국 부르주아지’의 미덕을 갖춘 아이젠하워는 유럽 전략에 나섰고 그는 드물게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 되는 순풍의 운명을 누린 것이네.

▲ 소집 일주일 뒤 신체검사를 했는데 체중미달로 불합격 처분이 났지
김형수=제레미, 다이아몬드 같은 학자들이 ‘제노사이드’ 같은 종족살상을 인간의 한 특성이라고 진단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북진, 만주 수복 같은 자극적인 상상이 현실이 될 뻔했을 수도 있다는 측면과 2차대전 전후 미국의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빚어내는 주변부 국가의 ‘피 흘리는 현실’이 몸서리쳐지는군요. 지금도 핵 문제를 둘러싸고 예민하게 작동하는 외교전의 긴장이 진행 중인 현실이라는 점도 이 틀에서 바라다본다면 좀 더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고은=맥아더는 중국 본토인 만주 폭격과 대만의 국부군까지 동원하는 동북아시아 해방을 지향함으로써 휴전 논의를 제압한 확전을 거듭 확인하는데 끝내는 트루먼에게 불복종으로 나아갔어. 아이젠하워는 유럽에서의 전승국 원수로 군인생활을 마감한 뒤 컬럼비아대 총장 노릇도 하며 비군사적인 정치경륜을 이루었지만 맥아더는 영원한 군인이고 돌이킬 수 없는 아시아의 맹주였다가 끝내는 해직당하고 말지. 후임 사령관 리지웨이는 아무런 예상도 준비도 없이 덜컥 상관의 해임에 황송하고 민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네. 물론 그는 고집쟁이 맥아더와는 달리 확전은 고사하고 압록강까지 밀고 갈 충동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현상 고착으로 가닥을 잡았겠지. 이로써 남한의 북진통일의 쾌감은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북위 38도선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휴전선 체제로 되었지. 그것이 휴전을 앞둔 필사적이고 결사적인 혈전으로 한반도 허리를 피로 물들였어. 빼앗고 빼앗기기가 몇 십 번이고 반복되는 고지탈환전에서 쌍방의 병력은 소모될 대로 소모되었지.

김형수=스포츠는 전쟁을 대신한다고 하잖습니까? 올림픽을 보면서 드는 생각인데, 인간은 왜 이렇게 전의(戰意)를 연소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고은=한숨을 내쉬어야겠네. 도대체 한민족의 남과 북이 아니라도 인류는 왜 집단으로 싸우고 왜 집단으로 죽여야 하는가. 저 3만5000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의 행위는 없었다 하네. 그 뒤의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다른 종족으로 갈라져 형님인 네안데르탈인의 원시 평화를 크로마뇽인이 파괴한 이래 전쟁은 인류사의 영원한 중독이 된 모양일세. 그 전쟁 중독이 기원전 5000년경에는 전염병이 되어 20세기에 이르는 전쟁사가 되었네그려. 얼어붙은 달밤에 피리소리로 괴성으로 밀려오는 중공 인해전술도 무작정이 아니라 철저한 고전적 육박전에 의해서 한반도 지형에 알맞게 진행되었어. 승승장구의 미군이 당황하며 후퇴를 계속 감수했지. 수복된 직후 마음 놓을 사이도 없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다시 한 번 세상을 공포와 불안으로 채우기 시작했을 때 나도 다급한 징병 입대 통지서를 받았어.

김형수=징집, 그로 인한 참전, 그리고 죽음과 삶과 폐허, 이런 문제들은 움베르트 에코의 지적처럼 20세기 이후 심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고은=우리 마을에서 장행회(壯行會)를 열어서 나에게 술을 먹였고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어깨띠를 걸어 주어서 군산 시내 중앙국민학교로 소집되어 갔어. 일주일쯤 몇 백 명이 대기하고 있었어. 그런데 다시 신체검사를 했어. 일차 검사는 질병 유무만 간단하게 구두 확인하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군의관들이 실시한 검사였네. 여기서 나는 체중미달로 무종(戊種) 불합격 처분이 되었어. 그 당시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체중감량을 위해서 아주까리기름을 먹고 설사를 하는 놈도 있고 제 손가락을 칼로 쳐서 총의 방아쇠를 당길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놈도 있었지. 심지어 한쪽 눈을 송곳으로 찔러버리는 놈도 있었어. 그런 경우는 조사한 뒤 형무소로 가야 했어. 나는 본디 약골이므로 체중 35㎏쯤으로 목숨을 부지해온 터라 뒷날의 국민방위군 소집의 그 무차별동원이었다면 몰라도 정규검사로는 입대부적격자일 수밖에 없었어.

김형수=지금의 모습을 보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6·25의 전선에 투입될 뻔한 시골 마을의 35㎏짜리 체중미달의 소년이 겪게 되는 실존적인 불안과 선택 불가능한 상황이 오늘날의 첨단 디지털 문명의 대도시적 빠른 템포에 겹쳐지면서 아득한 시간 너머의 판타지처럼 느껴져요. 무운장구라는 어깨띠를 달고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소년의 운명이 바로 그 21세기 유년의 몸이라니 말입니다.

고은=1951년 1월 중공군은 서울에 쳐들어왔어. 그럴 뿐만 아니라 북한 피란민들이 군산에도 몰려와 인공 3개월간 폭격당한 시내 폐허 위에 임시 천막을 치는 피란민촌이 생겨났지. 그들 역시 다시 남쪽의 목포나 부산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토착주민이나 피란민 모두가 하루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는 상태였네. 전쟁은 전선과 후방이 함께 치러내는 총력행위였어.

김형수=선생님 댁에서는 대책이 없었습니까?

고은=아버지가 가족회의를 열었어. 가족회의라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나와 아우뿐이었어. 거기에 숙부 두 분도 불려와 있었지. 거기서 할아버지의 분부가 있었는데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와 장손인 나만이 부산 피란을 떠나고 그 밖의 가족은 집에 있기로 한 것이었어. 다음날부터 어머니는 찹쌀 세 말을 볶아서 가루로 만들었어. 아버지는 이웃 마을 미제부락에 소개되어 온 대법원 행정처 비서실장인 김기련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떠날 선편을 물색했지. 김기련은 내 중학교 은사인 김기태의 친형이기도 해서 진작 나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나에게 카뮈라는 불란서 소설가를 알려주기도 하는 철학교사였어. 그이는 마누라가 앓아누운 뒤 부엌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불이 활활 타는 광경에 황홀해하며 이런 불길을 보면 이마누엘 칸트가 생각나는군, 하고 말하기도 했어.

김형수=피란을 떠나기 위한 가족회의와 활활 타는 아궁이, 어처구니없게도 이마누엘 칸트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억이 왠지 마르케스의 말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만 그리면 초현실이 된다”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은=며칠 뒤 군산 째보선창에서 돛이 둘 달린 목선 일종선 한 척을 목돈을 주고 빌릴 수 있었는데 김기련 부부와 우리 부자 그리고 군산의 법원 판사 두 가족의 부부가 부산행의 일행이었어. 중공군은 수원까지 점령한 때였지. 아버지의 옷 안에 만든 속주머니와 나의 저고리 안에 어머니가 새로 달아 준 깊숙한 속주머니에는 각각 비상금 뭉치가 들어 있었어.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각각 찹쌀가루 푸대 하나씩 맡았어. 서울의 1·4후퇴 뒤이므로 1월 하순의 혹한 속이었지. 군산 째보선창에는 돛을 내린 빈 돛대들이 솟아 있는 어선과 상선으로 꽉 차 있었어. 그 피란선을 탈 수 있는 피란민들은 아직은 거지꼴이 아닌 지역의 부유층이거나 식자층이었지. 요컨대 다시 인공시기가 되면 1차로 희생될 우익 신분이었어.

김형수=한 편의 소설 같아요.

고은=이제까지 바다 위에 떠 있는 경험이 없던 나는 둔탁한 돛폭이 오른 다음 선창의 빽빽한 선체 사이를 밀쳐내며 빠져나가서 바다 쪽으로 나갈 때 그 비현실적인 이동의 기대불안으로 내 가슴은 설레었어. 진작에 마을의 선배인 김기호와 함께 군산 장항 사이의 연락선을 타고 충남 서천의 김기호 이모 댁을 간 적이 있었지만 난바다로 나가는 배타기는 처음 겪는 일이었어. 한겨울의 격렬한 서북풍에 파도는 집채 덩어리로 너울져서 그 파도더미 사이의 이랑을 오르내리는 배는 아이들의 종이배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어. 노련한 두 어부와 심부름꾼 총각 말고는 도합 8명의 온순해진 피란민은 배가 금강의 탁류 밖으로 나아가는 동안 벌써 격랑에 의한 멀미를 앓기 시작했지. 판사 부인들은 뱃전에 대고 토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빈속의 것까지 토해내는 구토에서 헤어나지 못했어. 사나운 서북풍과 사나운 파도더미도, 지나치는 무인도들의 소나무들도 마구 울부짖어대고 있었어.

김형수=선생님에게 ‘난바다’의 경험은 전쟁의 안팎을 넘나드는 떠남의 입구였군요. ‘무인도의 소나무들도 마구 울부짖어대는….’ 한 사람의 시인이 왜 독자적인 정부여야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선택 불가능성 앞에 던져진 개인들의 고통 모두를 ‘노래’하는 자이기 때문이므로 그 기억은 어떤 전쟁사의 기록보다 우선하는 존재 보편의 진실을 내장하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고은=군산항 밖의 바다에는 작은 무인도가 몇 개 떠 있는데 그 가운데 노래섬도 있지. 겨울 내내 소리를 내는 섬이라 해서 그런 멋진 이름이 붙었는데 바로 그 겨울의 절규 오열 같은 소리야말로 서해의 난바다 어부들이 죽은 뒤의 원혼으로 울부짖는 노래라 해서 노래섬이 되었는지 몰라. 아마도 이 노래섬의 정신이 내 소년의 정신에 이입되어서 내가 선무당 몇 십 년의 시인 노릇을 하는지도 모르겠네.

김형수=알 것 같아요. 그리고 전쟁과 퍼즐조각 같은 개인사의 고통스러운 함수가 쉽게 잊히는 사회는 바다의 기억을 잊은 자들이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는 뱃멀미 같은 거란 생각이 듭니다.

고은=피란선은 그날 오후 여섯 시간쯤을 나아가서 비응도라는 어촌 5가구의 섬에 도착할 수 있었어. 피란민 전체가 멀미 구토의 연속으로 거의 시체상태로 늘어져 있다가 배가 뭍에 닿자마자 기적처럼 정상으로 돌아오더군. 인류의 저 아득한 생명 근원에서 바다의 기억이 살아남아 있건만 그동안 뭍에서의 인류로 이어오는 동안 뭍이야말로 생명의 본원인 사실이 바로 그 바다 몇 시간 위의 지독한 멀미로부터 뭍의 정상으로 돌아온 사실과 맞닿아 있는지 모르지.

김형수=농촌에서 자랐으면서도 바다에 대한 묘사는 정말 압권입니다. 언젠가 제주도 시절의 산문을 보고 놀랐었는데 미학적 비밀이 ‘난바다 정신’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가령, ‘봄비’ 같은 초기작만 보아도 액체의 언어로 고체의 심연을 그리는 귀기(鬼氣)를 만들어냅니다. 계속 듣고 싶은데 또 다음주를 기다려야 할 시간이 되고 말았어요.


<봄비>

물결이여 네가 잠든 물 우의 고요에
봄비는 내려와 죽는다.
물 우에 물속의 어둠이 솟아올라도
물결이여
네가 잠든 물 우에 받는 봄비로
먼 데 바위까지도 봄이게 한다.
아 너와 내가 잠든 물 우의 여기에도
한 덩어리의 바위가 침묵으로 떠오르는가.
허나 봄비는 내려와 죽는다.


<고은>

입력 : 2012-08-10 19:47:38수정 : 2012-08-10 19: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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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9일 목요일

[프레시안 사회] 최악의 녹조

불과 한 달 반 만에 찾은 창녕·합천보 일대 낙동강은 물감을 뿌려놓은 듯했다. 연녹색 도화지 위에 형형색색의 무늬가 마치 쇠고기의 마블링처럼 그려져 있었다. 강 근처에서 손으로 물을 휘휘 저으니 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십 종의 녹조류가 묻어나왔다. 악취도 심했다. 구제역 지역에서 나오는 살처분 냄새가 났다. 생수로 손을 씻었으나 악취는 가시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오늘 아침에 확인해보니 이렇게 돼 있더군요."

임희자 마산·창원·진해환경연합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전날만 해도 녹조가 썩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녹조가 썩고 있는 건 강에 나타난 마블링 무늬로 알 수 있었다. 장하나 민주통합당 의원은 "이렇게 상황이 심각한지 몰랐다"며 "지난번(6월 말)에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낙동강 등 전국 하천이 녹조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영산강부터 낙동강, 이젠 한강 중류까지 녹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근래에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이러한 원인을 두고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폭염을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반면, 환경단체는 4대강 사업으로 설치된 '보'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다.

정부가 폭염을 원인으로 꼽는 이유는 북한강 상류와 한강 중류에서 발생하는 녹조 현상 때문이다. 북한강과 한강은 4대강 사업과 관련이 없는 지역이다. 이를 두고 녹조 현상은 4대강 사업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 합천보 인근 낙동강. 녹조가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하늘만 탓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9일 장하나 민주통합당 의원이 창녕·합천보를 찾은 자리에서도 정부는 똑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이 자리에서 김상배 낙동강유역환경청장은 현재 발생하는 녹조 현상 원인으로 '폭염'을 꼽았다.

김 청장은 "최근 낙동강 하류(달성보, 합천·창녕보, 창녕·함안보)와 중류(낙단보, 구미보, 칠곡보, 강정고령보)에서 남조류(독성 녹조)가 발생했다"며 "상류 지역인 상주보만 제외하고는 낙동강 7개 보 모두에서 남조류가 발생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김 청장은 "현재의 녹조 현상, 특히 남조류 현상은 수온 상승으로 발생한 것"이라며 "30도가 넘는 수온이 유지되는 이상 녹조 현상은 지속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수온이 상승한 이유를 두고 김 청장은 "장마 기간이 짧았고 무더위가 지속된 게 가장 큰 원인"이라며 "과거 3년의 평균에 비해 비가 79% 왔고, 이에 더해 폭염으로 수온은 27도에서 29도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반면, 장하나 의원은 녹조 현상의 원인으로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보를 지적했다. 보가 설치되면서 물이 고이게 됐고, 부영양화가 심화해 녹조현상이 발생했다는 것. 장 의원은 "1994년 당시 지금보다 훨씬 심한 폭염이 있었을 때도 낙동강 하구에만 녹조가 발생했다"며 "지금과 같은 녹조 현상은 전대미문"이라고 주장했다.

장 의원은 "낙동강 인근에서 수십 년 넘게 사시던 분들도 이런 녹조 현상은 처음 본다고 혀를 두른다"며 "그런데도 정부는 폭염 탓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 의원은 "4대강 사업이 있고 나서, 지금과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면 정부는 4대강 사업도 지금의 원인 중 하나로 판단하고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며 "하지만 하늘 탓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철재 환경운동연합 초록정책실장도 "보가 설치되지 전에는 녹조 현상이 낙동강 하류에만 발생했다"며 "하지만 보가 설치된 이후엔 정체 현상이 심화해 녹조 현상이 중류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온 상승과 관련해서도 이 처장은 "물이 흐르면 수온은 자연히 내려간다"며 "하지만 보로 인해 물이 정체하니 수온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처장은 "더구나 낙동강 바닥에 쌓여있는 모래를 다 긁어내 물을 필터링 하는 장치도 사라진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녹조 현상이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좌관 교수 "4대강 사업과 녹조현상과 상관관계 있다"

환경단체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는 보고서도 발표됐다. 9일 김좌관 부산 카톨릭대 환경공학과 교수가 발표한 '4대강 녹조 현상의 원인과 문제점'이란 보고서를 보면 4대강 사업이 지금의 녹조현상과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 녹조가 썩어 마불링을 띄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보고서를 보면 낙동강의 경우, 1987년 하구둑 완공 이후 하류구간 유속이 낮아지고 체류시간이 길어지면서 조류번성이 큰 문제가 되어 왔다. 하지만 현재 강정보나 달성보 지점에는 조류현상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 이유를 두고 김 교수는 강정보나 달성보 지점에서의 총인농도(녹조현상을 발생시키는 부영양화 유발물질 농도)가 높지만 강 흐름을 막는 큰 구조물, 즉 보가 없어 조류발생을 유발할 수리학적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이에 현재 낙동강 중류부에 발생한 녹조현상은 최근 완공된 보로 인해 긴 체류시간이 보장되면서 생긴 걸로 김 교수는 파악했다. 김 교수는 현재 녹조현상은 보의 수문을 개방해 하천 흐름이 과거와 같이 이뤄진다면 억제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 교수는 북한강에서 발생한 녹조현상을 근거로 "조류가 빠르게 증식하는 조건이 갖춰졌을 경우, 체류시간이 녹조발생을 결정하는 걸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녹조현상의 주요 발생원인은 높은 수온과 높은 총인농도로 알려졌지만, 남·북한강 중 총인농도가 낮은 북한강에서 먼저 조류가 대규모로 발생했다는 게 근거였다. 북한강에 설치된 7개의 댐이 남한강보다 상대적으로 긴 체류기간을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한강, 낙동강 등 우리나라 하천은 충분한 체류시간만 보장되면 강에서도 녹조가 언제든 번성할 수 있는 수질여건을 가지고 있다"며 "강에 보를 건설해 체류시간을 증가시키는 일은 녹조가 확산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여건조성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 정부가 안타깝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유속과 관련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공정옥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대구 가창댐과 운문댐 인근에서는 녹조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낙동강 중류에서는 녹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공정옥 처장은 "이것만 봐도 녹조현상은 단순히 폭염 등 하나의 원인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며 "우리 역시 4대강 사업 하나 때문에 녹조현상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공정옥 처장은 "폭염도 녹조현상을 일으키는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또한, 4대강 사업도 이번 녹조현상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정옥 처장은 "하지만 정부는 한사코 4대강 사업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며 "원인을 알아야 문제도 해결하는데 아예 4대강 사업은 빼놓으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공정옥 처장은 "만능이라고 이야기했던 4대강 사업을 부정해야 하니 현 정부로선 환경단체의 지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며 "하지만 현재의 문제는 매년 반복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임에도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 정부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 녹조현상으로 죽은 물고기. ⓒ프레시안(허환주)


ⓒ프레시안(허환주)


▲ 녹조현상이 심화돼 녹조가 썩고 있다.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합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