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한겨레] 박노자 한국의 안과밖 "최악의 대통령"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이 글을 쓰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해야 하겠다. 실은 나는 대통령을 누가 하는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 대통령은 누가 되든 1997년 이후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한 번도 바뀌거나 수정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 문제가 된 철도를 보라.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바꾸는 등 대자본이 철도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최초로 만들어낸 것은 노무현 때였다. 또 고속철도 여승무원의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다단계 간접 고용도 노무현 때에 이루어진 것이고, 여승무원들이 2006년 이후로는 몇 년간 이에 맞서서 투쟁을 했는데도 ‘민주적’ 정권으로부터 받은 것은 탄압밖에 없었다. 2009년에 철도 파업을 탄압해서 169명의 해고자를 만든 것은 이명박이었다. 오늘날 파업은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 민영화 입법 철회를 위한 최초의 철도 파업은 김대중 시절인 2002년에 이미 일어난 바 있다. 과연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김대중이나 노무현과 같은 자유주의 정권과 그 후의 극우정권의 차이는 그렇게까지 클까?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정책의 핵심을 대통령이 주체가 되어서 정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재벌들의 두뇌집단들과 해외 대자본의 요구를, 당선에 성공한 정객들이 알아서 가감해서 경제정책이라고 내놓는 것이다. 사실 외교정책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통령이 햇볕정책, 곧 햇볕이 행인으로 하여금 옷을 벗게 하듯 북한의 시장화를 유도하겠다는 차원에서 제한적인 대북 경협 정도 할 권한까지 있다. 노무현 초기처럼 중국에 대한 친화적 제스처를 할 권한까지 부여돼 있으며, 또 워싱턴의 천자(天子)가 이라크 출병과 같은 일을 명령할 때에 내색을 하여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을 자유도 있다.

그러나 일개 후국(侯國)의 후왕(侯王)으로서는 제국의 출병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경쟁 제국인 중국에 제스처 이상으로 정치·군사적으로 가까워진다는 것은 대통령이 누가 돼도 거의 상상 밖의 일이다. 행여나 다시 한 번 노무현의 적자들이 정권을 잡아도, 예컨대 남북 공동의 군축을 해가면서 북한과 군사·안보협력을 시작하는 등 실제적인 미·일·한 삼각 동맹의 틀 깨기는 지난할 것이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기존의 보수적 기본틀이 남아 있는 한, 곧 어떤 급진적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정치·군사적 미 제국에의 복종은 우리에게 그저 존재의 기본 조건일 뿐이다. 그러기에 대통령이 누가 되고 대통령이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일희일비할 것이 있는가?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지난 25년을 통째로 돌아보면, 이 정도로 시대착오적이고 비상식적인 권력이 태어난 것은 처음인 듯하다. 사실, 이와 같은 수준의 극우정객이 정당 당수, 그리고 대통령 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 최고 선거직을 지향하는 정치인의 ‘품질’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박근혜의 지난 1년의 집권기간이 보여준 것은 극우 정객 출신의 대통령치고도 박근혜가 너무나 독보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지난 25년을 통째로 돌아보면, 이 정도로 시대착오적이고 비상식적인 권력이 태어난 것은 처음인 듯하다. 사실, 이와 같은 수준의 극우정객이 정당 당수, 그리고 대통령 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 최고 선거직을 지향하는 정치인의 ‘품질’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검증 시스템이 작동되었다면, 차후 보수에도 재앙이 될 ‘박근혜 집권’이라는 이름의 필패의 희비극을 사전에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에 비하면,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에 나선 노태우나,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하려고 했던 김영삼마저 통일지향적 진보정치인으로 보일 정도다. 촛불 사태에 밀려 대운하 등 가장 망상적인 계획들을 그래도 철회하거나 대폭 수정한 이명박은 소통할 줄 아는 정치인으로 보일 정도다. 사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 곧 재벌의 대주주들은 박근혜의 대통령직 수행 능력 수준이 다 들통난 지금쯤에 그들의 마름 격인 그녀를 해임해야 하지 않을까를 신중히 고려해볼 만하다. 이렇게 가다가는 종국에 가서는 그들의 부까지 ‘안녕’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전임자인 이명박의 대북 정책은 완패했다.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어간 햇볕정책을 포기했는데, 남한 보수 일각에서 기대했던 바와 정반대로 북한은 위축되긴커녕 정권 세습의 작업을 비교적 원활하게 하여 새로운 권력체계를 공고히 하는 한편 중국 투자와 대중국 무역,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자본주의라고 할 개인 소기업의 발전에 힘입은 경제성장을 계속해왔다. 이 와중에서 집권한 박근혜는 마음만 먹었다면 전임자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자신처럼 선조의 후광에 기대는 평양의 새로운 권력자와 건설적 관계의 수립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적대적 대북관계로 일관했으며, 대북관계 개선 대신에 과거의 ‘북풍’과 다를 바 없이 이북 문제를 계속해서 국내 정치에 이용해왔다.

정상적 대북 협력관계를 지속해온 노무현은, 거기에 힘입어 미국의 후국 신세를 비록 벗어나지 못했다 해도 그나마 동북아 균형자론 등 미국과 중국 사이의 등거리 외교의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제스처로 중국에 호소라도 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박근혜는 대북대립노선으로 내달리는 이상,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지금과 같은 중-미 갈등에서 한반도 주민들의 실질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으로 일관하여 대륙(중국·러시아 등)으로부터의 소외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는 대일관계에 있어서는 겉으로는 강경자세를 취함으로써 미·일·한 삼각 동맹에 사실상 올인한다는 사실을 덮으려 하지만, 극도로 편향된 대외정책이라는 것을 과연 감출 수 있겠는가?

박근혜의 국내 정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대민(對民) 투쟁’이라고 할 만하다. 신자유주의적 의제로 일관하는 것은 김대중이나 노무현과 별 차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노동계에 그때그때 양보도 하고 대화도 진행할 줄 알았던 김·노와 달리 그야말로 소통도 대화도 없는 무식한 탄압일 뿐이다. 역대 정권 중에서는 전교조와 갈등하지 않았던 정권은 없었지만, 박근혜는 전교조를 아예 법외노조로 만들어 대한민국을 산업화된 형식적 민주국가 중의 유일한 교원노조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등 대표적 공공부문 노조에 대한 탄압의 압권은 바로 이번의 철도 파업에 대한 파쇼적이라고 할 정도의 초강경의 대응이었다. 박근혜는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파업을 벌이는 노조의 지도부를 무조건 무더기로 구속하지 않는다. 참고로, 박근혜가 영국의 극우 국무총리 대처를 롤모델로 삼는다고 하지만, 대처마저도 1984~1985년의 광업노동자 파업 투쟁을 탄압하면서 그 지도부를 구속한 적은 없었다.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3명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20세기 후반기의 유럽역사상 가장 치열한 투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박근혜는 과연 ‘자유민주주의’ 의미를 알기나 하는가? 노조에 대한 살인적 배상금 청구, 가압류, 노조원 직위해제와 해고 등이 예사인 대한민국에서마저도 박근혜식 ‘대노(對勞) 전투’는 이미 비상식으로 보일 정도다. 그 수많은 ‘안녕들’ 대자보에서 철도 파업이 자주 언급되는 것은 과연 우연인가?

보수화돼가던 학생층까지 이제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에서 나타나듯이 저항모드로 급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최악의 대통령이 된 박근혜를 여태까지 밀어준 재벌가 등 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들은 이제라도 그 오류를 반성하여 선후책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박근혜는 커다란 오판을 한다. 그가 실제로 지향하는 것은 일종의 ‘반쪽 파시즘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북한과 연계했다”고 해서 가장 규모가 큰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을 마구 잡아 가두어도 되는 사회이면서도 아직도 물고문과 전기 고문, 그리고 학도호국단과 신문에 대한 보도지침이 없는, 그런 ‘중간적 파시즘’ 사회 말이다. 그러나 파시즘 건설에서 ‘중도’는 없다. 박근혜가 그 부왕(父王)의 말기와 같은 전체적인 파탄을 아예 각오하고 전체적인 유신의 부활로 가지 못하는 이상 초강경 ‘대민 투쟁’은 그저 민중의 커다란 반격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거야말로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보수화돼가던 학생층까지 이제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에서 나타나듯이 저항모드로 급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최악의 대통령이 된 박근혜를 여태까지 밀어준 재벌가 등 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들은 이제라도 그 오류를 반성하여 선후책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민주노총 난입까지 막나가는 정부...


정보기관 포함 정부기관이 동원된 선거부정 수사를 수수 방관하거나 방해하고, 종북몰이로 어린 백성들 선동질 하고, 대국민 사기성 대선공약에, 이제는 민주노총 난입에 이르기까지 막나가는 이런 정부를....어찌해야 할 지.... 


[한겨레 사설] 민주노총 난입,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경찰이 민주노총 사무실을 부수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과연 이것밖에 없었던 것일까 하는 착잡함이다.
이런 극단적인 방법은 다른 선택지가 완전히 막혀 있을 때나 쓰는 거다. 그런데 철도파업은 제3의 해법이 얼마든지 있다. 정부는 철도를 민영화하지 않겠다는 거고, 노조는 못 믿겠다는 거다. 그 골만 메우면 된다. 변재일 민주당 의원이 제출한 철도사업법 개정안은 그런 해법 중 하나다. 철도에 경쟁체제를 도입하더라도 민영화 금지를 법에 못박아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자는 거다. 교수들로 구성된 4개 학술단체가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어 대화하자고 제안한 것도 경청할 만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중재안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고 초강수만 구사하는 걸 보면, 민영화를 추진하겠다는 게 본심이거나 아니면 이번 기회에 민주노총을 짓밟아 버리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민주노총 강제진입은 1979년 신민당사 난입사건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그해 8월 신민당 당사에 무장경찰이 들어가 농성하던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노동자 172명을 무자비하게 강제연행했는데, 그때 동원된 경찰이 1000명이다. 이번엔 무려 5500명을 넘어선다. 당시 신민당 의원들이 경찰에게 멱살이 잡혀 끌려 나가는 등 봉변을 당했는데, 이번에도 야당 의원들이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농성하던 김경숙씨가 투신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번 진압의 경우도 건물 구조가 복잡하고 좁은 계단과 낡은 난간이 있어 큰 불상사가 날 수 있는데도 그냥 밀고 올라갔다.
민주노총은 제1야당 못지않은 상징적인 곳이다.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며 심장부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감히 강제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경찰이 들고 간 것은 노조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이지 민주노총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아니었다. 민주노총과 노동운동 자체를 적으로 돌리고 말살하겠다는 선전포고로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건물의 주인은 경향신문사다. 신문을 제작하기 위해 기자들이 회의하고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할 시간이었다. 경찰이 유리창을 깨고 최루액을 뿌리며 건물 전체를 아비규환으로 만든 것은 언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무시한 망나니짓이다. 신민당사 난입은 유신정권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이제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정부가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건, 정권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의 비극이다. 부디 박근혜 대통령이 이성을 찾기 바란다.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9.7%, 153만표’가 속았다면

[한겨레 아침 햇발] 김이택 위원 글

9.7%, 153만표'가 속았다면


1년 전 오늘, 서울 역삼동 한 오피스텔 문앞을 지키던 민주당 사람들이 철수했다. 서울경찰청 디지털증거분석팀은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컴퓨터를 넘겨받아 오후부터 분석을 시작했다. 그때 건네진 노트북과 데스크톱이 1년 내내 우리 정치판을 뒤흔들 판도라의 상자가 되리라고는 아마 국정원 사람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 "대통령 사퇴" 주장까지 불러왔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수구보수언론의 응원 속에 "대선 불복"이라며 천주교 신부를 처벌하고 야당 의원은 제명하라고 난리다.

그러나 찬찬히 따져보면 "부정선거로 당선됐으니 사퇴하라"는 신부들과 장하나 의원의 주장은 틀린 데가 없다. 문재인 의원이 최근 펴낸 책에서 거론했듯이 한 여론조사기관 대표는 "두 후보 지지율이 뒤집혔다가 경찰 발표 뒤 박 후보 우세로 복귀했다"고 했다. 리서치뷰 설문조사 결과는 '부정선거'였음을 수치로 말해주고 있다. 유권자 2000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 중 9.7%는 '경찰이 사실대로 밝혔다면 문재인 후보를 찍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를 박 후보 득표수(1577만표)로 환산하면 153만여표다. 지난 11월19~20일 조사니까 그 이후 2200만건의 트위터글 공개 상황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락을 뒤집고도 남을 만한 수치다. 여기에 트위터글 자체가 당시 부동층 유권자들에게 미친 영향도 추가돼야 하니 부정선거가 맞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도움받은 것 없다" "댓글로 당선됐단 말이냐"며 국민을 바보 취급하려 들었으니 사퇴 주장은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 행사다.

따지고 보면 선거부정이 국정원만의 책임도 아니다. 10월8일 정문헌 의원의 첫 '엔엘엘' 발언에서 12월14일 김무성 의원의 대화록 낭독까지, 선거 후반으로 갈수록 판세가 흔들리자 국정원은 물론 여권이 총동원돼 '종북 시나리오'를 써댄 의혹이 짙다.

그러니 장 의원과 박창신 신부가 못할 말을 한 게 절대 아니다. 시효가 지난 탓에 법적으로 '선거 불복'을 할 방법이 없을 뿐이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퇴진론을 불러온 건 바로 박 대통령 자신이다. 선거부정도 그렇거니와 공약 자체도 '사기성'이 농후하다. 후퇴한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만이 아니다. 후보가 되자마자 첫 방문지로 전태일 흉상을 찾았던 그가 전교조·전공노 탄압에 이어 철도노조까지 퇴로 없이 몰아붙이는 걸 보면 '100% 대한민국' '국민 대통합' 약속이 지켜지리라고 믿은 사람이 바보다.

정보기관엔 정치공작 부활시키고, 검찰엔 권력의 시녀 되길 강요하며, 역사 교과서는 유신코드에 맞춰 뜯어고치고 있다. 대선 전 "후보 주변 5.5m 안에 55살 이상은 들이지 마라"(홍사덕)더니 이제는 아예 70대의 '유신 법률가'를 옆에 끼고, 당에는 5공의 사위 출신을 실세로 앉혀놓은 게 한편의 사기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남은 4년, 성장기 18년을 궁궐 속 공주로 살아온 대통령이 스스로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건 무망한 일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다. 불법을 응징하고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하게 하려면, 권은희·윤석열이 지켜낸 진실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제도를 뜯어고치는 데 감시의 눈을 부릅떠야 한다.

'선거 부정' '사기 공약'에도 대통령 지지도가 추락하지 않는 건 기울어진 정치구도뿐 아니라 보수편향의 언론구도 탓도 크다. 국기문란까지 옹호하는 수구보수언론의 곡필에는 응징이 필요하다. 153만표나 뺏기고도 아직 여당인 줄 착각하는 무능 야당, 민주당도 이제 정신차릴 때가 됐다.

김이택 논설위원rikim@hani.co.kr

2013년 12월 1일 일요일

[교황]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도전 -프레시안 이승선기자 번역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몇가지 도전

52. 이 시대 인류는 수많은 분야에서 이루고 있는 성취에서 보듯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다. 건강, 교육 그리고 통신 같은 분야에서 사람들의 복지 개선에 취해지는 조치들에 찬사를 아낄 이유가 없다.

동시에 대다수가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급급한 끔찍한 현실이 도래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많은 질병들이 퍼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은 공포와 절망의 포로가 되어 있다. 이른바 부자나라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삶의 기쁨은 빈번히 사그러들고, 타인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고, 폭력이 늘고 있다. 그리고 불평등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생존 투쟁, 그것도 종종 최소한의 존엄도 유지하지 못하는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질과 양, 속도과 규모 면에서 엄청난 진보가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일어나고, 즉각적으로 자연과 생명 분야의 다양한 곳에 적용되는 신기원의 변화가 진행돼 왔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사회는 새롭고,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권력들을 탄생시켰다.

배제의 경제는 안된다

53.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분명한 규제였던 것처럼, 오늘날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에 대해 "그래서는 안돼"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경제는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나이 들고 집 없는 사람이 노숙을 하다가 죽었다는 것이 뉴스가 되지 않는 반면, 주가지수가 2포인트 떨어졌다는 것이 뉴스가 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이것은 배제의 사회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음식이 버려지는 상황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있나? 이것은 불평등의 사회다. 오늘날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 아래에 모든 것이 지배되고 있다.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며 살고 있는 사회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비참한 존재가 되고 있다. 그들은 일자리도 없고, 미래도 없고, 탈출할 수단도 없다.

인간 자체가 쓰고 버려지는 소비재로 간주되고 있다. 인간이 쓰고 버려지는 존재가 된 문화를 우리가 만들었고,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착취와 억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문제다.

배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떨어져나가는 문제와 관계가 있다. 배제된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의 밑바닥이나 주변에 속한다거나, 권리가 박탈됐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 사회의 일원도 아니라는 것이다. 배제된 사람들은 착취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이며, 잉여가 된 것이다.

54.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낙수효과 이론을 옹호하고 있다. 낙수효과는 자유시장 체제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통합을 가져오는 성공적인 효과가 발휘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사실로 확인된 적이 없다. 이 가설은 경제적 지배권력의 선의와 지배적인 경제체제의 신성화 작업에 대한 막연하고 순진한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

배제된 사람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삶의 양식 또는 이기적인 이상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관심은 세계로 확산됐다. 거의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고통을 함께 느끼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슬퍼하고, 그들을 도와야한다고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마치 이런 문제들이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처럼.

풍요의 문화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다. 시장에 새로 살 만한 신제품이 나오면 우리는 흥분한다. 하지만 기회 부족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그저 낯설은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돈을 숭배하는 새로운 우상은 안돼

55. 이런 상황이 초래된 원인 중 하나는 돈에 대해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있다.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금융위기가 심각한 인간사회의 위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인간이 주인이라는 것을 부정했다는 것이 금융위기의 근원이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들을 창조했다. 고대 황금 송아지에 대한 숭배(출애굽기 32:1-35 참조)가 돈이라는 우상과 인간을 위한 진정한 목적이 결여된 비인격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 잔인한 형태로 변신했다.

세계적으로 금융과 경제에 닥친 위기는 불균형과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결여된 사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욕구를 지닌 인간은 하나의 욕구를 가진 존재로 축소됐다. 바로 소비다.

56. 소수의 소득은 확대되고, 행운의 소수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에서 다수를 멀어지게 하는 간극도 확대되고 있다. 이런 불균형은 시장의 절대적 자율과 금융투기를 옹호하는 이념의 결과로 초래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이념들은 국가가 공공선을 위해 어떤 형태의 통제를 행사할 권리를 거부한다. 이렇게 해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종종 가상적이라고 할 새로운 독재가 등장했다. 일방적이고 쉼없이 자신의 법과 규칙을 강요하는 독재다.

부채와 부채에 대한 이자가 늘어나는 나라들은 그들 경제의 잠재력을 깨닫고, 국민이 진정한 구매력을 누리도록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에 전세계를 무대로 벌어지는 부패와 자기 잇속만 차리는 탈세가 가세하고 있다.

권력과 소유에 대한 갈망은 한계를 모른다. 이런 체제는 이익 증대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익 증대에 방해가 된다면, 환경처럼 망가지기 쉬운 모든 것들이 유일한 규칙이 된 신성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무력화된다.

봉사보다 군림하는 금융체제는 안돼

57. 이런 태도 뒤에는 윤리와 신에 대한 거부가 도사리고 있다. 윤리는 조롱받고 경멸을 받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윤리는 돈과 권력을 절대적으로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고 깨우치기 때문에, 비생산적이고 너무 인간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인간에 대한 조작과 존엄을 무시하는 행위를 비난하기 때문에 윤리는 위협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사실 윤리는 시장의 영역 밖에서 진지한 응답을 촉구하는 신으로 연결된다. 시장이 절대화될 때 신은 통제가 안되고, 관리가 안되고, 심지어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신은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고 모든 형태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길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 -이념과 관계없는 윤리- 는 균형 있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질서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금융 전문가와 정치지도자들이 고대 현자 중 한 분의 말씀을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훔친 것이며 그들의 삶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58. 윤리를 고려한 금융개혁은 정치지도자들이 접근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나는 정치지도자들에게 촉구한다. 결연한 의지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갖고 이 도전에 나서달라고. 물론 사안 별로 특수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해야 할 것이다.

돈은 봉사의 수단이지 지배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교황은 모든 사람들 사랑한다. 그가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똑같이 사랑한다. 하지만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반드시 돕고, 존중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울 의무가 있다.

나는 그들에게 관대한 연대와 인간을 위한 윤리에 바탕을 둔 경제와 금융으로 복귀할 것을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