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4일 금요일

[한겨레] ‘진보당 해산심판’ 3차 변론

‘진보당 해산심판’ 3차 변론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는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사건 3차 변론이 열렸습니다. 진보당의 운명은 9명의 헌법재판관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엇갈리게 됩니다. 법의 명령에 따라 해산당할 수도 있고, 지금처럼 정당 활동을 이어나갈 수도 있습니다. 헌재에서는 지금 어떤 논의들이 오가고 있을까요. 3차 변론 기일이 열렸던 11일 오후 헌재 안팎의 풍경을 담아봤습니다.

지난 11일 오후 1시께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정문 맞은편에서는 낯익은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재향군인회나 ‘호국보훈안보단체연합회’ 등 극우·보수단체에 속한 이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헌재 앞을 찾았다. 이날 오후 2시 헌재에서는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사건 3차 변론이 열릴 예정이었다. 앞선 두 차례의 변론기일 때도 헌재 앞에 나타났던 사람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일단 시작합시다.”
일행을 기다리던 이들은 오후 1시30분을 넘어서자 확성기를 켰다. 모두 17명이었다. ‘헌법재판관님!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현명한 판결을 해주십시오!!’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었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에 따라 ‘종북세력 척결’ ‘종북정당 해산’ ‘이적단체 해체’ 등의 문구로 이뤄진 손팻말도 춤을 췄다. 많은 손팻말 가운데 유독 하나가 눈에 띄었다. 통합진보당 당기와 북한의 인공기를 아래위로 나란히 소개하며 그 밑에 “많이 봤다 아이가?”라고 써놓은 것이었다.
개화파 박규수 집이었던 헌재 대심판정
진보당의 당기는 보라색 물결 모양이 석 줄 겹쳐진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석 줄의 보라색 물결은 통합진보당 창당 당시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 등 통합의 세 주체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 진보당 설명이다. 위아래 파란 줄과 가운데 빨간 줄 및 빨간 별 등으로 이뤄진 북한 인공기와 진보당 당기는 색깔과 디자인, 의미 등 모든 면에서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물론 실증적 분석은 경찰의 (소극적)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북세력 척결’을 외치는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원래 직사각형 모양의 인공기를 진보당 당기의 물결 모양으로 휘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진보당을 겨냥해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내야 한다, 곧 ‘척결’을 외치는 이들의 선혈 낭자한 구호를 뒤로한 채 헌재 정문을 들어섰다. 3차 변론 장소인 대심판정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서해성 작가를 만났다. 역사적 사건을 직접 지켜보고 싶어 헌재를 찾았다는 서 작가는 대심판정 자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원래 이곳은 굉장히 독특한 장소입니다. 우선 저쪽으로 수령 600년이 넘는 백송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가 찾아낸 자료를 보면 수령 600년이 아니라 700년이던데, 어쨌든 그 오랜 시간 이 백송은 숱한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본 산증인 구실을 했던 것이죠.”
서 작가가 소개해준 ‘재동 백송’이 뿌리를 내린 그곳에는 원래 조선 말 개화사상가 박규수(1807~1876)의 집 사랑채가 있었다. 격동과 혼란의 19세기에 변혁과 진보를 외쳤던 박규수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 홍영식(1855~1884)은 그 집을 넘겨받았다. 개화당 소속이었던 홍영식은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대역죄로 처형당했다. 갑신정변이란 조선 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뜨리고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이들이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였다.
“19세기 말 개화의 바람이 가장 먼저 싹튼 장소를 꼽으라면 거의 매일처럼 개화당 모임이 열렸던 바로 이 자리인데, 여기서 지금 우리는 석기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서글픈 현실입니다.”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신 서 작가는 대심판정 방청석으로 들어서며 쓴웃음을 지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민중주권은 북한의 인민주권론
통일 노선도 북한 연방제 같아”
진보당 노선이 북한의 주장과
비슷하면 왜 안되는지는 없었다

퍼즐 맞추기로 숨겨진 목적
확인해 판단해야 한다는 정부
숨겨진 목적은 없다는 진보당
북한과 닮았다, 안닮았다 놓고
3시간 남짓 공방 주고받아 

“민중주권은 인민주권론과 동일”
‘진보당의 ○○이 북한의 무엇과 닮았다’는 식의 논리는 헌재 바깥에만 있지 않았다. 이날 3차 변론은 지난달 18일 오후에 열린 2차 변론기일 이후 청구인과 피청구인 양쪽이 제출한 증거문서의 확인과 양쪽이 내세운 참고인 진술, 참고인에 대한 질의응답 순서로 이뤄졌다. 청구인은 헌재에 진보당 해산심판을 청구한 ‘대한민국 정부’를, 피청구인은 심판의 대상인 진보당을 가리킨다.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정부 쪽 대리인으로 나선 정점식 서울고검 공판부장(법무부 위헌정당 태스크포스 팀장)이었다. 그는 모두진술 성격의 ‘제출서면 주장요지 확인’ 시간을 활용해 진보당이 내세우는 진보적 민주주의와 민중주권론 등이 북한의 그것과 어떻게 닮았는지 설명하는 데 힘썼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북한의 대남혁명 노선을 추종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중주권에서 말하는 민중이란 전체 국민의 일부인 일하는 사람만을 지칭하기 때문에 (북한의) 인민주권론과 동일하다 할 것이며, 우리의 국민주권론에 위배된다 할 것입니다. 통일 방안과 관련해서도 우리나라는 1민족1정부1체제를 지향하기에, 1민족2정부2체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북한의 연방제 통일 방안과 본질적으로 다른데도 진보당은 여기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통일국가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용인하겠다는 것으로서 북한 주장에 동조한 결과입니다.”
진보당의 강령이, 통일 노선이 북한의 주장과 비슷하면 왜 나쁜가. 마땅히 설명이 이뤄질 줄 알았는데, 이에 대한 논리적 배경은 제시되지 않았다.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한반도 전체의 지속가능한 번영과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이 더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법인지에 대해 누구도 묻지 않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정점식 검사가 강조한 것은 오직 ‘진보당의 ○○이 북한의 무엇과 닮았다’는 주장이었다. 9명의 헌법재판관은 묵묵히 이를 들었다.
피청구인 쪽 대리인인 김선수 변호사가 나서서 청구인 쪽에서 내세운 ‘진보당의 북한 추종’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민중주권의 의미는 국민주권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 국민주권을 강조하는 겁니다. 이에 따라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한-미 방위비분담금협정 등에서 불합리한 지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 등의 주장의 맥락도 그렇습니다. 지난번 2차 변론 때 헌법 전문가인 청구인 쪽 장영수 참고인은 ‘퍼즐 맞추기를 해서 피청구인의 숨겨진 목적을 찾아야 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식 사회주의 뉘앙스가 나는 듯한 발언을 조합해야 한다는 건데, 숨겨진 목적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지난달 18일 2차 변론 때 정부 쪽 대리인으로 나선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진보당 해산 요건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정당의 목적을 확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정당의 강령, 당헌, 당규 등이다. 그러나 정당해산 제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강령이나 당헌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진보당의 위헌성을 판단하려면 퍼즐 맞추기를 통해 숨겨진 목적까지 확인하고 목적과 활동을 연계해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진보당 쪽 대리인이었던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적기가’만 불러도 처벌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과 국가정보원의 감시체제가 구축된 대한민국에서 일부 당원이 일탈을 꿈꿨을지 몰라도 당 전체가 그런 은밀한 노선을 추구하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숨은 의도’를 뒷받침하는 심증을 바탕으로 서로 인과관계가 없는 단편적 사실관계를 엮어놓은 뒤 상대방을 옥죄는 방식은 과거 ‘공안 당국’의 전형적 수법이었다.
남북 정상 ‘낮은 단계의 연방제’ 합의했는데…
3차 변론 때 정부 쪽 참고인으로 나선 이는 유동열 치안정책연구소 선임연구관이었다. “북한 문제를 25년 동안 국가기관에서 연구한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유 연구관은 진보당이 내세우는 통일 방안과 대북 노선에 대한 문제를 주로 지적했다. 물론 논리적 틀은 ‘진보당의 ○○이 북한의 무엇과 닮았다’는 것이었다. 유 연구관은 “진보당은 외형적으로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도, 숨겨진 목적을 살피면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게 여러 면에서 포착된다”는 말로 진술을 시작했다.
“진보당 목적이 북한 노선과 유사하다는 근거가 뭐냐. 첫째 진보적 민주주의입니다. 이는 용어만 같은 게 아니라 논리 구조가 북한 것과 동일합니다. 1990년 김정일이가 이 진보적 민주주의에 기반한 게 북한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는 제가 무려 일주일 동안 김정일 저작집을 뒤져서 최초로 찾아낸 겁니다.”
유 연구관은 15분 남짓한 진술시간에 “25년 동안 북한을 연구했다”는 표현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가 강조한 대목은 진보당의 통일 노선이 우리 정부가 추구하는 ‘연합제’가 아닌, 북한의 ‘연방제’에 기초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진보당이 추구하는 코리아연방제는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과 같은 맥락입니다. 특히 진보당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등은 북한 고려연방 방안의 선결 조건과 일치합니다.”
우리 정부가 연합제를 추구하고 있다는 유 연구관 주장과 달리 김대중·김정일 등 남북의 두 정상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결과로 발표한 6·15 남북공동선언을 보면 남북 정상은 통일 방안과 관련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합의한 사실이 있다. ‘25년 동안 북한을 연구’해온 유 연구관은 이에 대한 해답도 갖고 있었다.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혐의’도 모두 찾아낼 수 있는 ‘숨은 의도론’이었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는 주한미군 철수 등의 선결 조건이 빠졌기 때문에 (우리 정부의 연합제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함정입니다. 남과 북이 하나의 국가가 된다면 주한미군은 남한에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철수돼야 하고, 서로 고무·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보안법도 없어져야 합니다. 결국 대한민국의 안전장치를 다 빼서 느슨하게 한 다음에 높은 단계의 연방제를 하려는 의도입니다.”
방청석 곳곳에서 짧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자신의 시간을 모두 쓴 유 연구관이 약간은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지으며 참고인석을 물러나자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교양과정학부)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앉았다. 정 교수는 진술에 앞서 “<중앙일보>에서 10년간 현대사 전문기자로 재직하면서 이승만 대통령 역사사진집을 냈고 실록 박정희라는 다큐를 공저로 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진보당과의 인연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자신에 대한 짧은 소개를 마친 정 교수는 남북한 및 진보당 통일 방안에 대한 유 연구관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기 시작했다.
“청구인 쪽에서 주장하는 북한의 연방제 통일론은 1980년대 북한이 주장한 것이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변화가 이뤄졌습니다. 청구인 쪽 주장은 북한의 통일 노선 변화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무리한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진보당이 북한의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면서 그 선결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진보당 강령에는 통일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후에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국보법 철폐 역시 민주화운동 세력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것으로 진보당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남북한의 통일 방안에 대해 각자의 주장을 펼친 양쪽은 진보당의 운영원리인 ‘민주집중제’ 등을 놓고서도 역시 북한과의 연계성을 주장하고 해명했다. 정부 쪽에서는, 진보당은 당론이 결정되면 똘똘 뭉쳐 당론에 따르는 민주집중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이런 점을 봐도 북한 헌법을 따르는 것 아니냐고 공격했다. 진보당 쪽에서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논의하고 결정된 사항에 대해 당원이 따르는 건 정당의 당연한 원리 아니냐”고 맞섰다.
‘북한과 닮았다, 안 닮았다’를 놓고 세 시간 남짓 공방을 주고받은 정부 쪽과 진보당 쪽은 오는 4월1일 4차 변론에서 다시 맞닥뜨릴 예정이다. 오랜 참고인 진술과 질의응답을 마치고 헌재 대심판정을 나선 정창현 교수에게 역사적 사건의 참고인으로 나선 심경을 묻자 그는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만 오가는 것 같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2005년 9·19공동성명 등을 거치며 크게 변한 동북아 정세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으니, 과거 1970~80년대에 나왔던 북한의 어떠어떠한 주장과 비슷하다는 식으로 지금 진보당의 활동과 주장을 재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2014년 3월 7일 금요일

[경향신문기사] 탐욕의 제국



[리뷰]대답 없는 삼성얼음처럼 차가운 영화···'탐욕의 제국'
삼성전자 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뇌종양 등 직업병을 얻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지난 6일 개봉했다.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인천인권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소개돼 큰 관심을 끌었던 영화 '탐욕의 제국'은 삼성과 싸우는 전직 직원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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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명은 달라도 하고 싶은 말은 같은 이들
영화는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다눈만 보이는 하얀색 방진복을 입은 이들은 다름 아닌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을 얻은 노동자들이다.영화에는 다양한 직업병을 얻은 노동자들이 등장한다갑작스레 발병한 백혈병으로 미래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던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황씨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주인공이다.또 뇌종양 수술의 후유증으로 눈물을 흘리지도말을 하지도걷지도 못하게 된 한혜경씨살아있는 동안 남들 다 가보는 청계천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이윤정씨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유방암을 선고 받은 박민숙씨두 아이를 위해 남편의 죽음을 반드시 규명하겠다는 정애정씨 등.각자 앓고 있는 병은 다르지만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 결 같다"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리고회사의 사과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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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처럼 차가운 영화
기자는 앞서 '또 하나의 약속' 리뷰에서 분노 등 감정이 폭발하는 영화 '변호인'을 불에 비유하고잔잔하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물에 비유했다이에 비하면 '탐욕의 제국'은 얼음이다.이 영화는 내레이션도 없고인물들의 대사도 많이 담겨 있지 않다얼음처럼 차갑게 인물들의 모습그들의 말을 전달한다카메라의 움직임도 많지 않다카메라는 극단적 클로즈업 또는 극단적 롱샷(인물이나 피사체를 멀리서 촬영해 작게 보이게 하는 것)을 통해 천천히 그들을 응시한다.물론영화에는 등장인물들이 근로복지공단·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삼성전자 본사 등을 찾아가 시위를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그 장면에서 인물들은 분노를 하고 있지만카메라는 매우 정제된 시선으로 그들을 담았다.영화를 촬영·편집·연출한 홍리경 감독은 "피해자들에 대해 여러 얘기가 있다회사가 잘못해서 이들이 병을 얻었다는 말도 있고운이 없어서 병에 걸려 놓고 억지를 부린다는 얘기도 있다그래서 그냥 보여지는 것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얼음은 불이나 물보다 강렬하지는 않다그러나 얼음만큼 원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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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하지 않는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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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 조금 넘는 영화 속에서 삼성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2012년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최우수 삼성전자 부사장의 "회사로서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말이 유일무이하다.그러나 최 부사장 역시 국정감사 쉬는 시간에 찾아간 한혜경씨와 한씨의 어머니의 항변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그는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며 물을 마신다.삼성전자 본사를 찾아가 소리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마치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것처럼 보인다이를 보면 이 영화가 한 쪽의 입장만 가득 담은 일방적인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영화는 이 모습이 법정 밖에서는 응답하지 않는 삼성의 실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힘 없는 이들의 싸움힘 있는 이들의 무응답 등을 극명하게 상징하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중간 중간 등장하는 컨테이너 장면이다부산의 한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촬영한 이 장면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하역장에 가득 쌓여있는 무수한 컨테이너들을 아무 말 없이 보여준다.커다란 컨테이너이를 실어 나르는 배에 비하면 인간은 개미처럼 매우 작게 보인다인간을 위해 컨테이너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컨테이너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영화의 제목은 장 지글러의 저서 '탐욕의 시대'에서 따왔다고 한다'탐욕의 시대'의 원제(L'empire de la honte)와 이 영화의 영어 제목(The Empire of Shame)이 같은 이유다인간이 탐욕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그러나 무소불위의 '제국'이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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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만 봐도뒷모습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반도체 공장 직원은 말한다"우리가 왜 방진복을 입는지 알아사람을 보호하려고 입는 게 아니라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입는 거야."
눈만 보이는 방진복을 입은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은 모두 똑같은 사람들처럼 보인다그러나 그곳에서 일했던 이들은 "눈만 봐도뒷모습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안다"고 한다.중요한 건 관심이다아무리 개성 넘치는 치장과 옷을 입는다 해도 관심이 없다면 기억도 나지 않고똑같이 생긴 쌍둥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한혜경씨도 마찬가지였다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한씨가 하는 말은 영화 초반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의 말을 들을 때 자막이라도 넣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들어서자 한씨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이들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관심이다누구의 말이 맞고누구의 말이 틀렸는지에 앞서 우선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것이 이들의 심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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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간간히 삼성 반도체 공장 기숙사의 모습이 등장한다이들 기숙사동의 이름은 '개나리''라일락'이다.영화 '탐욕의 제국'은 꽃다운 청춘을 회사에 바쳤지만 남은 건 죽음상처뿐인 이들의 이야기다꽃피는 봄이 영화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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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