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8일 수요일

[경향신문] 조국교수 칼럼

안녕하십니까. 저는 실장님의 까마득한 대학 후배로, 많은 부족함에도 모교에서 형사법을 가르치고 있는 '백면서생(白面書生)'입니다.

실장님의 이력, 대단합니다. 1960년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 고시에 합격하여 1964년 검사가 된 후, 1979년 청와대 법률비서관을 거쳐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1988년, 1991년 연달아 역임했습니다. 보안사 세력과의 갈등으로 관운이 약해진 전두환 정권 시기를 빼고는, 박정희 정권 이후 지금까지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에도 요직을 거쳤고, 최근의 국정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여전한 신뢰를 받으며 사실상 '부통령'으로 국정운영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안대희 전 대법관이 국무총리로 지명되었지만, 그는 실장님이 검찰총장 시절 평검사 아니었습니까. 안 후보자는 "김 실장에 비하면 나는 발바닥이다. 우리 아이큐가 130~140 수준이라면 그분은 170대"라고 칭송하였더군요.

그런데 실장님의 화려한 경력 뒤에는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30대 초반 검사로, 박정희 영구집권을 보장하고 시민의 기본권 행사를 금압(禁壓)한 '유신헌법' 초안 작업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1972년 12월 대검찰청이 발간한 '검찰' 48호에 발표된 '유신헌법 해설'이라는 글, 기억나십니까. 실장님은 "유신헌법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며,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지지한다고 강변하였지요.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 유신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은 실장님 자기정체성의 핵심일 것입니다. 이는 육영수 여사 살해범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냈던 '공훈'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이 실장님에게 혈육적(血肉的) 신임을 주는 이유일 것입니다.

1974년 실장님은 35세에 유신체제의 폭압과 공작의 요새였던 중앙정보부의 대공수사국장이 되었습니다. 박근혜 정권하에서 공안검사 출신들이 곳곳의 요직에 발탁되는 것이 실장님의 이런 성향 및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장님 직할 친위부대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14대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92년 12월, 실장님은 전 법무부 장관으로 '초원복국집'에 부산 지역 주요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관권부정선거를 추진했습니다. 제19대 대선 국정원 선거개입의 원조 격인 범죄였습니다. 당시 실장님의 놀라운 발언 중 지금도 회자되는 최악의 지역감정 조장 발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아방'을 묶어세우고 '타방'은 쪼개고 찌르고 베는 냉혹한 정치전술은 계속되었습니다. 2004년 3월,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의 선봉에 서서 대통령의 목에 칼끝을 들이댔습니다. 탄핵이 실패한 이후에도 실장님은 2006년 12월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노무현은 사이코다"라는 발언을 하여 '적장'(敵將)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명했습니다. 최근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노무현 대통령을 수사한 우병우 전 대검수사기획관이 발탁된 이유가 짐작됩니다. 믿을 만한 '살수(殺手)'로 일찌감치 찍어두셨겠지요.

지금 제 책상 위에는 <형법개정시론>(1984)이란 두꺼운 책이 놓여 있습니다. 실장님이 '5·16 장학금'을 받으며 쓴 서울대 박사논문을 출간한 책이지요. 학생 시절 이 책을 읽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과잉도덕화'되고 '과잉범죄화'된 형법을 비판하고 개정방향을 제시한 이 책은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실장님은 "시민사회의 질서원리는 최소한의 자유의 제약을 통하여 최대한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있다"(26쪽), "국가권력을 '절대적 정의의 집행자'가 아니라 오로지 '시민적 행복의 옹호자'로서 이해"(36쪽)한다고 썼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장님은 이 명제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윗분의 뜻"을 대대로 받들며 '연성(軟性) 유신체제'를 도모하고 있습니까?

박근혜 정권의 국정기조, 바뀌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실장님의 사퇴입니다. 실장님이 끌고 온 공안통치 방식으로는 대한민국은 물론 박근혜 정권도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실장님은 이미 박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1972년 유신헌법이 아니라 1987년 민주헌법의 정신에 충실한 대통령 비서실장과 참모진이 필요합니다. 간명히 말씀 드립니다. 실장님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물러나십시오. 후배의 직언이 무례하였더라도 혜량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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