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4일 화요일

극악무도 인터넷 활동한 국정원 직원 '좌익효수' 기소

‘좌익효수’라는 아이디로 인터넷에서 활동하면서 호남지역과 여성, 야당 정치인 등을 폄훼하는 글을 올린 혐의로 고소·고발된 국가정보원 직원을 검찰이 소환조사했다. 검찰은 이 직원의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하고 조만간 그를 기소할 예정이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정회 원주지청장)은 국정원법 위반과 모욕,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된 국정원 직원 ㄱ씨를 소환조사한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ㄱ씨가 사용한 아이디 ‘좌익효수’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 ‘절라디언(호남 주민을 비하해 부르는 말)’들은 전부 씨족을 멸해야 한다” 등 호남지역을 비방하는 글을 올렸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심리전에 넘어간 광주인들’이라고 표현해 광주 시민들을 비하했다. 또 인터넷방송 진행자 ‘망치부인’ 이모씨에 대해 “죽이고 싶은 빨갱이” 등 폭언을 담은 댓글을 게시하고, 열두 살인 이씨의 딸을 지칭하며 성폭력적 욕설을 올리기도 했다.

ㄱ씨가 올린 글 중에는 지난 대선 야당 후보인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가리켜 “문죄인 뒈져야 할 텐데”라는 글도 있다. 한명숙 전 총리, 배우 문근영씨, 배우 김여진씨 등 촛불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을 비하하는 글도 작성했다.

ㄱ씨는 2011년 1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인터넷 게시판에 16개의 글과 3451개의 댓글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해당 글은 모두 삭제됐다.

지난해 7월 통합진보당 오병윤 의원과 광주시당은 국정원법 위반 및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ㄱ씨를 고발했다. 이어 지난해 10월 인터넷방송 진행자 이씨도 모욕과 명예훼손, 협박 등 혐의로 ㄱ씨를 고소했다.

검찰은 지난 1월 고소·고발인을 불러 조사했다. 이후 ㄱ씨를 불러 글을 올린 경위 등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ㄱ씨의 모욕 및 명예훼손 등 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하고 기소할 방침이다. 검찰은 ㄱ씨가 야당 정치인을 비방한 글을 올린 행위에 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ㄱ씨는 국정원의 간첩 증거조작 사건 당사자인 탈북 화교 유우성씨 사건 수사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결과 국정원이 유씨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 중국 공문서를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고 일부 직원들은 위조사실을 시인했다.

2014년 6월 23일 월요일

[한겨레시론] 끝내야 할 한국전쟁/ 이수훈

다시 6·25를 맞는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4년이 되었다. 너무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국전쟁은 아직도 휴전 상태일 뿐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1953년 여름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전쟁도 아니고 진정한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우리 민족이 정전협정체제를 종식시키고 평화체제로 대체해야 할 큰 숙제를 풀지 못하고 긴 세월을 살아왔던 셈이 된다. 이 숙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현재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는 적대와 대결, 군사적 긴장과 안보 위협은 말할 것도 없고 평화정착을 통한 통일의 돌파구도 열 수가 없다.

한국 사회에는 근년 들어 6·25 전쟁을 잊지 말자는 담론이 위정자들의 사고에 편승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 분위기가 한때 존재하였던 화해협력 분위기를 대체해가고 있다. 혹여 화해와 관용의 정신이 증오와 적대의 마음자세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그 지긋지긋한 전쟁을 어떻게 종결짓고 다시는 그런 전쟁을 예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분위기가 위축된다. 정부와 다른 차원의 대안적 사고를 해야 마땅한 한국 시민사회의 숙제라고 하겠다.
지난 정부도 그랬고 현 정부마저 통일을 무척 강조한다. 근래에는 독일 통일을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정치사회적 분위기도 드높다.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야 탓할 일이 못 되고, 다른 사례를 참고하자는 취지도 시비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통일이 평화정착이라는 어려운 단계를 건너뛰어 이루어지리라는 사고는 잘못된 것이고, 독일 사례만 하더라도 우리 같은 동족상잔의 참극을 겪지 않았다는 점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통일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현재의 정전협정체제를 어떻게 평화체제로 바꿀 것인가에 대한 깊은 전략적 고민이 있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의 과제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그 토대 위에 통일기반을 구축하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가동되지 못하는 배경에 북핵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북핵문제 해결에 최소한의 진전이라도 있어야 비로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박근혜 정부의 생각인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년간 한 발언들을 곰곰이 따져볼 때 이런 짐작이 가능하다. 북핵문제는 남북 간의 대화와 협상은 말할 것도 없고 6자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나머지 동북아 국가들 간의 대타협이 있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최소한 미-중 간의 전략적 타협이 전제되어야 할 일이다. 이 역시 정전협정을 종식시키고 평화체제로 가는 과제와 엮여 있다. 미국과 중국은 정전협정 체결 당사국들이고, 북핵문제는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체제를 종식시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자의 정치적 의지, 긴밀한 남북 간의 대화, 국제사회와의 공조가 요구된다. 지금 한반도의 남북과 동북아 지역에 이를 위한 분위기가 있느냐는 회의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통령이 결단하면 가능하다. 마침 2007년 남북 정상 간의 ‘10·4 선언’에는 바로 이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 조항이 들어 있다.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남·북·미·중 4자 정상들이 만나서 종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선언이 정전협정체제를 곧장 끝낼 수는 없어도 한반도 평화정착을 본격 개시하는 정치적·상징적 출발이 될 것이다.

이수훈 경남대 교수·정치사회학

2014년 6월 21일 토요일

7인회 김용갑 인터뷰

경향신문 김용갑 인터뷰 기사 중

7인회는 김 전 의원을 비롯해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강창희 전 국회의장,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멤버다.

대표적인 보수정치인인 김 전 의원은 지난 19일 서울 반포의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나 문 지명자와 관련해 “보수라고 무조건 꼴통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분이 후보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누가 그 사람을 믿고 일을 추진하겠느냐. 국가개조가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을 향해선 “정치를 쉽게 하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 아쉽다”고 말했다.

“(예전에) 박 대통령에게 (청와대) 민정수석을 잘 쓰라고 했다. 검사 출신(김영한 신임 민정수석은 검사 출신이다)은 하면 안된다. 검사들은 많이 굳어가지고. 내가 민정수석을 해봐서 아는데 참 중요하다. 민정수석은 민심동향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직언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신문 보니까 민정수석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안 하고 실장을 통해서 한다고 하더라. 그러면 안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210600025&code=910100

2014년 6월 20일 금요일

[한겨레 사설] 국제기준 및 법 취지에 어긋나는 전교조 판결

15년 동안 합법적 지위를 누려온, 6만 조합원의 전교조가 하루아침에 법의 울타리 밖으로 쫓겨났다. 법원이 19일 “전교조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법외노조’ 통보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가 너무 법조항의 문구에만 매달려 애초 법을 만든 취지를 가볍게 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노동조합에 대해 정의를 내린 노조법 제2조에 대한 법원의 해석이 특히 그렇다. 이 조항은 노동자가 자주적으로 단결하도록 하고, 사용자의 입김이 미치는 어용노조를 막고자 하는 게 목적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노조의 자주성을 침해하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6만여 조합원 중 9명의 해고자로 인해 노조의 자주성이 침해되는지 여부를 따져봤어야 한다. 그런데 재판부는 문제가 된 해고자 가입 부분을, 경비의 주된 부분을 사용자로부터 원조받는 경우나 사용자의 이익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자의 참가를 허용하는 경우와 똑같이 취급해버렸다. 노조법의 통일적·유기적 해석을 위한 거라는 설명이 고작이다. 노조의 자주성을 보장해주기 위한 조항을 가지고 거꾸로 자주성을 질식시켜버리고 만 꼴이다. 법조문에 대한 기계적 해석이 낳은 비극이다.
전교조는 1심 판결에 대해 즉각 항소하고 법외노조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등을 낸다고 하니 이 부분은 상급심에서 더 깊게 다뤄질 것이다. 하지만 애초 법률 자체가 해석상의 혼선을 부를 여지가 있는 만큼 국회가 법을 개정해 그 취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국제노동기구(ILO)와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이미 여러 차례 법개정을 권고한 만큼 국회가 서둘러야 할 것이다.
새누리당의 태도가 소극적이라 그동안 법개정이 진척되지 않았을 것이다. 새누리당은 이날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결”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미 전교조에 대해서는 국민의 심판이 내려졌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전국 17개 시·도 교육감 중 진보 교육감이 13명이나 당선됐고 그 가운데 8명이 전교조 출신이다. 전국의 초·중·고 학생의 85%가 진보 교육감이 당선된 지역에서 공부하게 된 게 현실이다.
정부와 여당은 더 이상 민심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전교조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대립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충분한 비용을 치렀다. 앞으로도 이런 소모전이 지속된다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학생일 뿐이다. 정부 여당의 성찰을 기대한다

2014년 6월 10일 화요일

[한겨레: 박노자] 학피아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필자가 여태까지 들은 노엄 촘스키의 명언 중 이 말은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최악의 학살자는 현장에서 직접 살인을 벌이는 졸개들이라기보다는, 멀리에서 정장을 입고 조용한 사무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고학력자 출신의 지휘자다." 이번 세월호 학살도 마찬가지다. 주류 언론들이 도망친 선장 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지만, 비정규직이기도 한 선장은 촘스키가 이야기한 '졸개'에 불과했다. 고물 선박 구입과 관련된 규제를 풀고 선박에 대한 감독을 해운업자 조직에 맡기는 등 과적 운항을 상습화시킨 '조용한 사무실에서의' 관피아야말로 이 학살의 원흉임을 이제는 삼척동자도 알게 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관피아보다 훨씬 더 그늘에 가려 있는 초대형 조직은 바로 학피아, 즉 정부·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돼 있는 학계다. '규제완화' 등 관피아가 추진하는 범죄적 정책들의 골간을 학피아가 만들어내고, 곡학아세하면서 합리화하기에 이번 학살의 원인을 논할 때 학피아를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관피아와 함께 이 학살이 일어나도록 공을 들였으면서도, 관피아보다 훨씬 더 그늘에 가려 있는 초대형 조직은 바로 학피아, 즉 정부·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돼 있는 대학가 내지 학계다. '규제완화' 등 관피아가 추진하는 범죄적 정책들의 골간을 학피아가 만들어내고, 곡학아세하면서 합리화하기에 이번 학살의 원인들을 논할 때 학피아를 빠뜨릴 수 없다. 하지만 국내는 아니지만 일단 대학 교원인 나 자신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입장에서 학피아 문제를 본격 거론하기 전에 몇가지 단서를 달아야 할 것이다.

첫째, 나는 국내 대학의 모든 정규직 교원들을 뭉뚱그려 '학피아'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서도 주류에의 편입을 거부하고 노동운동에 앞장서는 '작지만 큰' 용감한 소수는 있다. 하지만 변혁을 지향하는 소수는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조직체로서 학계·대학가는 대한민국에서 신자유주의 도입의 전위대 노릇을 해왔다. 또 밑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대학사회만큼 신자유주의 원칙이 철저히 적용되는 곳도 드물다.

둘째, 대한민국 학계라고 해서 꼭 특별한 것은 아니다. 정학(政學)·경학(經學) 유착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 식민 모국을 보라. 이미 1969년에 촘스키는 베트남 침략의 원흉으로 아서 슐레진저(1917~2007)나 새뮤얼 헌팅턴(1927~2008)처럼 '효율적인 제3세계 개입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어용 '정치학자'들을 지목했다. 1973년에 촘스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치외교학 계통 논저의 95% 정도는 미국 재벌기업의 이해관계와 대외정책의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재벌들 앞에서 이 정도로 '얌전하게 구는' 데는 당연히 대학가의 이해관계가 있다. 전체 미국 대학이 수령하는 연구비의 약 60%를 재벌이 움직이는 국가가 대주고, 약 6%를 사기업들이 직접 대주고 있다. 많은 대학의 경우 기업들의 지원은 거의 결정적이다. '진리 탐구'나 '상아탑의 자율성'은 옛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다른 나라라고 해서 본질적 차이는 그다지 없는데 하필이면 한국 학계를 특별한 문제로 삼는 까닭은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관피아와 함께 학피아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 '명문대학'의 전임교원들은 사회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과시한다. 미국이라고 해서 폴리페서가 없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언급한 슐레진저와 같은 사람들은 사실 그 정의에 그대로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만큼 폴리페서들이 판치는 세상도 참 드물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공공기관 고급 임원 중 교수와 연구원 출신은 24%나 됐다. '재벌정부'라는 누명을 썼음에도, 사기업 임원 출신은 약 8%에 그쳤다. 박근혜 초기 내각에서는 연구원 출신만 약 28%에 달했다. 즉, 두 극우적인 신자유주의 정권의 공통점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바로 '고급 두뇌'들이 추진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독 '교수 출신 장관' 따위가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 특기할 만한 이유는 바로 학벌 카스트 제도의 작동 방식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라는 세 대통령의 하나의 공통점을 지적하자면, 그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서울대 마피아'라고 호칭할 수 있는 학벌조직이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각각 임명한 정무직 공무원 중 서울대 출신 비율은 47% 정도였으며, 이명박 시절에는 고려대 출신에 약간 밀린 결과 40%로 깎이긴 했지만 그대로 우세를 유지했다. 특정 대학이 국가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 그 대학 전임교원의 정치·사회적 비중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둘째, 그 어느 나라에서도 대학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지만, 그 일부(성균관대·중앙대 등)를 아예 재벌기업이 소유하는 한국만큼 저질스럽고 졸속적인 신자유주의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예컨대 정부의 정원감축이나 특성화 사업에 발맞추느라고, 도살하듯이, 학생의 의견을 무시해 가면서 여러 대학에서 벌어지는 학과 통폐합을 보라. '비인기'라고 해서 독일·프랑스어, 사회학이나 철학 등의 학과들을 폐품 처리하듯이 단숨에 없애버리는 것은 과연 학술적 전통이 있는 대학에서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영어 논문' 광풍이나 '유명 해외 학술지' 광풍을 보라. 내가 있는 오슬로대학을 포함해서 세계 대부분의 대학들은 교원들이 학술 활동을 영어로 하는 것을 유도하고, 교원들의 영미권 유명 학회지 논문 게재를 선호한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영미권 학계의 패권이 강한 것은 현실이다. 한데 외국의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실었다고 하여 그 저자로 돼 있는 교수에게 수천만원의 포상금을 내놓는 대학은 한국 말고 과연 어디에 더 있는가? 더군다나 국내의 논문생산 시스템에서 상당수 교수들이 대학원생이나 비정규직들을 무상 착취해 가며 논문을 만드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국내 대학들을 기초 상식이 없고 기본 인권도 지킬 줄 모르는 신자유주의적 착취공장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장하준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 취직할 수 있어도 국내의 '명문대' 경제학과 같으면 취직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학과 교수들은 비정규직 양산부터 '규제완화'까지 서민들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데 앞장섰다. 학피아의 주변부에 속하는 인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고질적인 현실도피다.

세월호 학살로 귀결된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의화를 이끈 것은, 학피아의 하나의 중심이라고 할 '명문대'들의 경제학과였다. 거기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고사하고 제도주의 학파 등 온건 케인스주의자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시장주의자 일색이다. 시장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큰 인기를 얻은 장하준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 취직할 수 있어도 국내의 '명문대' 경제학과 같으면 취직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학과 교수들이 역대 정권에 의해서 가장 자주 정무직으로 등용됐으며, 비정규직 양산부터 범죄적인 '규제완화'까지 서민들의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데 앞장섰다.

경제학과들을 점령하다시피 한 시장주의자들의 범죄성이야 노골적이지만, 학피아의 주변부에 속하는 인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고질적인 현실도피다. 예를 들어 여러모로 가장 현재성이 강할 수도 있는 역사학을 보라. 최근의 '문화 중시'와 같은 포스트모던 추세로 한참 '뜨고 있는' 식민지시대 영화 연구로 지난 10년 동안 적어도 50개 이상의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그러나 삼성가의 자본축적 경위나 그 과정에서의 식민지 당국이나 독재정권과의 유착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 내지 논문은 3~4편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차피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민족주의는 학계에서 비판의 대상에 올라도, 한국 대학에 대한 자본 지배의 현실은 거의 학술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국가와 자본의 명령대로 인문학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세월호에서 수장당한 아이들에게, 시장주의와 순응주의가 당연시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온 고등교육기관 교원인 우리가 속죄하자면, 이제라도 학피아의 테두리를 안으로부터 과감히 부숴야 한다. 국가와 자본을 끊임없이 문제시하고 도전하는 학문만이 새로운 학살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실학'이 된다. '가만히 있지 않기'를 실천하고 가르쳐야 우리에게 속죄의 길이 열릴 것이다. 착취공장으로 전락한 대학의 틀 안에서 안주하는 순간 우리도 종범이 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