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3일 목요일

[한겨레사설] 전작권 이양 무기한 연기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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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의 국방정책 담당자와 강경보수 인사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한국군의 준비 부족을 환수 백지화의 근거로 든다. 하지만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은 지난해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작전권 전환 시점은 적절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는 미 행정부 외교안보 라인에 있는 인사들의 대체로 일치된 의견이다. 남북의 경제력 차이뿐 아니라 남한의 국방예산이 북한보다 30배나 많은 상황에서도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할 준비가 안 됐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 군의 자주적인 운용은 언제 가능한 건지, 현 정부의 정책담당자들은 대답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지만, 전작권을 돌려받지 말자는 주장의 이면엔 결국 ‘미국에 의존해야만 안심이 된다’는 뿌리 깊은 대미 의존 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전작권 문제를 단순히 군사적 개념이 아닌 자주권의 차원에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워싱턴 안보협의회의 논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작권 환수를 백지화한 대가로 우리는 미국에 더 많은 것을 내주는 게 불가피할 것 같다. 앞으로 우리 군이 전작권을 돌려받을 수준이 되려면 ‘한·미 연합방위를 주도할 핵심군사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미국의 군사무기를 훨씬 많이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전작권 사슬에 매여 막대한 액수의 불필요한 방위비용까지 국민이 연년세세 부담해야 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현 정권은 이런 문제들을 국민에게 분명히 설명하고 역사적 평가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2014년 10월 21일 화요일

박기서씨 최근 인터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212111155&code=100100

1996년 10월23일 오전 11시30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가 살고 있는 인천의 한 아파트. 안두희의 부인이 외출하는 순간을 틈타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장난감 권총으로 안두희를 위협하고는 미리 준비한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애초부터 ‘너(안두희)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계획된 거사였다. 30분이 지났을까. 안두희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 그는 택시를 잡아탔다. 시간이 멎은 듯했다. 공황 상태에 빠졌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고교생인 작은딸이 울먹였다. “아빠, 지금 어디야? 집에 형사들이 왔어. 무슨 일이야?” 현장에서 피가 채 마르지도 않은 정의봉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보고 경찰이 움직인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성당으로 가서 고해성사를 했다. 자수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그날 입건됐다. 1년5개월여간 옥살이를 한 그는 지금 개인택시를 몰고 있다.

18년 전 안두희를 죽인 박기서씨(64)를 21일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묘소에서 만났다. 김구 선생을 뵙고 싶다는 그의 말에 따른 것이다. 그는 참배 후 제단에 놓인 한 장의 종이를 집어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생이라는 신모양의 글이었다. “백범 할아버지 책을 읽고 앞으로는 우리나라를 위한 어린이가 되어야겠다고 느꼈어요.” 박씨는 이 편지를 소리내어 읽다가 갑자기 흐느꼈다.

“가방끈이 짧은 저는 정치란 걸 몰랐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정신이 없었죠.” 아이들이 갖고 있던 <백범일지>를 우연찮게 손에 잡은 후 수없이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는 박씨는 “1000만분의 1도 그의 성품에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그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더듬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백범을 존경하게 된 그는 “민족 지도자를 죽이고도 권력의 비호하에 호의호식해온 안두희를 가만둘 수 없다”는 다짐을 거듭했고, 그날 실행에 옮긴 것이다.

동기야 어쨌든 그는 법이 용납하지 않는 죄를 저질렀다. 그는 1997년 9월 대법원에 낸 상고이유서의 일부 내용으로 심경을 대신 전했다. “(신앙인으로서) 안두희의 영혼이 영면하기를 기원하며… 진심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죽는 날까지 내 안에 가슴앓이로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박씨는 “안두희 살해사건을 한 개인의 사건으로만 치부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 ‘안두희’는 성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반민족, 반통일, 반역사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라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되물었다. “권력의 이권 다툼, 역사를 기만하고도 응징되지 않은 세력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까. 세월호 참사는 또 어떻습니까. 이런 것들은 살인이 아닌가요.”

세월호 참사 후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아온 그로선 안두희가 핵심 간부로 몸담았던 ‘서북청년단’의 재현은 충격에 가까웠다. 서북청년단 재건위의 ‘노란 리본’ 철거 소동을 두고, “어처구니없다”고 운을 뗀 박씨는 “남북 화해를 꾀했던 백범을 암살한 사건은 안두희 세력에 의한 정치적 살해였다”면서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조직이 나타나 세월호 참사를 막지 못한 정권의 무능을 감싸고 있는지, 난센스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박씨는 ‘통일’을 되뇌었다. 그는 “현 정권이 과연 통일에 의지가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대통령이 ‘통일 대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서로를 못 믿는 마당에 통일이 가당키나 한 건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는 김구기념관을 둘러본 후 “대선 직후 박근혜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는데, 김구 선생의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렸을지 궁금할 따름”이라며 몰고 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 그후 1년 / 사회평론<길> 1998년 1월호

그는 '죄인' 부끄러운 역사는 '무죄'였다.

"탕! 탕! 탕! 탕!" 1949년 6월 26일 12시 30분경, 경교장에는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백범 김구는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47년 뒤, 안두희는 양손이 하얀 노끈에 묶이고 목이 졸린 상태로
                    머리에 둔기를 맞아 피를 흘린 채 죽임을 당했다.
       그를 죽인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박기서란 버스운전사였다.

"기서야, 이놈아!"
96년 10월 23일 오후9시. 비명과 같은 외마디를 내지른 박준서씨는 살인을 저지른 동생의 모습을 보고 이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옆의 '살인자'의 아내 원미자씨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짜야?"라고 남편한테 되묻고 되물었다.
사실을 인정하는 남편 앞에 원씨는 자신을 속여왔던 남편이 원망스러워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안숙이 시험이 20일 밖에 안남았는데....세상에 어쩌자고...."
"나도 많이 걱정했어. 당신 눈치 안채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살인자'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미리 말하면 못하게 할 게 뻔하잖아...,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어..."
형사들은 조서에 그의 인적사항을 하나하나 써내려갔다. 1948년 생 주소/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직업/부천 소신여객 버스 운전사,. 가족/ 처 원미자. 맏딸 박안숙, 둘째딸 박정아, 막내아들 박찬종.
  경찰서에서 비극적으로 마주한 부부의 첫 대화는 딸애 시험 걱정을 나누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 있던 안숙이는 오히려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얼마 앞두지 않은 자신의 수능시험 때문에 아버지가 미안해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사건이 나고 이틀 뒤(10월25일). 안숙이는 점심시간에 학교 뒤뜰에 갔다가 밧줄에 묶여 경찰이 이끄는 데로 끌려가는 아버지를 가까이서 보았다. 현장검증을 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 텔레비전에서만 만났던 아버지의 얼굴. 하지만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한 일이 역사에 남을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한 생명을 죽였다는 현실 앞에 괴로워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숨어서 보다가 그 표정을 읽고선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아빠! 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고 계세요? 더 당당하게 걸으세요. 아빠가 밧줄에 묶여 경찰한테 질질 끌려 갈망정 다른 범죄자들과는 다르게 의연하셔야죠!"
박기서한테 죽임을 당한 안두희의 시신은 인천의료원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곳에 마련된 영안실에는 이날 밤 부인 김명희씨만 잠시 들렀을 뿐 그의 죽음을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미국에 있는 아들딸들 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안두희. 수십년 동안 '진실'과 '분노'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쳐왔던 그의 삶은 이렇듯 쓸쓸하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49년 6월 26일 백범을 살해하고도 버젓이 두 계급이나 특진했고, 제대후 군납공장을 지어서 군대부식을 공급하며 큰 돈을 벌었던 그. 그러나 4.19혁명은 이런 그의 생활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도망자로서 그의 삶은 시작이 된다. 역사는 '잠시' 제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61년 4월. '김구선생진상규명투쟁위원회' 간사였던 김용희씨는 마침내 그를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 하지만 경찰에서 돌아온 답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것. 역사에도 공소시효는 있었다. 이처럼 운좋게 풀려난 그였지만 4년 뒤 이번엔 곽태영씨한테 칼로 두군데나 목을 찔려 생사를 헤매야 했다. 87년에는 권중희씨한테 민족정기봉으로 머리를 맞았고 92년엔 권씨의 손에 이끌려 효창공원 백범묘소에서 뒤늦은 울음을 토했다. 하지만 '진실'과 '분노'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버스운전사 박기서씨로부터 '정의봉'을 맞고 백범 살해 이후 47년을 비참하게 버티고 버텼던 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96년 12월18일부터 시작되어 13차례에 걸쳐 진행된 박기서에 대한 재판에는 문한성, 임통일 변호사 등 모두 7명의 변호인들이 참여했다. 그들은 박기서의 살인이 "올바르지 못한 역사가 개인한테 준 폭력"임을 분명히 하고 그에 대한 무죄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를 위해 성대 사학과 서중석 교수를 증인으로 세우는 등 '현대사'에 대한 재판으로 밀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서교수에 대한 증인 신문 이후 더 많은 역사학자들을 증인으로 세우려 했던 변호인들의 노력에 "한 사람만 하면 됐지 않느냐"며 현대사 재판으로 이어지는 걸 가로 막았다. 그리고 97년 7월31일 재판부는 박기서한테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임통일 변호사는 지난 9월9일 이에 반발하고 상고를 냈다.
"비록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에 의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은 부인됐으나, 우리 헌법상 법통은 이어져 있으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을 안두희가 살해하게 된 과정, 그리고 일제 패망 후 친일파의 현황과 백범 살해의 배후를 잘 살핀다면, 현 헌법체계하에서 피고인의 행위는, 다른 실정법적인 법적 절차를 통해 실현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불가피하게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행위로, 도저히 실형을 선고할 수 없음에도 원심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심리를 하지 않고 미진한 상태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습니다.
'피고'박기서는 상고 이유를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안두희는 한 개인의 생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식민과 분단의 감옥에서 반민족, 반통일, 반역사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를 뜻합니다. 설령 안두희가 자연사 했더라도 보통명사로서 안두희는 이미 역사의 족적을 새겼습니다. 한 자연인 안두희를 살해한 나의 행위가 실정법을 어긴 것이라고 법은 일심과 항소심에서 이미 지적했습니다. 전 여기에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은 한가지를 더 발언해야 합니다. 보통명사로서 안두희를 우리 법이 어떻게 정리할 것이고, 그 정리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 될 건지 걸림돌이 될 건지 법은 발언해야 합니다.
역사를 상대로 한 재판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11월 17일. 이 상고에 대한 마지막 판결이 내려 졌다. "피고인의 이 사건이 범행동기나 목적이 주관적으로 정당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우리 법질서 전체의 관점에서는 사회적으로 용인할 만한 정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징역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다." 재판부의 판결에는 박기서와 변호인이 바랐던 현대사에 대한 '판단'은 없었다. 또 한사람의 징역 3년형 짜리 '죄인'은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49년 6월 26일 백범의 몸에 총탄 네발을 퍼부어 그의 생을 끝장냈던 안두희의 죄과를 낱낱이 심판하지 못한 47년 동안의 부끄러운 "역사"한테는 단 하루의 징역형도 내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상고심을 지켜본 박기서의 아내 원미자씨는 그 판결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3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또 볼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이 감옥에 있어 생계가 막막해진 아내는 사건이 있은 네달 뒤부터 시흥동 한 해장국집에 일을 나간다. 아는 친구 소개로 들어간 그 식당에선 한달에 70만원을 주고 여기다 택시비를 조금 보태준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시계는 4시를 가리킨다. 새벽, 이제 피곤한 몸을 누일 수 있다.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는 날이 잦아 졌다. 엄마는 꼭 깨우라고 일러두었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챙겨서 학교에 나가곤 한다. 비록 남편은 감옥에 있지만 이처럼 꿋꿋하게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든든하기만 하다. 가정에 충실했던 남편은 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아이들은 그런 아빠를 그리워 한다. 지난 12월9일 원씨는 권중희씨, 조문기씨와 함께 남편 면회를 갔다. 이날은 남편의 50번째 생일날이었다.
"찬종이가 아빠 생일이라고 따라오려 했어요. 근데 학교에 가야 하니까..., 대신 아빠한테 이런 말을 전해 달래요. 독서학원 잘 다니고 글 잘써서 선생님들한테 칭찬듣고 있다구요. 그래서 아빠 기뻐하시라구요."
"아, 그래."
남편은 활짝 웃었다.
어느새, 면회시간 5분은 끝나가고 있었다. 원씨는 다음엔 곧 방학을 하는 아이들과 함께 온다는 약속을 하고, 언제 이감될지 모르는 남편을 뒤로 했다. 이날 원씨는 감옥에서 고생하는 남편이 힘들어할까봐 차마 입에서 떼지 못한 말이 있었다. 남편이 상고심 공판을 받은 다음날인 11월 18일 어머니(이순덕 옹)가 세상을 떠나 고향 정읍 선산에 묻히셨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 주간지에 나온 아들의 사진을 일년 내내 보듬고 살다가 그렇게 가셨다고 한다.


(박기서 옥중인터뷰)
12월 10일 2시. 안양교도소 3호 면회실 투명플라스틱판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박기서의 얼굴은 추운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쪽 편에서도 입김이 펄펄 나왔지만 건너편 박기서의 목소리에도 입김이 묻어 있었다.
그의 푸른 조수복에는 죄수번호 1552번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는 기자 옆에 있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김인수 위원장이 반가웠는지 서로를 가르고 있던 '투명 플라스틱 판에' 손을 얹고 소리내어 웃었다.
"아이구, 안녕하셨어요."
"이게 얼마 만입니까. 그동안 면회도 못와서 죄송합니다."
둘은 박기서가 자수한 직후 경찰서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1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셈이었다. 잠시 둘 사이의 대화가 이어졌고, 김위원장은 곧 그한테 기자를 소개했다. "예....안녕하세요."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서 '시골 아저씨' 분위기가 느껴졌다.
- 감옥생활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 제가 독방에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혼자 책 읽고, 편지 쓰고... 운동은 하루 한시간 할 수 있지요."
-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 얼마전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다 읽었습니다. 요즘엔 '새벽에 길어 올린 한 생각'..."
- 박노해..<사람만이 희망이다>요?
" 예, 맞아요...
- 읽으니 어떻던가요.
"(쑥스럽게 웃으면서)아유, 그냥 좋죠...뭐."
- 편지는 누구한테 주로 보내나요.
" 가족들하구요. 요즘엔...이해인 수녀님하고 편지를 나누고 있어요."
- 이해인 수녀님이요? 어떤 내용으로 나누시는데요.
" 서로 시 써서 보내구...그러지요.(또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 3년형을 받았는데, 후회는 없습니까.
" 결코 후회는 안합니다. 가족들한테 미안하지만 적은 희생은 있어야지요. 전 머릿속으로 안두희를 수천번 죽였어요."
- 가족들이 상당히 그리워하고 있던데요....
" 저도 그렇죠. 아내가 아이들을 잘 키워주고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아이들이 밝고 힘차 보이더군요.
" 원래 없이 산 사람들은 그렇게 착하고 밝은 거예요."
- 감옥에 같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 잘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 늙은 사람 왜 죽였냐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래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 보고 싶은 사람은 없나요.
" 편지도 많이 나누고, 사람들이 면회를 자주 와서 특별히 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모두한테 고마울 뿐이지요."
건너편 문에서 교도관 한 사람이 문을 열었다. 끝났다는 신호였다. 시계는 2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기서는 이쪽을 바라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시 차가운 독방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5일 후, 그가 "오늘(15일)새벽 청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14년 10월 9일 목요일

[한겨레] 이인호, 이명세, 친일유학/ 고명섭

“지난번에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기는 했어도, 한순간 꿈처럼 짧아서 의견을 깊이 물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1559년 1월 58살의 퇴계 이황이 32살의 고봉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선 지성사의 최대 사건으로 불리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의 시작이었다. 사단칠정 논쟁은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성리학의 종장인 퇴계가 26살 연하의 신참 유학자 고봉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의견을 구했다는 것도 유례가 없었고, 영남과 호남을 편지로 넘나들며 논쟁이 8년이나 지속됐다는 점에서도 유례가 없었다. 사단(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이라는 마음과 칠정(희·로·애·구·애·오·욕)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가 핵심 쟁점이었다. 성리학의 인간관으로 보면, 우리 본성은 본디 선하지만 그것이 욕망으로 분출될 때 세상사의 탁한 기운과 섞여 본래의 선함을 잃어버리기 쉽다. 어떻게 하면 이 욕망을 다스려 본성의 인의예지를 바르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두 사람의 근본 관심사였다.
지난달 <한국방송>(KBS) 이사장이 된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발언들이 우리의 역사의식을 흔들었다. 이 이사장은 친조부 이명세의 친일 행위를 변호하는 중에 “할아버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일제 통치 체제하에서 타협하며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보면 이 이사장의 조부 이명세는 천황을 떠받드는 황도유학을 주창하고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찬양했다. 일제 말기 징병제를 환영하기도 했다. 이명세의 친일은 타협이 아니라 명백한 부역이다. 매국행위와 다를 바 없다. 더 곱씹어볼 것은 조부의 친일 행위가 ‘유학의 세’를 늘리려는 것이었다고 변명한 대목이다. 유학의 세를 늘릴 수만 있다면 일제에 충성하는 것도 괜찮다는 뜻일 터인데, 아무리 봐도 이것은 유학의 정신에 맞지 않는 말이다.
유학의 정신, 다시 말해 선비정신이란 게 뭔가. 인의예지, 더 줄이면 인과 의를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사단칠정을 놓고 그토록 치열하게 싸운 것은 세상의 더러움에 휘말려 인과 의,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잃어버리지 말자는 뜻이었다. 독립지사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인 일제에 빌붙어 유학의 세를 키우려 했다니, 유학의 속을 파내버리고 껍데기를 키우겠다는 얘기다. 자가당착이고 언어도단이다. 유학자의 지조로 일제에 항거한 동농 김가진, 심산 김창숙 같은 분들을 농락하는 말이다. 이 뒤틀린 사고가 보여주는 건 ‘유학의 세’를 명분으로 삼아 자기 자신의 세를 키우겠다는 권세욕 아니겠는가. 퇴계가 “인욕(人慾)을 천리(天理)로 잘못 아는 병통”을 경계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사로운 욕망을 하늘의 뜻인 양 윤색하는 것이야말로 유학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이사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경련 강연에서는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는 주장까지 했다. 한민족 절대다수의 염원이 한순간에 스탈린의 하명이 되고 말았다. 이쯤 되면 브레이크 없는 망언의 폭주다. 친일 청산이 소련의 지령이면 스탈린과 손잡고 일제와 싸운 미국의 루스벨트도 소련의 지령을 받은 것인가. 광복군도 소련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것인가. 집안의 명예를 지키겠다며 당치도 않은 말을 끌어다 대는 것은 조상을 두 번 치욕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일이다. 퇴계는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참된 강직함과 진실한 용기는 기세를 높여 억지를 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고 의(義)를 들으면 바로 따르는 데 있습니다.” 선비의 지조가 그리운 시절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