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0일 토요일

[한겨례21] 합조단 반박에 대한 이승헌 교수·양판석 박사의 재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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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합조단 반박에 대한 이승헌 교수·양판석 박사의 재반박…
합조단의 폭발물질 분석 그래프는 점토물질 ‘깁사이트’(수산화알루미늄)와 유사해,
퇴적물이나 천안함 내부 방화재에서 나왔을 수도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이 ‘어뢰 폭발의 결정적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폭발 물질 성분 분석 결과가 단순한 점토 물질에서 나타나는 성분과 비슷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승헌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물리학)와 캐나다 매니토바대 지질과학과 분석실장 양판석 박사는 6월30일 <한겨레21>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합조단이 지난 5월20일에 발표한 자료를 토대로 분석해보니 합조단이 폭발 물질이라고 발표한 에너지분광기의 그래프는 폭발 결과물인 비결정질 알루미늄 산화물이 아니라 풍화작용에 의해 일반적으로 형성되는 점토 물질인 ‘깁사이트’(Gibbsite·수산화알루미늄 Al(OH)3)와 매우 흡사하다”고 밝혔다.

 

0.9와 0.23의 ‘천지 차이’

» 최근 ‘결정적’ 증거를 들여다보는 천안함 관련 유엔사특별감시단 일행. 사진공동취재단

이 교수와 양 박사의 공동보고서를 보면, 합조단이 에너지분광기로 흡착 물질을 분석한 결과에 나오는 알루미늄과 산소의 비율은 (알루미늄을 1로 했을 때) 천안함 선체 흡착 물질 0.92, 어뢰 파편의 흡착 물질 0.9 정도(그래프 참조)인데, 이는 폭발로 인해 생성되는 알루미늄 산화물(Al2O3)의 알루미늄-산소 비율인 0.23(미국표준기술연구소(NIST) 프로그램으로 산출)과 거리가 멀다.

두 연구자는 합조단 분석 결과에 나타난 알루미늄-산소 비율로 볼 때 합조단이 분석한 흡착 물질은 깁사이트(수산화알루미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NIST의 에너지분광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깁사이트(수산화알루미늄)의 알루미늄-산소 비율을 산출했다. 결과는 0.85(그래프 참조)였다. 두 연구자는 “합조단이 분석한 선체 흡착 물질과 어뢰 파편의 흡착 물질은 알루미늄과 산소의 비율이 깁사이트와 거의 일치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이는 합조단이 제시한 물질은 폭발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어 미 해군연구소(Office of Naval Research) 등에서 발간한 폭발 실험에 관한 논문 등을 인용하며 “폭발 뒤 나오는 알루미늄 물질로 결정질 알루미늄과 결정질 알루미늄 산화물, 비결정질 알루미늄 산화물 등이 제시돼 있으며, 깁사이트(수산화알루미늄)는 폭발의 결과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고서에서 밝힌 ‘깁사이트’(수산화알루미늄)란 물질은 무엇일까? 이는 알루미늄이 산소·수소와 결합해 형성되는 물질로 소화기 분말이나 화재를 막기 위한 방화벽의 재료로 쓰인다. 또 알루미늄이 부식할 때 생기기도 하며, 지질학계에서는 해저에서 풍화작용을 통해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도 있다고 본다.

양 박사는 “깁사이트(수산화알루미늄)는 천안함 내부에서도 발견이 가능하다”며 “(절단면에 위치한) 엔진실의 내부를 방화벽으로 만들었다면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깁사이트의 특성을 고려하면 백령도 앞바다 퇴적물에 있을 수 있고, 선체나 어뢰 등의 알루미늄 자체에서 부식 반응(녹)으로 생겼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합조단 반박은 실험 상식 벗어나”

» 알루미늄 산화물(파란선)은 알루미늄-산소 비율이 알루미늄을 1로 했을 때 0.23의 비율, 깁사이트(수산화알루미늄·빨간선)는 0.85의 비율을 보인다. 깁사이트(수산화알루미늄) 비율은 합조단의 흡착 물질 분석 결과와 유사하다. 이승헌 버지니아대 교수(물리학)와 캐나다 매니토바대 지질과학 분석실장인 양판석 박사는 이것을 근거로 합조단이 폭발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에너지분광기 분석 결과는 깁사이트에 불과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합조단은 지난 6월29일 기자협회·언론노조 등 언론단체를 상대로 한 설명회에서 양 박사가 지난 6월24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를 통해 제기한 “천안함의 흡착물은 폭발에서 예상되는 알루미늄 산화물(Al2O3)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당시 양 박사는 에너지분광기 분석 그래프상의 알루미늄-산소 비율에서 산소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볼 때 흡착 물질은 폭발의 결과물인 산화알루미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합조단은 이에 대해 “양 박사의 주장은 흡착 물질 안에 포함된 수분(습기)이 40% 정도라는 것을 간과한 결과”라며 “수분에 산소가 포함돼 있어서 산소 비율이 높게 나온 것”이라고 반박했다. 합조단은 “수분은 발표자료 가운데 에너지분광기 분석 그래프가 아닌 별도의 표에 나와 있다”고 말했다.

양 박사는 지난 6월30일 <한겨레21>과의 전자우편 인터뷰를 통해 “합조단은 자신들이 발표한 자료(표 참조)에 기록된 수분 36~42%가 폭발 물질이 함유하고 있는 ‘습기’인 것처럼 말한다”며 “하지만 이는 실험의 상식을 벗어난 말이며, 에너지분광기 분석 실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습기는 100% 제거된다”고 말했다.

양 박사는 우선 합조단의 에너지분광기 분석결과에 금(Au)이 나타난 것을 지적했다. 그는 “에너지분광기 분석에서는 시료를 전도체로 만들기 위해 금으로 코팅을 한다. 합조단도 코팅을 했다는 증거”라며 “코팅을 하기 전에 시료의 습기를 없애기 위해 오븐(또는 드라이기)에서 건조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습기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코팅을 하면서 사라지게 된다”며 “그다음이 전자선으로 시료를 쬐는 과정인데 전자선의 열은 빔 크기나 전류 세기에 따라 다르지만 물질 표면의 온도를 수백도까지 높여 습기가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공동연구자인 이승헌 교수도 지난 6월30일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합조단이 말하는 수분이라는 것은 깁사이트로 존재하는 수소와 산소를 착각한 것일 뿐”이라며 “또 에너지분광기 실험은 진공상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습기가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 합조단의 에너지 분광기 분석 결과
(알루미늄과 산소 비율이 알루미늄을 1로 했을 때 각각 약 0.92, 0.90, 0.81 정도로 나타났다)

실물은 줘도 실험물은 안 된다?

합조단이 제시한 자료인 엑스선회절기 분석결과도 습기가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하는 근거다. 양 박사는 “합조단의 엑스선회절기 분석 결과를 보면 소금(NaCl)이 보이는데, 원래 소금은 물에서 이온 상태(Na+, Cl-)로 있다가 수분을 증발시키면 소금의 결정이 된다”며 “이온 상태에서는 소금이 검출되지 않는 만큼 그 분석결과에서 소금이 보이는 것은 흡착 물질이 이미 건조됐다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말했다.

양 박사는 “지질학에서 매우 간단한 걸로 취급하는 문제로 이렇게 시달릴 줄은 몰랐다”며 “알루미늄 산화물은 고온·고압 광물이며 원래 물을 포함 할 수 없어 ‘무수광물’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또 “에너지분광기 광물 분석 후 수분이 나오면 그 광물이 함수광물(깁사이트처럼 구성성분으로 ‘OH’가 포함된 광물)이라고 표현하지 습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질학에서 상식에 속한다”고 덧붙였다.

양 박사는 “합조단이 지적한 ‘수분’을 고려하면 이 물질은 폭발과 관계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합조단에서 제시한 표(15쪽 표 참조)를 보면 Al2O3가 45~55%, H2O가 36~42%인데, 이 수치 또한 깁사이트(수산화 알루미늄)의 원소 구성 비율을 이론적으로 고려했을 때인 Al2O3 65.4%, H2O 34.6%의 비율과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합조단이 에너지분광기 분석 결과를 알루미늄 산화물이라고 주장하려면 100%의 Al2O3와 0%의 H2O가 나와야 했다”고 덧붙였다.

공동보고서에서는 합조단의 수중폭발 실험에서 나온 흡착 물질의 분석 결과도 깁사이트(수산화알루미늄)와 유사하게 나온 점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두 연구자는 “수중폭발 실험에서 나온 물질의 분석도 선체·어뢰 흡착 물질과 마찬가지로 폭발 뒤 나왔어야 하는 알루미늄 산화물이 아닌 깁사이트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수중폭발 실험 과정에서 나머지 두 흡착 물질의 결과와 유사하게 맞추기 위한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두 연구자는 “천안함 진상조사특위의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합조단에 선체, 어뢰, 수중폭발 실험 등의 세 가지 흡착 물질 샘플을 요구하자 선체와 어뢰의 흡착 물질은 제공하겠다고 하면서도 수중폭발 실험에서 나온 물질은 제공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이런 분석 결과의 의혹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동연구자인 이승헌 교수는 지난 6월30일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합조단이 공개한 실험 촬영 사진에서 보이는 정도의 양으로도 재실험은 충분하다”며 “몇mg만 있어도 가능한 실험인데 이것을 주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뭔가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 6월4일 천안함조사결과 언론보도검증위원회의 기자회견 모습. 한겨레 이종찬 기자

방법은 하나, 재실험

알루미늄을 제외한 폭약 성분(RDX, HMX, TNT 등)은 극히 미량이 발견됐을 뿐만 아니라 어뢰에서는 발견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가 ‘정황’이 아닌 ‘과학적 증거’로 폭발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은 알루미늄이다. 국방부는 지난 6월29일 설명회에서 “어뢰 추진체에서도 (폭약 성분이) 극미량 나올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고 답변했지만 여전히 옹색하다.

그런 알루미늄 성분을 둘러싸고 의혹은 계속되고 있다. 국방부는 이승헌 교수의 의혹 제기 이후 알루미늄 산화물의 존재에 대한 태도를 번복했으면서도, 정작 이 교수의 실험에 대해서는 “대장간에서 달군 쇠를 담금질한 수준”이라거나 “엉뚱한 조건에서 한 실험 결과”라고 폄하하기 바쁘다. 두 연구자는 이번 공동보고서에서 국회 등 공신력 있는 제3자가 수중폭발 실험을 할 것을 다시 한번 제안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Investigation Result on the Sinking of ROKS "Cheonan"



[naturenews] Controversy over South Korea's sunken ship

Physicists' research casts doubt on idea that North Korean torpedo downed vessel.

http://www.nature.com/news/2010/100708/full/news.2010.343.html


2010년 7월 1일 목요일

[이사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합니다”

[이사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합니다”
20년 복역한 ‘소년 빨치산’ 한창우씨
한겨레 김광수 기자기자블로그
» 한창우(80)씨
한국전 때 인민군 지원 지리산 들어가
“격동의 시절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저 살아남으려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년 빨치산’ 출신의 한창우(80·사진)씨가 한국전쟁 60년을 맞는 감회는 남다르다. 지난 26일 울산시 주전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그는 3시간 넘게 일제로부터 해방과 남북 분단에 이은 한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한 시골 소년이 어떻게 격동의 역사를 헤쳐나왔는지를 증언했다.

그는 1931년 경남 하동군 금남면에서 태어났다. 48년 17살 때 동네 친구들을 따라 남로당 소년단에 가입한 그는 그해 여수·순천사건이 발생하면서 굴곡진 인생길에 휘말렸다. “당시는 지리산 주변지역이 대부분 남한 단독정부에 부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소년 17명이 있었는데 모두 소년단에 가입했죠.”

50년 한국전쟁 직전에는 여운형 선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주민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아버지를 잡으려는 경찰에 대신 끌려가 카빈총에 손가락을 끼우고 꺾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6·25가 터지자 섬진강 하류 쪽으로 피난했던 그는 북의 인민군이 지리산까지 밀고 내려오자 살아남고자 의용군에 지원했다. “지리산 골짜기에 미군 흑인들의 주검이 즐비했습니다.”

국방군과 지리산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인민군은 그해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고립되자 북으로 올라갔고 귀향하려던 그는 의용군 5명과 함께 빨치산을 찾아 지리산으로 떠났다. “국방군에 체포될까봐 두려웠죠.”

9월 하순 빨치산을 만났다. 그런데 무기가 없어 죽창을 만들어 국방군과 경찰에 맞섰다. 빼앗은 무기가 늘어나면서 무장 대오가 늘어나 51년 4월 경남도유격대가 결성됐다. “52년 겨울 산청쪽 골짜기에서 60여명의 군경 포로가 잡혔어요. 토굴로 데려가서 소고깃국에 밥을 먹이고 부상자를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포로들 가운데 대다수가 스스로 빨치산으로 남았어요.”

그러나 국군과 경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기세가 꺾인 유격대는 그해 1월 2차 공세 때 2000여명 가운데 3분의 2가 숨졌다. 53년 7월 정전협정 뒤에는 50여명만 남았다. 토벌대에 쫓기던 그는 하동군의 누나 집에 은신해 있다가 자형의 신고로 54년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0년으로 감형됐다. 전주교도소에서 20년을 복역한 뒤 74년 44살에 석방됐다.


출소한 뒤 여느 장기수들처럼 그 역시 어렵게 생활했다. 결혼을 해 2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오리를 키우고 감옥에서 배운 침술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80년대부터는 부산에서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빨치산은 뿔 달린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격동의 한반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스러져간 모든 영혼들이 생각난다”고 말하던 그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울산/글·사진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