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일 목요일

[이사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합니다”

[이사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합니다”
20년 복역한 ‘소년 빨치산’ 한창우씨
한겨레 김광수 기자기자블로그
» 한창우(80)씨
한국전 때 인민군 지원 지리산 들어가
“격동의 시절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저 살아남으려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년 빨치산’ 출신의 한창우(80·사진)씨가 한국전쟁 60년을 맞는 감회는 남다르다. 지난 26일 울산시 주전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그는 3시간 넘게 일제로부터 해방과 남북 분단에 이은 한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한 시골 소년이 어떻게 격동의 역사를 헤쳐나왔는지를 증언했다.

그는 1931년 경남 하동군 금남면에서 태어났다. 48년 17살 때 동네 친구들을 따라 남로당 소년단에 가입한 그는 그해 여수·순천사건이 발생하면서 굴곡진 인생길에 휘말렸다. “당시는 지리산 주변지역이 대부분 남한 단독정부에 부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소년 17명이 있었는데 모두 소년단에 가입했죠.”

50년 한국전쟁 직전에는 여운형 선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주민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아버지를 잡으려는 경찰에 대신 끌려가 카빈총에 손가락을 끼우고 꺾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6·25가 터지자 섬진강 하류 쪽으로 피난했던 그는 북의 인민군이 지리산까지 밀고 내려오자 살아남고자 의용군에 지원했다. “지리산 골짜기에 미군 흑인들의 주검이 즐비했습니다.”

국방군과 지리산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인민군은 그해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고립되자 북으로 올라갔고 귀향하려던 그는 의용군 5명과 함께 빨치산을 찾아 지리산으로 떠났다. “국방군에 체포될까봐 두려웠죠.”

9월 하순 빨치산을 만났다. 그런데 무기가 없어 죽창을 만들어 국방군과 경찰에 맞섰다. 빼앗은 무기가 늘어나면서 무장 대오가 늘어나 51년 4월 경남도유격대가 결성됐다. “52년 겨울 산청쪽 골짜기에서 60여명의 군경 포로가 잡혔어요. 토굴로 데려가서 소고깃국에 밥을 먹이고 부상자를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포로들 가운데 대다수가 스스로 빨치산으로 남았어요.”

그러나 국군과 경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기세가 꺾인 유격대는 그해 1월 2차 공세 때 2000여명 가운데 3분의 2가 숨졌다. 53년 7월 정전협정 뒤에는 50여명만 남았다. 토벌대에 쫓기던 그는 하동군의 누나 집에 은신해 있다가 자형의 신고로 54년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0년으로 감형됐다. 전주교도소에서 20년을 복역한 뒤 74년 44살에 석방됐다.


출소한 뒤 여느 장기수들처럼 그 역시 어렵게 생활했다. 결혼을 해 2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오리를 키우고 감옥에서 배운 침술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80년대부터는 부산에서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빨치산은 뿔 달린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격동의 한반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스러져간 모든 영혼들이 생각난다”고 말하던 그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울산/글·사진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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