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16일 일요일

구증구포

구증구포가 살아있는 그곳 보림사, 불갑사(퍼온글)

구증구포, 그것은 전설이 아니었다

운암(차문화연구가)

한국차의 전통적 제다법은 무엇인가.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말린 구증구포(九蒸九曝)인가, 그도 아니면 반발효차인가. 한국차 제다법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하게 정립된 것은 없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6대 다류가 있다. 녹차(綠茶), 백차(白茶), 황차(黃茶), 청차(靑茶), 홍차(紅茶), 흑차(黑茶), 화차(花茶)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차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 덖음차로 구분 짓는다. 최근 녹차 외에도 한국 덖음차의 신주류를 이루는 차로 황차가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말린 차가 주류였다.
최근 제다인 사이에 구증구포란 한약제를 만들 때 사용되지 차를 만들 때에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구증구포는 전설이 아니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차를 연연히 전승해 온 한국 고유의 제다법임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최근 우리 제다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것은 우리 전통제다법 중 하나인 구증구포(九蒸九曝)가 실제 존재하는가였다. 구증구포란 한방에서 약재를 만들 때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일을 말하는데 『본초경』에 처음 등장한 이후 약재를 조제할 때 쓰여져 왔다. 그 뒤 구증구포란 말은 한방에서 한약을 제조할 때의 과정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이 구증구포란 말이 우리 덖음차 제조법에 심심찮게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차 애호가들 사이에 구증구포로 만든 차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아예 차통에다 구증구포로 만든 차를 붙일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이유인 즉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덖은 차야말로 약이 된다는 이야기가 유전되면서 구증구포의 열기는 뜨거워졌다.
구증구포 전통을 이어 온 다승 수산 스님(본지 2003년 6월호)이 보도되면서 구증구포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배하기 시작했다. 제다인들은 구증구포란 한약제를 만들 때 쓰는 말이지 차를 제조할 때는 아홉 번 덖는 과정에서 찻잎이 파괴되어 차의 맛과 향을 제대로 낼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얼토당토않다는 말을 해 왔다.
구증구포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담으로 거론되면서 차계는 구증구포 바람에 휩싸였다. 그 뒤 필자는 전통을 이어 온 사하촌 주변의 마을을 취재하면서 옛 덖음차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촌로들에게 “차란 첫손에 잘 볶아져야 제맛을 내지”라는 말을 들었다. 이는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아홉 번을 볶든 100번을 볶든 첫솥에 제대로 볶아지지 않은 차는 아무리 볶아도 차맛을 제대로 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구증구포의 옛 정통을 이어가고 있는 수산스님의 제다비법이 공개된 뒤 꼭 1년만에 새로운 사실이 알려졌다. 지난 8월 27일 순천 선암사에서 열린 한국전통차문화 심포지엄에서 호남의 차문화전통을 발표한 동국대 김상현(金相鉉) 교수가 조선 말기 문신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문집인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열람하다가 구증구포란 기록을 발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 교수는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구증구포란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차에도 구증구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서 구증구포 제다법이 공개되면서 차계가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때 김 교수에게 구증구포의 전통을 이어가는 스님이 있다고 말하자 매우 놀라워하면서 그 스님 이야기를 미리 알았으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선다의 고향, 보림사

구증구포의 전설을 간직한 보림사는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 자리잡고 있다. 몇 해 전 보림사는 전남의 식수원 타개를 위해 건립 중에 있는 장흥댐 공사로 인해 역사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보림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보림사 주변 3㎞까지는 공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2005년 1월 수몰되면서 유치면 일대는 많은 변화가 올 것이다. 그 현장을 더듬어 보면서 지난 23일 보림사를 찾았다.
보림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가지산파로 우리나라 선문을 열어놓은 곳이다. 육조혜능의 법증손 되는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도의국사가 선문(禪門)을 여니 우리나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이 태동한다. 그 법은 강서 마조도일의 선맥으로 이어진다. 도의는 염거(廉居)에게, 염거는 보조체징(普照體澄?804~880)에게 인가하니 구산선문의 효시를 이루었고 그 효시가 된 가지산문이 태동한다.


전남 장흥 보림사에 세워진 보조체징창성탑비 비문에 ‘차약’과 제호가 나온다. 창석탑비(왼쪽)와 탑비속에 보이는 차약이란 글(오른쪽)

가지산파는 염거의 뒤를 이어 보조체징에 의해 열매를 맺는다. 차문화를 일군 보조체징은 끽다거 화두를 탄생시킨 조주와 같은 문파로, 보조체징 선사가 20년간 주석한 가지산 보림사는 육조혜능 대사가 주석했던 광동성 소주 조계산 보림사에서 따와 헌강왕이 이곳을 동국선종의 총본산을 인가해 준다.
그만큼 의미가 깊은 보림사는 선다의 고향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보림사 일주문에 이르니 선종 총본산 가지산 보림사 현판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오르니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가 있다. 보조선사탑비를 보니 ‘차약(茶藥)’이란 구절이 나온다.
대중 13년(859) 헌안대왕 즉위 이듬해 장흥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을 시켜 차와 약을 보내 보조체징을 극진히 맞게 했다. 『보림사사적기(寶林寺事蹟記)』에는 “선사는 동국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나서 서역과 중국에 출입해 지혜의 빛이 널리 비추고 도의 눈이 멀리 보아서 한 모양으로써 이름을 지어 삼국에 두었나니 묘법을 마음에 얻은 이가 아니시면 능히 이러하겠는가” 하고 선사를 칭송하는 글이 있다.

구증구포로 만든 보림차

조선말기 문신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를 보자. 차를 즐겼던 이유원은 임신년(1872?고종9) 상원(上元)에 사시향관(四時香館)에 있으면서 고경선사(古鏡禪師)와 보림차를 마시면서 우리나라 최고 품질의 명차라고 평했다.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보림차의 법제와 품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진 보림사 대밭의 차는 열수 정약용이 체득하여 절의 승려에게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은 보이차 못지 않으며 곡우 전에 채취한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이는 우전차(雨前茶)라고 해도 될 것이다.

康津 寶林寺 竹田茶 丁洌水若鏞得之 敎寺僧以九烝九曝之法 其品不下普휴茶 雨穀雨前 所採尤貴 謂文以雨前茶可也
- 『林下筆記』 券 32


 

구증구포 제다방법이 19세기 경에 조선 땅에 성행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기록이다. 범해의 다가(茶歌)에서도 “보림사 작설은 감영에 실어간다”고 했다. 또한 초의는 그의 스승인 완호대사를 위해 삼여탑(三如塔)을 건립한 다음 해거(海居) 홍현주에게 명(銘)과 시를 부탁하고 자하신위에게 서문을 부탁하면서 보림차를 선물한 바 있다. 보림차가 당시 호남 최고의 차로 손색이 없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첫솥에 잘 볶아야 명차이다

19세기 후반 최고의 명차로 이름을 떨친 보림차는 다산이 보림사 승려들에게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유원의 기록과는 달리 다산의 문집에는 “차를 아홉 번 비벼 말리는 법을 간단하게 줄여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두 문집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앞으로 보림사의 차의 법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위) 보림사 사하촌에 서는 대대로 돈차와 수제차 등을 만들었다. 아래) 당시 유행했던 청태전(靑苔餞)과 약탕기

40년대 후반 보림사에서 돈차를 만들었던 조성호 거사는 “차를 만들 때 첫솥에 잘 볶아야 제맛이 나고 또한 맛과 향이 제대로 우러나야 진정한 차”라고 말했다. 한국 최고수 수제차의 달인 법일 스님의 지론 또한 같다. “차를 볶을 때 첫솥에서 잘 볶아야 되고 그 뒤 유념과정에서 차맛이 결정된다.”
보림사 사하촌에서 대대로 차를 만들어 온 이영애 보살의 이야기에도 공통점이 드러난다. “구증구포로 하면 좋겠지만 여섯 번 볶아도 차의 향기가 제대로 우러난다면 여섯 번 볶아도 무난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한다. 이처럼 구증구포의 제다법을 놓고 주장이 일치하지 않는점도 있지만 차의 맛과 향이 제대로 우러나야 진정한 명차라는 공통점은 같다.
그렇다면 약제로 사용했던 구증구포의 전통은 있었는가. 지난해 5월 필자는 7시간에 걸친 수산 큰스님(85?고불총림 방장)의 구증구포 제다 과정을 보면서 그 해답을 얻었다.

구증구포 지켜온 수산 큰스님

서옹 선사의 열반 이후 고불총림 방장에 오른 수산 스님은 40년간 우리 불가의 전통제다법을 이어 온 산증인이다. 스님은 192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1940년 백양사로 출가, 1941년 만암 스님의 휘하에서 다각승으로 1년을 닦았다.


1. 구증구포로 법제하는 수산스님 2. 덖고 비비기를 연속하는 스님들 3. 아홉번 덖고 비비고 난 후의 모습

수산 스님은 1930년대 후반 강진의 월남사지 부근에서 백운옥판차를 만들고 있던 이환영 씨를 만나 백운옥판차의 제조기술을 터득, 구증구포 방법으로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산 스님의 지론은 찻잎을 채취할 때의 향기와 마지막 아홉 번 덖을 때의 향기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장갑을 끼고 차를 덖으면 손끝으로 감지하기 어려워 장갑을 끼면 안된다는 지론이다. 다선삼매의 경지에서 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스님은 아홉 번을 덖을 때 차가 이미 발효되면서 뜨거운 열탕으로 차를 우려낼 때 제 맛이 난다고 했다. 그래서 수산스님 차의 포법은 뜨거운 열탕으로 우려낸다.
최고수 전통수제차의 특징은 온몸으로 차향을 감지한다는 점이다. 과거 전통이 남아있는 보림사와 불회사, 대흥사 주변의 사하촌에는 아직도 40년대 차제조법이 할머니들에게 전승되고 있다.
이들 녹차의 공통점은 뜨거운 열탕으로 우려낸다는 점이다. 80℃ 식힘사발로 우려내고 있는 현재의 제다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식 다도와 제다법이 한반도에 깊숙이 자리잡은 현재에는 언제부터인지 일본 야부기다 차나무에 일본식 다도를 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는 이정애(78세) 할머니로부터 “뜨거운 물에 찻잎을 한 움큼 넣고 차를 달여 먹으면 감기가 저절로 낫는다”는 말을 들었다. 보조체징선사비석에 있는 ‘차약’이라는 글이 와 닿는다.
보림사의 차밭을 걸으며 보림사 승려들이 구증구포 방식으로 만든 보림차의 전통을 계승 발전되기를 기대해 본다.
19세기 보림사 스님들은 보림차를 들면서 노동의 칠완다가를 읊으며 다선의 향기에 젖었다. 그 향기는 보림차의 향기만큼 아름다웠다. 여보게, 보림차 한잔 드시게.


인터뷰

보림차의 산증인 이정애 할머니

전남 장흥의 보림사 주변에는 아직도 몇 채의 집들이 남아있다. 이들 집은 수몰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제된 집들이다. 보림찻집 아래를 지나면 이정애 할머니의 집이 나온다.




 


올해 78세인 할머니는 20세에 시집와 시어머니 최은혜 씨로부터 전수받은 보림사 돈차(엽전 모양의 차)를 만들었던 산 증인이다. 할머니는 아직도 그 때의 일을 어제일처럼 소상히 기억해내며 시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돈차 만드는 비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곡우 전후에 보림사 차밭에서 찻잎을 채취한 뒤 그 찻잎을 절구통에 쪄서 엽전처럼 철사로 동여맨 뒤 기둥 옆에 걸어두고 봄, 여름을 지나 겨울철이 되면 상비약으로 썼다고 한다. 돈차 하나를 펄펄 끓는 물에 넣고 차를 우려내 마신 뒤 땀을 흘리면 감기가 뚝 떨어졌다. 돈차와 생강, 계피를 넣어서 펄펄 끓는 물에 넣고 먹으면 그것이 바로 약이 되었단다. 그 무렵 마을 노인들 거의가 돈차를 만들었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그 돈차를 사람들이 많이 가져갔었다.
돈차는 대략 1938년 봄 유치면 용덕리 이석금 노인(62)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그 뒤 그 소문이 퍼져 마을 전체로 확산되었다. 돈차는 보림사 주변의 유치면 사람들이 만들기 시작하다가 1919년 사라졌다. 그 뒤 작설차를 마시게 되어 돈차는 한반도 땅에서 사라졌다.
돈차에 자연 작설차로 차문화가 바뀌게 되었다.
할머니는 22살 때 시어머니를 따라 돈차를 만들기 시작했고 해방이 되기 직전까지 만들었다. 그 뒤 작설차를 지금까지 만들어오고 있는데, 아홉 번을 넘지 않고 대여섯 차례 비벼서 만든다. 할머니가 만든 차는 뜨거운 열탕으로 우려내야 제맛이 난다고 했다. 1년에 60여 통을 만드는데 한 통에 2만원씩 파는데 7월이면 모두 나간다고 한다. 그만큼 이 할머니가 만든 차를 찾는 차꾼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찻잔에 차를 우려내자 진한 녹색향기가 났다. 그 차를 마시자 온몸에 차향이 베는 것 같다. 할머니를 통해 듣는 보림사 차의 역사를 살펴보건데 분명히 구증구포로 만들었다는 사실과 엽전모양의 돈차를 거쳐 작설차로 이어지기까지 거의 100여년 전 보림차의 차 만드는 비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 할머니의 수제차비법이 오래도록 전승되길 기대하며 보림사를 떠났다.



출처:"茶의 세계" 200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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