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8일 목요일

전쟁 광기에 스러진 민간인 ‘원혼’ 100만 : 사회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전쟁 광기에 스러진 민간인 ‘원혼’ 100만 : 사회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전쟁 광기에 스러진 민간인 ‘원혼’ 100만 △ 한국전쟁때 민간인 1천여명이 우익단체 등에 학살당했다는 증언이 꼬리를 물던 경기 고양시 금정굴에서 1995년 9월 유골 발굴작업을 한 결과 적어도 153명의 유골이 발견됐다. 고양 금정굴학살 공대위 제공 호국·보훈의 달인 6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은 ‘성수기’다. 때맞춰 교육당국은 ‘남북 화해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6·25를 계기로 안보의식 강화 교육을 실시하라’는 공문을 일선학교에 보냈다. 일요일이면 부모 손을 잡고 체험학습차 기념관을 찾은 초등학생이 특히 눈에 많이 띈다. 인천 연성초등학교 6학년생인 가영이도 그렇게 ‘호국의 전당’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1층 6·25전쟁실(Ⅰ)의 ‘학도의용군의 포항여중 전투’ 장면을 재현한 곳. 한참을 바라보던 가영이는 작은 손으로 눈과 입을 가린 채 “징그럽고 무서워”라며 엄마 품으로 달려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생 딸아이의 손을 잡고 기념관을 찾은 전홍수(39)씨 부부는, 움집에서 피난민들이 송기(소나무 속살)를 먹는 장면이 재현된 곳 앞에서 “우리 부모님도 전쟁 때 저런 생활을 하셨겠지”라며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바로 옆의 ‘해태 커피 카라멜’ 갑을 보고는 “해태가 그렇게 오래됐나”라며 조르르 발길을 옮겼다. 지금 전쟁기념관 방문객의 대부분은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이다. 이들에게 ‘전쟁’은 닿을 듯 말 듯한 그 무엇이다. 참혹하기도, 신기하기도 한 그 무엇 …. 전쟁기념관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 방향성은 기념관 양편 복도에 즐비한 17만585명(6·25전쟁기 15만2279명)의 창군 이후 한국군 전사자 명단과 3만7645명의 유엔군 전사자 명비에 오롯이 담겨 있다.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영령들을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합시다.” ‘해병대 2대대 상병 9201873 좌태윤 50.9.23 10고지 제주 용담 ….’ 한국전쟁이 앗아간 목숨은 군인들만이 아니다. 그만큼이나 많은,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민간인이 죽임을 당했다.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현 군사편찬연구소)가 1997년 말 펴낸 〈한국전쟁〉을 보면, 전쟁 중 쌍방 인명 피해는 군인(유엔군·중국군 포함) 322만명, 민간인 249만명에 이른다고 돼 있다. 같은 연구소가 96년 말 펴낸 〈한국전쟁피해 통계집〉을 보면, 전쟁 중 남쪽의 민간인 피해는 99만968명이고, 이 가운데 12만8936명(남자 9만7680명, 여자 3만1256명)은 ‘학살’당한 것으로 돼 있다. 공보처 통계국이 53년 7월27일을 기준으로 작성한 이 통계에서 ‘학살’의 주체는 북한 인민군과 좌익이고 피해자는 남쪽 민간인이다. 북한은 미군의 폭격으로 북쪽 지역에서만 10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한국전쟁 때인 1951년 4월 대구 인근에서 국군이 부역 혐의자로 지목된 이들을 집단으로 구덩이로 끌고가 죽이고 있는 장면. 이도영(57·재미) 박사 제공 그러나 여기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전쟁기록에 담겨 있지 않은 또다른 ‘숨겨진 죽음’이 있다. 국군·미군·경찰·우익 민간단체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이는 경남 거창 등 42개 지역에서 8715명이 학살당했다는 4·19 직후 국회 ‘양민학살조사특위’의 조사 결과와, 이미 특별법이 제정된 거창과 제주 4·3 사건 및 미국 정부의 유감 표명이 있었던 노근리 사건 등을 통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는 올해 초 내놓은 〈전쟁과 집단학살〉이라는 종합보고서에서 100만명 남짓한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범국민위가 지금까지 31개 유족회와 각지 피해(가해)자들의 증언, 각급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등을 취합한바,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휴전선 남쪽 지역에서만 200여 곳에 이르며, 그 수는 계속 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범국민위 이창수 정책기획실장은 “정확한 규모는 국가 차원의 철저한 진상규명 작업을 거쳐야 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이 전하는 죽음은 참혹하고 황당하다. 경북 문경 석달동에선 49년 12월24일 국군이 ‘공비 소탕’을 이유로 마을주민 127명 가운데 86명을 죽였다. 이 가운데 5명은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이름조차 없는 젖먹이였는데, 호적엔 사망이유가 ‘공비’라고 적혀 있다. 누군 보도연맹원이란 이유로 총살돼 불에 타죽고, 누군 웅덩이에 묻혀 죽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일반 ‘양민’이었다는 게 학자들의 지적이다. 반세기 전 이 땅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은 민간인 피학살자들을 모두 좌익으로 분류했고, 유가족들을 ‘부역자’라 부르며 연좌제 올가미를 덧씌웠다. 죽은 자는 물론 살아남은 자들 또한 평생을 ‘이등국민’으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또 ‘국가안보’란 이름으로 숨겨져 왔다.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던 유족회 노래처럼, ‘기억의 방향’을 돌려 망각을 일깨우기 위한 힘겨운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국회엔 2001년 9월 김원웅 의원 등 47명이 발의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통합 진상규명법안)이 이태째 계류돼 있다. 또 전남 함평, 경북 문경 등 10여건의 지역별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입법청원도 접수돼 있다. 국방부엔 모두 73건(미군 관련 54, 국군 관련 19건)의 민간인 학살 피해 사례가 민원으로 접수돼 있다. 그러나 국회는 ‘입법의 의무’를 외면하고 있고, ‘군인들의 충정·애국심 폄하 우려’ 등을 이유로 통합 진상규명법 제정에 반대하고 있는 국방부 등 정부의 태도도 미온적이긴 마찬가지다. 전쟁의 광기는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다. 좌익과 우익도 가리지 않는다. 반세기 전의 광기와 그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놓으며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정전 반세기, 한반도에 또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9·11 테러 사태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초토화했던 미국은 이제 북한을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있고, 북한 또한 이에 맞서 ‘핵 억지력’을 내세우며 위험한 곡예를 거듭하고 있다. 반세기 전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짙게 드리워진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이 난다면 피터 브룩스 전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는 “전쟁 초기 몇시간 또는 며칠간 한국은 ‘지옥과 같은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북폭’을 심각하게 고려하던 94년 5월19일 윌리엄 페리 당시 미 국방장관은 군 통수권자인 빌 클린턴 대통령한테 이렇게 보고했다고 한다. “최초 3개월간 미군 사상자 5만2천명, 한국군 사상자 49만명은 물론이고, 여기에 더해 엄청난 수의 북한군과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것 ….” 지금 우리는 안녕한가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희생자 집계는 아직 ‘전쟁중’ ‘잊혀진 전쟁’. 외국의 한국 현대사 전문학자들이 부르는 한국전쟁의 다른 이름이다. 1·2차 세계대전을 빼고는 지난 200년 중 가장 치열했던 전쟁의 하나로 꼽히지만 그 실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탓이다. 인명 피해 규모가 대표적인 경우다. 남과 북, 유엔사 등 발표 주체마다 그 수치가 제각각이다. 국방부 국방연구소(현 군사편찬연구소)가 1997년 펴낸 〈한국전쟁〉은 전쟁 중 쌍방 인명 피해를 군인(유엔군·중국군 포함) 322만명, 민간인 249만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연구소가 96년 말 펴낸 〈한국전쟁피해통계집〉을 보면, 전쟁 중 한국군 사망 및 실종자는 15만7291명(실종 1만9392명)이고, 남한 민간인 피해는 99만968명(사망 24만4663, 학살 12만8936, 행방불명 30만3212, 납치 8만4532명)에 이른다. 국방부가 작성한 〈한국전란 4년지〉를 보면, 북한 쪽 피해는 인민군만 사망 50만8797명, 실종·포로 9만8599명의 피해를 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군사정전위편람〉은 인민군 사망 52만, 실종·포로 12만명으로 잡고 있다. 북한은 인명 피해 관련 자료를 제대로 내놓지 않고 있다.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펴낸 〈조선전사 27〉을 보면 남한군과 유엔군의 피해를 156만7128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북한쪽 피해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다만 북한은 미군의 폭격으로 북쪽 지역에서만 학살당한 민간인이 100만명 남짓이라고 밝혔다. 한때 일본에서 동포들을 대상으로 발행되던 주간 〈통일조선신문〉은 70년 6월27일치에서 남쪽은 물론, 북한의 인민군(사망 29만4151, 실종 9만1206, 부상 22만5849명)과 민간인(사망 40만6천, 실종 68만, 부상 159만4천명) 피해 규모를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대체로 남쪽 자료엔 북쪽의 피해가, 북쪽 자료엔 남쪽 피해가 크게 잡혀 있지만 전체상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통계청이 작성한 당시 총인구 추이도 전쟁중 인명 피해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49년 2981만1천명이던 남북한 총인구는 7년 뒤인 56년 3008만3천명으로 27만2천명 증가에 그쳤다. 반면 56~60년 사이 남북한 총인구는 517만9천명, 44~49년 사이에도 391만1천명이 늘었다. 전쟁 때 참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음을 보여준다.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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