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2일 수요일

6·25 직후 '서울사수' 방송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잘못 판단했어. 이렇게 빨리 부산에 오지 않아도 되는 건데···. 미국 사람들 정보에는 왜 이렇게 엉터리가 많지!" 부산에 도착해 전화로 국방부 장관을 불러, 아직 한강방어선이 지켜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는 말이다.

대전에서 호남을 돌고 돌아 위험한 뱃길로 온 고생에 화가 난 것이었다. 대전에서 대구는 지척이다. 처음처럼 기차로 가면 두 시간 거리인데, 왜 그랬을까. 한 측근이 추풍령 일대에 빨치산이 준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미군정보를 귓속에 불어넣었다. 우리 군경에 명령을 내려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가면 될 것을, 국군보다 미군을 믿은 탓이었다.

그러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대통령이었다. 국회가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결의를 통과시켰지만 소용없었다. 정부를 따라 대전으로 내려온 신익희(申翼熙) 의장과 조봉암(曺奉岩) 장택상(張澤相) 의원이 충남지사 관저로 이 대통령을 찾아가 국회결의를 통보했다. 국민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국회의 뜻'이었다. "내가 왜 사과를 해? 사과하려거든 당신들이나 해요." 즉석에서 돌아온 응답이 이랬다.

사과는커녕, 다리가 끊겨 피란을 가지 못 한 시민들에게 '부역자' 누명을 씌운 서울 잔류인 조사는 또 무언가. 9·28 서울수복 후 '잔류파' 시민에게 가한 혹독한 사상검증도 대통령 뜻이었으니, 적반하장도 이럴 수는 없다. 보도연맹 사건이다, 국민방위군사건이다, 하는 학살극과 치사극의 정점에도 그가 있었으니, 그에게 국민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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