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2일 일요일

[오마이뉴스] 백선엽의 민낯, 대한민국에 그가 존경받으며 누울 곳은 없다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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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평안도로 귀향한 백선엽은 그해 12월 38선을 넘은 뒤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해 친미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6년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한 그는 1948년 정부 수립 뒤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숙군 작업을 벌였다. 분단반대나 친일 청산 같은 민족주의적 흐름을 좌익이나 빨갱이로 규정하고 이를 육군에서 배제하는 작업을 지휘한 것이다.

1949년 7월 제5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선엽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4월 소장 진급과 함께 제1군단장 취임에 성공했다. 1952년 1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9월에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취임했다.

1953년 1월에는 국군 최초로 대장 진급에도 성공했다. 이처럼 해방 뒤의 백선엽은 눈부신 '성공'의 길을 걸어나갔다.

미래통합당과 보수세력은 백선엽이 북한의 침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대한민국을 지켰다고 하려면 대한민국 국민을 지켰어야 한다. 그런데 백선엽은 오히려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했다.

백선엽은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었다. 이 부대는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범죄 집단이었다.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에서 민간인을 약탈하고 특히 여성들에게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국민들을 겁주는 역할을 맡은 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는 육본 정보국의 지휘를 받았다. 백선엽이 정보국장일 때 이 부대의 만행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한국전쟁 중에도 있었다. 백선엽이 이끄는 특수부대인 백야사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 역시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 지리산 일대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이 아무나 마구 죽였다는 점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4일까지 거둔 '전과'에서도 드러난다. 이들은 4000명의 빨치산을 상대로 작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사살한 이들은 총 6600명이다.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였던 것이다.

백선엽이 몸담은 간도특설대는 항일 군대를 잡겠다며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이런 행동 패턴이 백선엽의 해방 이후 행적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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