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5일 금요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17> 코우덱스의 여로심리학자 카를 융에게 헌정된 제1 코우덱스

도올 김용옥 제24호 20070825 입력

올드 카이로(Old Cairo)에 있는 콥틱박물관 입구 정문. 그 철문에 콥틱박물관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도마복음서는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국기 오른쪽에 있는 벽돌 건물은 로마황제 트라얀(Trajan)에 의하여 AD 98년에 건설된 강변 경비타워의 잔해이다. 그때만 해도 나일강이 이 타워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박물관 왼쪽으로는 성 조지 교회(Church of St. George)가 자리 잡고 있다. 성 조지는 AD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에 용감히 저항하여 순교한 인물로 초기 기독교에서는 매우 존숭받는 성자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로마 병정이었다.[임진권 기자]

1947년 9월 장 도레스(Jean Doresse)라는 젊은 프랑스인 대학원학생이 카이로에 도착한다. 도레스는 바로 우리가 여태까지 논구해온 파코미우스, 팔라몬, 성 안토니 등 초기 콥틱기독교의 역사를 전공하는 콥틱어 전문가였다. 47년 가을 이집트에는 콜레라 유행병이 휩쓸며 5000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다. 프랑스 정부는 도레스에게 이집트 여행을 삼가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도레스는 카이로에 있는 프랑스고고학연구소(the French Institute of Archeology at Cairo)의 초청으로 나일강 상류지역의 콥틱기독교 유적을 조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3개월 체류의 장학금을 받은 그는 모처럼만의 여행기회를 취소할 수가 없었다. 30세의 그는 용감하게 아내 마리안느(Marianne)와 함께 카이로에 도착했던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콥틱박물관(the Coptic Museum)으로 달려가서 토고 미나 관장을 만났다. 미나 관장은 프랑스 유학시절에 마리안느와 같이 수학한 동창생이었던 것이다. 이때 이미 미나의 손에는 알키스가 판 제3 코우덱스가 쥐어져 있었다. 일별한 도레스는 이것이 3·4세기의 문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 보존상태와 규모로 보아 인류사의 한 획기적 발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영지주의의 신화구조가 단순한 기독교 외경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의 가장 심오하고도 보편적인 집단무의식의 한 표출이라고 파악한 위대한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

당시 미나는 또 하나의 코우덱스가 카이로의 칸 칼릴(Khan Khalil)지역에 있는, 벨기에 출신의 골동상 알버트 에이드(Albert Eid)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후 도레스와 미나는 에이드를 방문한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진리복음서(The Gospel of Truth)를 포함한 제1 코우덱스였다. 당시 에이드는 카이로 어딘가에 더 많은 코우덱스가 떠돌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에이드가 자기 골동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떠벌리는 수작으로만 알았고 그 전설적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했다. 하여튼 이제 제1 코우덱스와 제3 코우덱스는 확고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온 셈이다.

도레스는 혹시나 해서 몸소 나그함마디 지역을 헤매었다. 비행기로 일단 룩소르까지 갔으나 콜레라 비상으로 나그함마디행 열차는 운행이 중단되어 있었다. 그는 어렵게 어렵게 몇 주 동안 탐험을 계속했다. 나 도올의 일행이 다닌 바로 그 지역이었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사람들은 그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의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국 후 권위있는 프랑스 고문헌아카데미에서 이 문서의 발견을 보고했다. 1948년 2월 23일 르몽드지는 “4세기 파피루스문헌의 발견”이라는 제목 하에 단 3줄의 소략한 기사를 실었다: “고문헌아카데미 학회에서 152페이지에 달하는 파피루스의 책 한 권이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여태까지 출판된 적이 없는 5개의 영지주의 문서의 콥틱어 번역이다. 이 시대의 신앙체계에 관한 재미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카이로의 대표적인 골동상으로서 키프로스섬 출신의 타노(Phocion J. Tano)가 운영하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카이로 부근 대피라미드가 있는 기자(Giza)에서 일하고 있던 엘카스르 출신의 농부 하나가 자기네 동네에서 옛 파피루스문헌이 떠돌고 있다는 정보를 타노에게 귀띔해주었다. 타노는 곧 나그함마디 지역을 관장하는 케나(Qena) 골동상 자키 바스타(Zaki Basta)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정보가 있으니 한번 확인해보라고 일러주었다. 자키 바스타는 엘카스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애꾸눈 깡패두목 바히즈 알리(Bahij Ali)를 수배했다. 바히즈 알리는 두 개의 코우덱스를 무함마드 알리로부터 단돈 몇 천원 주고 샀다. 그리고 자키 바스타와 함께 카이로로 가서 타노에게 큰돈을 받고 팔았다. 제2, 제7 코우덱스였다. 바로 이 제2 코우덱스 속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도마복음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장면들이다.

무함마드 알리의 손때가 묻은, 파피루스 코우덱스를 포장한 가죽 표지. 4세기. 카이로 콥틱박물관 소장.

애꾸눈 바히즈 알리는 카이로에서 엘카스르로 귀향하자마자 즉시 무함마드 알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알리네 집에 남아있던 코우덱스를 푼돈에 싹쓸이했다. 돈독이 오른 바히즈 알리는 이번에는 중간상을 배제하고 직접 타노에게로 가서 거액을 요구했다. 타노는 그것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거부 집안의 유명한 컬렉터 마리카 다타리(Marika Dattari)양을 접선했다. 다타리는 그 가치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구매하여 타노에게 맡겼다. 결국 대부분의 코우덱스가 타노에게로 수집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코우덱스를 다타리-타노 코우덱스(the Dattari-Tano Codices)라 명명케 된 것이다. 이 다타리-타노 컬렉션의 소식을 들은 도레스는 1948년 10월 다시 카이로를 방문하여 그 존재와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

하여튼 이 스토리에서 가장 재미를 본 작자는 애꾸눈 바히즈 알리다. 그놈은 그 돈으로 거대한 농장을 샀다. 가장 피를 본 친구는 무함마드 알리인데 애꾸눈에게서 한 푼도 얻어먹지 못하고 이만 갈았다. 나 도올이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이들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 ‘예수의 저주’에 걸려 사라졌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제1 코우덱스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제1 코우덱스를 장악하고 있었던 알버트 에이드는 유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좀 질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미나 관장은 에이드에게 이 문서를 해외로 반출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러나 에이드는 공항의 세관원들을 매수하여 밀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코우덱스를 미국시장으로 가지고 갔다. 처음 그는 미시간대학 도서관에 2만 달러를 요구했다. 미시간대학은 너무 비싸다고 구입을 거절했다. 그 뒤 그는 뉴욕에 가서 볼링겐 파운데이션(Bollingen Foundation)에 접근하여 1만2000달러를 요구했다. 그러나 볼링겐 파운데이션은 사적인 책 구입은 안 한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안전하게 맡겨놓게나 해달라는 부탁마저 거절해버렸다. 에이드는 화가 나서 브뤼셀로 건너가 그곳 은행의 안전금고에 코우덱스를 넣고 덜커덩 잠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저주에 걸렸는지 이듬해 죽고 만다.

그 뒤 이 코우덱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코우덱스의 소식을 들은 사람 중에 프로이트의 의식세계를 더 심층으로 진화시킨 그 유명한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있었다. 융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융 인스티튜트(the Jung Institute)의 마이어(C. A. Meier)에게 그 코우덱스를 구입할 것을 권유했다. 마이어는 그 코우덱스를 추적한 끝에 브뤼셀의 은행금고 속에 그 문서가 잠자고 있는 사실을 알아냈고, 에이드의 부인 시모네 에이드(Simone Eid)가 새로운 소유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이어는 취리히 근교 발리셀렌(Wallisellen)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 독지가 페이지(George H. Page)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페이지는 즉각 3만5000 스위스 프랑을 희사했다.

1952년 5월 10일 브뤼셀의 어느 카페에서 매매가 성립하였다. 이 사실은 에이드 부인의 요청에 따라 18개월 후에나 공식 발표되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후에 언론에서 “역사의 페이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관대한 희사”라고 평한 이 희사의 주인공 페이지는 이 문서가 불법적으로 유출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였다: “이 문서는 충분한 학구적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 제자리로 반환되는 것이 마땅하다.” 위대한 양심의 소치라 할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제1 코우덱스를 융 코우덱스(The Jung Codex)라 부른다. 융 코우덱스는 페이지의 소망대로 1975년 카이로 콥틱박물관으로 돌아갔다. 심리학자 융은 왜 그토록 이 문헌들을 갈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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