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5일 금요일

도올의 도마 복음 이야기 <21>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도올 김용옥
제28호 20070923 입력

요한복음 2장의 혼인잔치가 열린 가나(Cana)에서 서남쪽으로 큰 고개를 두 개 넘으면 접시처럼 큰 분지의 동네가 나타난다. 여기가 바로 예수가 태어나고 자라난 나사렛이다. “나사렛과 같은 촌동네에서 뭔 좋은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라는 말이 있듯이 천시받던 동네였다. 내가 1970년대에 갔을 때는 꼭 옛날 금호동 판자촌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꽤 깨끗한 현대도시가 되어 있었다. 앞쪽 오른쪽으로 보이는 12각형 돔의 교회가 마리아 수태고지(受胎告知) 교회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이 섞여 사는데 옥상 물통 색깔로 구분된다. 공중폭격 때 팔레스타인 사람만 폭격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악랄한 차별정책이다.


이 두 소녀의 도움으로 우리는 나사렛 고지의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예수는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는다고 한탄했는데 우리는 나사렛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옥상으로 몰려 우리를 에워쌌던 것이다. 이 두 소녀의 이름은 에밀리(왼쪽), 조아나. 성모 마리아의 어릴 적 모습이 이랬을 것이다.

추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귀성길을 서두르고 있다. 이제 우리도 도마복음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야겠다. 그러나 그 길을 재촉하기에 앞서 던져야만 할 질문이 하나 있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과연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일 뿐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예수라는 캐릭터에 관한 객관적 정보를 담은 문서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현재 흔히 우리의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는 예수의 전기자료는 다음의 4종이 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것을 보통 ‘기쁜 소식’을 뜻하는 ‘복음’이라는 말로 부르지만, 복음의 실제적 의미는 요새 말로 하면 전기문학(biography) 정도에 해당된다. 그러나 전기문학이란 한 인간의 생평(生平)을 서술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인간의 삶과 그 인간이 산 역사적 정황에 관한 객관적 지식을 얻게 만드는 정보체계이다. 과연 상기의 4복음서를 그러한 현대적 의미맥락에서의 전기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한, 복음서의 원형이라고 하는 마가복음은 AD 70년경 전후로 쓰인 것이다. 예수는 흔히 AD 30년경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짐으로써 생애를 종료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선 예수와 최초의 복음서 사이에는 40년의 시차(時差)가 있다. 더구나 예수는 희랍어를 전혀 몰랐던 사람이었는데 예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당시의 코이네 희랍어로 이루어졌다.

예수는 갈릴리 지역의 토속말인 아람어(Aramaic: 히브리말과 관련된 메소포타미아 서북지역의 셈족 언어)를 말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시차뿐 아니라 언어도, 예수 자신의 언어와 전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기술되었다. 우선 마가복음 1:1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 1장 1절의 첫마디에서 이미 우리는 마가복음이 오늘 우리가 요구하는 정보체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아)이며,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곧 복된 소식이다. 그 복음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리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은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오로지 ‘복음의 시작’으로서만 예수의 삶을 제시하겠다는 너무도 명백한 의도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의 최초의 원형인 마가복음에서부터 이미 예수에 관한 객관적·역사적 정보를 획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희랍의 신들처럼 형상이 있고, 여성도 있고, 남성도 있고, 결혼도 해서 애도 낳는 하나님일까? 그렇다면 남자 하나님이 있고 여자 하나님이 있어, 그 둘이 성교를 하여 낳은 아들이 예수라는 말인가? 물론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는 유대인 전통 속에서 이런 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형상도 초월하며,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인간의 상상력으로 규정할 수 없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이르듯이 “스스로 그러한 자”(출 3:14)이다. 두 남녀가 결합하여 애 낳듯이 낳은 애가 예수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탄생설화가 동정녀 마리아 탄생일 것이다. 예수가 인간 엄마에게서 태어나기는 했는데, 아버지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은 분명 남성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남성 하나님과 인간 여성이 직접 성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이때는 “성령”이라는 추상적 매체가 개재된다. 즉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복음서의 원형인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일체의 설화문학이 생략되어 있다. 성인 예수의 세례로부터 곧바로 시작한다. 즉 예수라는 복음은 오직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는 어떤 위대한 창시적 인물을 기술할 때 인류가 공통으로 사용해온 아키타입에 속하는 것이다. 부계사회에서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권위에 소속되기 때문에 아들을 창시자로 만들 때는 반드시 인간 아버지는 사라져야 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박(朴)과 같이 큰 알(大卵)을 깨뜨리고 나왔고, 석탈해도 알로 태어나 비단 금궤에 실려 강물에 둥둥 떠다니다가 모세처럼 극적으로 건져졌다. 모세와 탈해는 같은 뜻의 이름들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高朱蒙)도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영기를 받은 유화(柳花)가 낳은 알을 깨뜨리고 나왔다. 이 모두가 동정녀 마리아 설화의 다른 표현양식이다.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도 성령이라는 애매한 말을 잠시 제쳐놓으면 결국 성부와 성자의 문제가 되는데, 이것은 곧 초대교회에 있어서 예수가 인간인가, 신인가 하는 물음에 관한 것이다. 결국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물리적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역사적 인간에게 신성(Divinity)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매우 추상적이고도 신학적인 요청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역사적 지평 속에서의 인간 예수가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만을 고집한다면, 갈릴리 지평 속에 나타난 예수는 하나의 허환(虛幻)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걸어다니는 유령일 뿐이다. 인성을 인정치 않고 신성만을 고집하는 생각을 신학사에서는 도세티즘(Docetism, 독일어로는 도케티스무스 Doketismus), 즉 가현론(假現論)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기독교인도 가현론을 신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가현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란 무엇인가? 인간 예수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평범한 ‘나’와 같이 생로병사를 거치는 역사 속의 한 인간일 뿐이다. 나사렛에서 태어나고(베들레헴 탄생설화는 후대의 첨가) 성장하고, 당대 팔레스타인 민중과 더불어 기존의 질서와 상충되는 운동을 전개했고, 예루살렘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아 십자가형에 처해짐으로써 생애를 마감한 그 어떤 인간! 그 어떤 인간의 실상을 추구하는 신학적 경향을 총칭해서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라고 부르며, 이것은 흔히 교리적 예수, 즉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와 구분되는 리얼한 예수(Real Jesus)의 모습에 관한 탐구이다.

이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 있어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였다.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1906)라는 세기적 명저는 라이마루스(H. S. Reimarus)로부터 브레데(W. Wrede)에 이르는 기존 200년 동안의 모든 역사적 예수 연구를 집대성하였으나 매우 신랄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역사적 예수의 연구는 역사적 예수의 참모습에 이를 수 없다. 모든 연구자들이 그들의 시대의식을 역사적 예수의 그림에 투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화려한 신학자로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예수의 참모습을 실천하기 위하여 새롭게 의학을 공부하고, 간호원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로 훌쩍 떠나버리고 만다.

마가복음의 저자부터 이미 역사적 예수를 말하려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캐어 들어갈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렇다고 슈바이처의 비관적 결론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말하기를 포기해야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나 도올은 말한다: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사람의 시대의식이 투영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끊임없이 역사적 예수를 탐구함으로써만 우리는 신앙의 원점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이해가 없는 신앙은 픽션이다. 한국 교계의 가장 큰 맹점은 교리적 예수를 역사적 예수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오류를 광정하는 데 도마복음서는 한없이 유용한 자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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