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6일 토요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33> 쿰란공동체와 예수 성서의 오리지널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올 김용옥 제40호 20071215 입력

이곳이 여리고다. 황혼이 뉘엿뉘엿 깔릴 때 나는 이곳에 도착했다. 사해 북단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인데 해수면보다 250m나 낮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최고(最古)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모세의 바통을 이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밟은 최초의 점령지였지만 여호수아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였다(수 6:21). 우리에게는 난쟁이 세리 삭개오의 이야기로 친숙한 지명이다(눅 19:1). 지금도 엘리사의 샘에 가보면 놀랍게도 가뭄과 무관하게 맛있는 일급수가 콸콸 솟구치고 있다(왕하 2:21). [임진권 기자]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이라는 훌륭한 전시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지난 10일부터 14일까지 사해사본과 관련된 세계적인 정상급 학자들과 국내 유수한 학자들의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나는 목요일(13일)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박물관 세미나실을 가득 메운 목사님들, 신부·수녀님들, 신학대학생들, 종교학 관련 학자들·대학원생들의 진지한 경청 자세에 흠탄의 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내가 한학의 고전학자로서 성서 관련 주석을 내고 그 역사의 진면을 탐구하는 뜻은 더 이상 기독교 문헌이 이방의 문화로서만 간주될 수 없으며, 그것은 이미 우리의 실존을 구성하는 내면적 가치가 되어버렸다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송대(宋代)의 주희(朱熹)가 사서집주(四書集注)를 통해 유교를 새롭게 해석해 내었다면, 우리 시대의 사서는 사복음서일 수도 있기 때문에 사복음서의 새로운 집주를 통해 주희가 달성한 그러한 문명의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다. 나의 고전학 세계에 있어서는 유교의 경전이나 기독교 경전이나 불교의 경전이 학문의 대상으로서 어떤 불가침의 장벽을 두르고 있지 않다. 학문적 방법의 도구만 정밀하다면 모두 동일한 탐구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논어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기독교 경전을 탐구할 수도 있고, 기독교 경전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논어를 탐구할 수도 있다. 문제의 핵심은 그 경전들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체계를 제공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내가 한국 기독교에 관하여 바라는 것이 있다면 기독교를 구성하는 모든 문헌이나 언어나 가치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개방된 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다양한 보편적 가치의 지평 위에서 형량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배타적 유일신관이나 전도주의의 미명 아래 자기가 신봉하는 신앙이나 신념 이외의 모든 가치를 묵살하는 폭력을 정당화하여 왔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폭력일 뿐 아니라 물리적 가해를 서슴지 않는 흉악한 의도를 자행하는 그러한 폭력이었다. 그러나 지난 목요일 세미나실에서 감지할 수 있었던 분위기는 한국 기독교가 이제 점점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신을 열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안겨주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간증해 주듯이, 나의 도마복음 이야기가 이러한 확신에 작은 밀알이라도 되었다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성서가 성령의 손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의 손만을 빌리지 않아요. 수없이 많은 손들의 다른 표현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지요. 신·구약 모두 하나의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끊임없이 다른 성서가 출현할 수 있지요. 사해문서로 인해 구약도 새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해사본재단의 소장, 필드 박사의 말이다.

루터대학교의 김창선 교수는 사해문서의 담지자였던 쿰란공동체의 다양한 면모에 관하여 매우 명쾌한 논리로서 일목요연한 해설을 해주었다. 쿰란공동체는 BC 150년경부터 AD 68년까지 사해 북서단 유대광야지역에 존속했던, 좀더 쉽게 말하자면 박태선 장로의 팔당 신앙촌공동체 비슷한 커뮤니티였다. 물론 쿰란의 규모는 팔당보다 작은 것이었지만 200년 이상을 존속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조직적이었고 이론적이었으며, 실천적이었고 도덕적이었다. 이 집단은 끊임없이 새로 유입되는 신참가입자들(2년의 수련기간 거침)이 헌납하는 공동재산으로 유지되기도 했지만 그들 자신이 방직·염색산업이나 양피지 생산, 혹은 사경(寫經)업에 종사했을 수도 있다.

이들은 매우 각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들을 결속시킨 가장 큰 힘은 종말론적 믿음이었다.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만이 빛의 자녀들이며 구원의 대상이다. 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둠의 자녀들이며 파멸의 대상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후의 심판은 이 세계의 멸절과 하늘나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세 속에서 빛의 자녀들이 어둠의 자녀들과의 대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쟁취하는 현실적 구원이요 평화였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의 배철현 교수는 이 쿰란공동체의 규례에 나타나는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을 우리가 흔히 조로아스터교라고 부르는 마즈다이즘(Mazdaism)의 영향이라는 시각에서 세밀하게 분석해 들어갔다. 기원전 6세기부터 4세기 동안 고대 근동의 맹주였던 페르시아제국은 제2이사야서의 희망찬 시적 언어가 입증하듯이 유대인들을 바빌론유수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공동체 형성을 실제적으로 도왔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우주론이 유대교 신학의 형성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라는 유일 지혜신을 설정함과 동시에 그의 쌍둥이 두 아들인 스펜타 마잉유(Spenta Mainyu, 선한 영)와 앙그라 마잉유(Angra Mainyu, 악한 영)의 대결을 통하여 이 세계의 장대한 드라마를 펼쳐내고 있다. 쿰란공동체의 사상에서도, 인간의 개체적 삶 속에 빛의 영혼과 어둠의 영혼이 대결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도덕적인 정화노력에 의하여 빛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빛과 어둠이 모두 하나님의 창조라고 본다. 배 교수는 조로아스터교의 본질을 태초로부터 이원적 선신·악신 체제로 설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유일신론과 선·악의 이원론이 공존하는 체제로서 조로아스터교를 규정하는 관점이 보다 적절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 쿰란공동체 사상과의 본질적인 심층구조의 일치 또한 보다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다. 배철현 교수는 구약을 유대교의 절대적이고 고립적인 문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근동의 다양한 문헌들의 비교문화론적 양식의 한 형태로 보아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메르어, 이집트어, 아카디아어, 히타이트어, 히브리어, 아람어, 고대 페르시아어에 능통한 그의 연구는 사계의 통념을 초월하는 심도있는 언설을 제공하고 있다. 남가주대의 주커만 교수(Prof. Bruce Zuckerman)는 사해문서를 컴퓨터 영상의 여러 가지 테크닉을 통해 정밀하게 재구성하는 신기술을 선보였는데 참으로 치열한 학자적 양심을 보여주었다. 텍스트의 엄밀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날 예루살렘의 사해사본재단의 소장이며 『사해사본과 그 역사』의 저자인 필드(Weston W. Fields) 박사와 저녁을 같이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필드 박사는 사해사본이 발견된 경위와 관련된 인물들을 가장 많이 인터뷰한 사람이며 쿰란공동체의 성격에 관하여서도 심도있는 연구를 행하였다. 쿰란의 사람들은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당대의 필로, 요세푸스, 플리니우스와 같은 사가들의 기술로서 그 광범한 세력을 입증할 수 있는 엣세네파(the Essenes)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다. 사가들의 기술과 이 공동체의 삶을 엿보게 하는 많은 문서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동일한 계열의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말해준다.

사해문서의 발견이 말해주는 중요한 사실은 예수시대만 해도 유대교라는 어떤 정해진 신학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구약과 같은 어떤 정해진 텍스트가 있다는 것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문헌은 각기 독립된 편으로서 두루마리 형태로 존재했을 뿐이며 각 편은 모두 다양한 전승의 산물일 뿐이다. 그 다양한 전승 간에 정통·비정통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셉튜아진트 희랍어역을 최근까지만 해도 마소라텍스트와 비교하여 졸역으로 간주했지만, 그것의 원본이 되는 히브리어텍스트가 마소라계열과 다른 전승의 것임이 밝혀졌다.

세례 요한은 쿰란에서 멀지 않은 요단강변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도 여리고를 자주 왔다면 그곳에서 빤히 내다보이는 쿰란공동체를 들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물론 요한이나 예수의 입장이 이 공동체의 철학과는 근원적인 상이점을 보이고 있지만, 쿰란공동체의 중요성은 예수 당대의 유대인공동체의 한 전형의 역사적 위상을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맥락에서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성격과 역사적 연계성을 과시한다는 데 있다. 필드 박사는 말한다: “예수가 쿰란에 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요. 그러나 예수는 쿰란 사람들의 묵시적 환상에 동조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한 혁명적 발상을 한 사람이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그리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해석, 이 모든 것이 종말과도 같은 인간외적 전제와는 다른 인간 실존의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일상생활의 규범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인간의 구제상황이라는 것을 예수는 간파했죠. 그러나 쿰란의 사상은 후대의 기독교공동체로 전승되어 요한계시록과도 같은 극단적 묵시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초기 기독교공동체는 유대인 집단이었으며 잡다한 유대교 전승에 대하여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습니다.”필드 박사는 지혜담론이 묵시담론에 선행한다는 우리의 가설을 재확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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