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5일 금요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19>신화를 찾아서

도올 김용옥 제26호 20070908 입력

예수의 엄마인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것은 단지 복음서 저자의 신화체계 속의 상징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동정녀 마리아의 이야기는 제1차 자료인 마가복음이나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초대교회인들의 인식체계 속의 마리아는 아기 예수에게 젖을 주는 평범한 엄마였다. 동정녀가 아니라 호르몬이 분비되는 임신 여성이었을 뿐이다. 예수는 한 손으로 젖을 열심히 빨고 있고, 한 손으로는 젖을 몽실몽실 주무르고 있다. 마리아도 예수에게 젖을 주기 위해 두 손으로 풍만한 유방을 떠받치고 있다. 이 그림양식은 피카소의 그림처럼 매우 큐비스틱하다. [사진=임진권 기자]

융이 말하는'집단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말에 있어서'집단'이라는 단어의 상식적 의미는 우리에게 혼동을 일으킨다. 융의 '집단무의식'>은 일차적으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이 개인적 무의식(the personal unconscious)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설정된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속으로 침잠되는 개인의 의식적 사태가 그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 형태로 뭉쳐 있는 것을 콤플렉스(complex)라고 불렀다. 어릴 때, 가까운 친척 아저씨에게 성희롱을 당했거나 인세스트(incest)의 체험이 있거나 한 아가씨는 정상적 의식의 상태에서는 그것을 모르는 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숨기면서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것을 숨기는 만큼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억압된 에너지로 뭉쳐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그 사람의 의식의 세계를 지배한다.

비 한 점 없는 아라비아 사막의 땡볕 속에 작열하는 안토니 수도원의 땅에 놀랍게도 청정한 물이 콸콸 흘러넘친다. 이 샘물의 모습도 하나의 아키타입이다. 마리아의 유방에서 흐르는 젖이나 사막에서 솟아나는 이 샘물은 동일한 생명의 젖줄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이러한 콤플렉스 이론을 만들게 된 것은 서구사회 사람들의 성적 행위가 음란한 반면 그것을 억압하는 도덕적 규제가 강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구조 속에서는 뉴로시스 환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기독교 윤리의 이중성이나 허위성이 중세기로부터 서구인들의 인격을 기나긴 시간 지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방인들에게도 성적 문란은 똑같이 있었겠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할 죄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치욕이나 수치(Shame)는 죄악(Sin)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는 이러한 기독교 문명의 수퍼에고(도덕적 자아)에 반기를 든 것이다. 수퍼에고는 에고보다도 오히려 직접적으로 이드의 세계를 지배한다. 정신분석(psychoanalysis)을 통하여 무의식세계에 가려져 있는 콤플렉스를 의식의 세계로 노출시키면, 그것은 눈덩이가 햇볕을 보면 녹아버리듯이 녹아 없어져 버리고, 따라서 뉴로시스 증세가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콤플렉스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체험에 의한 개인적 콤플렉스다. 융은 프로이트와 달리 이러한 개인적 콤플렉스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그는 뉴로시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인의 의식세계를 분석하려 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개인무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집단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집단'하면 우리는 사회적 집단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융이 말하는 '집단'은 일정 규모로 구획되는 사회적 집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집단'을 말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집단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성격을 지칭한다. 융이 말하는 '집단적'이라는 말은 오히려 '태고적(archaic)' , '원초적(primitive)', '보편적(universal', '조형적(archetypal)'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후천적인 습득형질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결코 문화유형론(cultural morphology)이나 라마르크적인 유전으로 규정될 수 없는 매우 본원적인 인간인식의 조형이다.

어린 아기에게 '엄마'란 무엇일까? 어린 아기에게는 '엄마'라는 개념적 언어가 없다. 그것은 우선 냄새가 뭉클한 젖가슴, 그리고 빨면 유방에서 흘러나오는 젖의 맛 등등으로 반복되어 느껴지는 그 무엇일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복된다'고 하는 사태이다. 아침과 저녁, 이런 것은 나의 인식체계에 있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반복은 반복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반복이 나에게 다양한 의식의 조형을 만들어낸다. 아침과 저녁은 빛과 어둠(요한복음의 언어)으로 조형화된다. 그리고 그것은 태양의 죽음(저녁)과 부활(아침)로 조형화된다.

안토니 수도원의 수사 루메우스와 담소하는 도올. 이들은 먹는 모든 것을 자급한다. 수사들이 만든 햄은 정말 맛있었다.

엄마에 대한 언어적 개념이 성립한 후에도 엄마는 나에게 개인적 체험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엄마는 단순히 나 개인의 엄마 아무개가 아니다. 엄마가 나를 보호하고 나의 모든 굶주림과 위험의 사태를 해결해주는 좋은 그 무엇이라면 그것은 천사(Angel)나 성모 마리아가 될 것이다. 엄마가 나에게 사악한 고통을 주는 존재로서 대상화되면 그 엄마는 악마(Devil)가 되고 마녀(Witch)가 된다. 이러한 반복되는 무의식의 패턴이 우리의 집단무의식의 아키타입을 형성하고, 이러한 아키타입이 곧 신화의 언어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 수난의 드라마도 결국 이러한 인간의 조형성의 한 신화적 패턴일 뿐이라고 융은 생각한다. 일출과 일몰의 전 과정이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로서 아키타입을 형성한다. 이집트인들의 태양신 숭배사상에서 가장 명백한 사실은 태양이 매일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매일 부활한다는 사실이다. 쇠똥구리(dung beetle) 케프리(Khepri)는 그러한 태양신 아문 라(Amun-Ra)의 부활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현대 록의 거장인 ‘비틀스(the Beatles)’의 이름도 이집트 신화의 부활사상에서 따온 것이다.

매일 새벽 먼동이 틀 때 신성한 왕자가 바다로부터 태어난다. 이 왕자는 태양이라는 황금의 수레를 타고 거대한 하늘의 여행을 시작한다. 서쪽의 지평선에는 용의 모습을 한 서왕모가 기다리고 있다. 일몰의 순간에 서왕모는 왕자를 잡아 삼켜버린다. 왕자는 용의 배 속에서 암흑의 심연의 기나긴 여행을 시작한다. 밤의 사자들과의 무섭고 지루한 투쟁을 통해 왕자는 새벽 먼동이 틀 무렵 다시 태어난다. 찬란한 햇살을 발하며! 부활의 승리! 오 태양이여! 이런 신화의 유형은 어느 문명에서든지 발견될 수 있다. 인간의 집단무의식의 발로라고 융은 간주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서 79장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를 향해 어느 여인이 외친다. “너를 낳은 자궁을 축복하라! 예수여! 너를 먹인 유방을 축복하라!” 이에 예수는 무어라 대답했을까?'너를 낳은 자궁'도 하나의 아키타입으로서 여기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뉴멕시코의 드넓은 평원에서 하루 종일 엉덩이와 어깨를 욱시글거리며 끝없이 춤을 추고 있는 푸에블로 인디언들(the Pueblo Indians)에게 융은 왜 그렇게 열심히 춤을 추는지 그 연유를 물었다: “태양은 우리 아버님이시다. 아버님께서는 매일매일 기나긴 황도를 홀로 걸어가시는 지루한 여행을 하신다. 어찌 우리가 여행의 반려로서 아버님께 춤과 음악을 들려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루라도 자식 된 도리를 하지 않으면 아버님께서는 십 년 뒤 떠오르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하면 이 우주에는 영원한 밤이 올 것이다.”

융은 그 순간 이 우주의 종말을 걱정하면서 그토록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인디언들의 얼굴에서 숭고한 그 무엇을 발견했다. 최소한, 강남 부동산값에 매달려 걱정하는 졸부나, 자녀가 서울대학 못 들어갈까 봐 안달하는 아녀자나, 신도들의 연봇돈만 계산하고 앉아있는 일부 성직자들의 신화체계보다는 더 건강한 신화를 그들은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삶은 우주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태양이라는 아버지를 도와 매일 반복되는 출현과 몰락의 과정 속에서 전 우주생명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 자유, 평등, 통일 이런 따위의 언어는 그것 자체가 하등의 실체로서 파악될 수 없는 신화적 존재의 현대세기적 표출이다.

민주세상을 만들겠다고 많은 사람이 생명을 던지는 현대사회나, 태양이 안 뜰 것을 걱정하여 하루 종일 춤을 추는 원시사회나 동일한 아키타입의 신화적 세계 속의 인간세의 모습이다. 그것은 제각기 우리에게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를 던져준다. 신화적 언어들은 사실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우리의 삶에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융에게 있어서 정신병이란 단지 이러한 신화적 가치의 충돌일 뿐이었다.

탈레반을 선교하겠다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가는 신화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의미체계는 그 나름대로 숭고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 탈레반의 신화체계를 파괴하고 세금을 내는 대한민국 자유시민의 건강한 상식적 삶의 신화를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망상(delusion)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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