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6일 토요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31>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주라지혜담론과 묵시담론

도올 김용옥 제38호 20071202 입력

내가 서있는 이곳은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박물관 사해사본관이 아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장에서는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이라는 매우 훌륭한 전시가 12월 5일부터 열린다. 1947년 어느 날 사해 부근의 절벽동굴에서 베두인 목동 2명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기 위해 돌을 던졌다가 항아리 깨지는 소리를 듣고 놀라 들어갔다가 발견한 쿰란 사해문서는 성서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계기가 된 20세기 서구문헌학의 최대 사건이었다.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항아리가 바로 그 진품 항아리고 그 속에 구약과 관련된 문헌이 들어 있었다. 우리나라 용산에 바로 기원전 이사야서 두루마리가 진열되는 것이다. 임진권 기자

Q복음서를 구성하는 예수의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전체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테마를 산발적으로 발출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서로 논리적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같은 주제에 관해 상반된 견해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1907년에 하르낙(Adolf von Harnack)이 Q복음서를 희랍어로 구성해냈을 때, 그는 이 예수의 가르침이 이야기복음서(narrative gospel:앞에서 담화복음서에 대비되는 서술복음서로서 규정되었다)의 연역적 틀을 전제함이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산발적으로 읽히기를 원했다. 그래야 기적과 신화(miracle and myth)가 없어지고 기독교의 원래적 본질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Q복음서의 예수의 말씀들은 대부분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닥치게 되는 한계상황, 충돌상황 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결단할 것인가에 관한 예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모세가 요단강 건너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최후를 마친 느보산 기슭에 있는 마다바(Madaba, Medeba)라는 도시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비잔틴교회를 지었다. 그 바닥에 기독교 성지를 나타내주는 모자이크 지도가 새겨져 있다(15.7m×5.6m). 이 지도를 통해 예루살렘의 성분묘교회, 네아교회의 모습과 베들레헴, 헤브론, 엠마오교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소중한 모자이크 지도가 본래 모습 그대로 용산에 복원되어 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마저 내주어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금 걷는 자들도 이 정도는 다 하는 일이 아니겠느뇨?”(눅 6:27~32, 마 5:38~46)

사실 우리가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그리고 오늘날까지 기독교에 헌신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탄생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신화적 서술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예수가 우리 실존에 명령하는 윤리적 담론이었다.

기독교가 우리에게 전하는 감격과 감동의 핵심에는, 예수의 말씀이 우리 민족이 접한 어떠한 기존의 종교보다도 더 고귀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불타의 자비(慈悲)보다 더 짜릿했고 공자의 인의(仁義)보다 더 강렬했다.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은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들이었다. 춥고 굶주리고 슬피 우는 자들이었다. 착취당하고 빼앗기고 부랑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가슴에 남은 것이라곤 ‘이 세대’(게네아 아우테)와 세태에 대한 원망과 원한과 분노뿐이었다.

바로 그들에게 천국을 선포하는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패러독시칼한 정언명령을 던졌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인간에게는 진정한 회심(메타노이아), 즉 천국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로다.”(마 10:38~39, 눅 14:26~27)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아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인 자기 부정이요(absolute self-surrender), 자기 던짐이다. 그것은 불교가 말하는 멸성제(滅聖諦, the holy truth of self-annihilation)와도 같은 것이다. 여기 “십자가를 진다”라는 표현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신화적 사태와 전혀 무관한 것이다. 십자가는 당시 매우 보편적인 로마 형벌이었고, “십자가를 진다”라는 표현은 당시에 흔히 쓰이던 관용구에 불과했다.

헤롯 대왕이 BC 4년에 죽은 이후 유대인들이 신권통치의 부활을 요구하는 반란을 일으켰는데 로마군대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20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는 표현은 예수 당대의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되는 말이었다. 십자가형은 대개 도시에 진입하는 어귀의 길목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비극적인 것은 십자가형에 처해질 바로 그 죄수들이 본인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동구 밖까지 몇 킬로미터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죽음의 행진을 불사할 수 있는 자기 포기의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강력한 윤리적 명령이다.

“지금 꼴찌 된 자들이 첫째가 되고, 지금 첫째 된 자들이 꼴찌가 되리라.”(Q 65, 마 20:16, 눅 13:30)

현세와 천국은 가치의 전도를 요구하는 사태이다. 현세적으로 꼴찌인 자가 천국에서는 첫째가 될 수가 있고, 현세적으로 첫째인 자가 천국에서는 꼴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부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기적이나 신화적 담론과는 전혀 무관하게 해석되어야 할 지혜담론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도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와 같은 지혜문학의 전통은 면면히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예수는 그것을 사랑의 계명으로써 철두철미하게 심화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Q복음서의 내용 속에는 이러한 지혜담론 외에 묵시담론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묵시담론이란 “이 세계의 종말”이나 “마지막 심판”을 암시하는 듯한 언급을 말한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人子)가 오리라.”(Q 55, 마 24:44, 눅 12:40)

물론 도둑 같이 찾아온다는 Q복음서의 이 말을 반드시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것과도 같은, 인류 역사의 종말 즉 시간의 종료로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천국의 도래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예수 말씀의 상당부분이 종말론적 암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길이 없다.

문제는 역사적 예수 본인이 종말론적 사유를 체화한 사람이냐 아니냐에 관한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를 철저히 종말론적 사상가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 사태는 일종의 자살적 행보의 필연적 결말로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천국의 도래에 관한 믿음을 종말론적 환상 속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죄악에
대한 당장의 철저한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러한 믿음 속에서 긴박한 역사의 전변을 결행하려 했다. 그 믿음에 철저한 나머지 그는 죽음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션 임파서블에 대한 정직한 선택이었다. 예수의 삶을 투시하는 시각에는 항상 이와 같이, 지혜로운 윤리적 교사의 너그러운 이미지와 말세론적 투사로서의 긴박한 이미지가 겹쳐 있다.

불트만과 같은 사상가도 Q복음서의 성격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했으며 그것은 예수를 신봉하던 초기공동체의 일차적 성격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되면 1세기의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는 예수의 묵시론적 신념에 따라 처음부터 종말론적 성격을 띠었고 그러한 긴박한 종말의 도래(파루시아)가 이루어지지 않자 점차 지혜의 담론으로 변질되어간 역사로서 기술되기 쉽다.

그러나 클로펜보르그 교수를 위시한 많은 학자들의 Q복음서에 대한 철저한 연구성과는 묵시담론의 선행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즉 묵시담론에서 지혜담론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공동체는 철저히 지혜담론의 공동체였으며 그 지혜담론적 성격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차 묵시담론적 틀 속에서 재해석되어 갔다는 것이다.

묵시담론은 물론 기독론(Christology)의 형성과 관련되며 그것은 유대국가의 멸망이라는 긴박한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묵시담론은 선택된 자들의 폐쇄적 사유에서 기인되는 것이며, 지혜담론에 어떤 긴장감과 긴박감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예수의 본질은 묵시담론이 아닌 지혜담론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