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5일 금요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20> 삶의 의미인간 실존의 자리는 증오 아닌 사랑일 뿐

도올 김용옥 제27호 20070915 입력

모세도 40년 광야를 헤매었고, 예수도 40일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다. 광야는 사막이다. 사막은 모든 종교적 신앙의 상징이다. 광야에서는 인간의 모든 세속적 욕망이 멸절된다. 그리고 신과의 영적 해후가 이루어진다. 사진은 모세가 유대민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 기나긴 방랑생활을 해야만 했던 수르-신 광야. [사진=임진권 기자]

인간은 ‘꼴림의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융의 통찰은 많은 종교인들에게 신앙의 심오한 내면을 반추하게 만드는 매우 유용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신정아 사건’으로 인해 마치 온 국민이 관음증 환자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신정아 신드롬을 촉발시키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동기는 인간은 꼴리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에 있다고 프로이트는 진단하는 것이다. 너무도 하찮을 수 있는, 한 철없는 여인의 행동이 이토록 장시간 전 국민의 관심을 사로잡고 언론을 도배질하고 중요한 대선 국면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면에는, 국민 모든 개개인 의식의 저변에 ‘꼴림’이라는 리비도적인 충동이 있고, 그 충동이 삶의 재미를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 국민이 다같이 ‘꼴림’을 유발하는 재미있는 소설을 같이 읽고 있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문학과 예술의 세계도, 정치·경제·사회현상도 모두 이러한 리비도적 에너지로부터 설명해 들어간다. 매우 일리가 있는 설명방식이다.

그러나 융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충동을 성적 충동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 인간은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본다. 살아야만 하는 이유라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찾는 충동이다. 어렵게 무녀독남 외아들을 키워가는 수절과부에게 과연 성적 ‘꼴림’이 더 근원적인 충동일까, 그 자식이 영예로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성공신화’가 더 원초적인 충동일까?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모든 인간이 부지불식간에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할 수 없는 중대한 인간현실이다.

신왕조의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Ⅲ, BC 1387~1350 재위)에 의하여 그 원형이 완성된 룩소르 신전(Luxor Temple)은 이집트 테베지역의 대표적 신전이다. 나일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신전은 석양에 보면 더 찬란하게 빛난다. 앞에 있는 거대한 석상은 람세스2세인데 모세와 동시대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모세도 이곳에 왔을 것이다. 그 뒤로 양편 7개씩 14개의 석주가 있는데, 아멘호테프 3세의 손자인 투탕카멘 치세 때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이 거대한 신전을 지배하는 것도 물론 신화이다.

인간의 고대사회가 모두 예외 없이 신화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화창조 충동이 인간에게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가를 잘 예시하고 있다. 그 신화는 대부분,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기도 했지만, 그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Meaning of Life)’를 부여했던 것이다. 기독교 성서의 세계도 이러한 삶의 의미를 창출하는 신화의 한 유형이라고 융은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는 것도 그러한 믿음의 행위가 나에게 매우 본질적인 의미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삶의 체험 속에서 해후하는 자질구레한 번사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확고하고 절대적인 의미를 나의 실존에 던져준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내가 기독교 성서와 신앙세계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 당신이 과연 기독교 신앙인이오? 뭘 알고나 쓰시오? 당신이 진짜 크리스찬이란 말이오? 그들은 나로부터 확고한 신앙고백이나 신앙간증을 듣기를 원한다. 아니, 강요한다. 『기독교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강해』를 쓰고난 후로 나를 인터뷰하는 대부분의 기독교 계열 인사나 매스컴 기자들은 그러한 질문을 수없이 던졌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한 일 년이라도 열심히 선교하고 오시오! 그러면 믿겠소.”(2007년 1월 31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는 검증할 수 없는 매우 묘한 신념이 있다. 그 질문자는 완벽한 진짜 신앙의 소유자인 데 반하여 나 도올은 가짜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진짜로 믿는데 나 도올은 가짜로 믿는다는 것이다. 진짜로 믿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진짜 신앙의 척도는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어떠한 척도로 다 재어보아도 상식적으로 내가 가짜고 그들만이 진짜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융은 이런 대척에 뭐라 말할까? 그들의 신앙을 구성하는 신화체계와 도올의 신앙을 구성하는 신화체계가 다르다고만 말할 것이다.

나에게 신앙이란 나의 상식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타자(the Other)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것의 제일의 조건은 타자 앞에 선 나라는 실존의 겸손이다. 모든 신앙은 존재의 겸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타자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며,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실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세계는 합리적인 분석을 거부할 때가 많다. 나는 그것을 비합리(irrationality)라고 부르기보다는 초합리(transrationality)라고 부른다. 그러나 초합리적 세계의 인식은 반드시 합리적 세계의 절벽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합리적 사유를 궁진(窮盡)한 자만이 진실된 초합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World)는 기(氣)에서 리(理)로 진입하지만 신(God)은 리에서 기로 진입한다. 이것은 매우 난삽한 형이상학적 언어이지만 신의 타자성을 설명하는 매우 좋은 방식이다. 이 세계와 신은 결국 하나의 창진적 과정(Creative Process) 속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신이 세계를 초월해 있다면, 이 세계도 신을 초월해버릴 것이다. 신과 세계는 서로 초극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진입하고 해후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신의 실체성을 구성하는 모든 신화적 언어는 궁극적으로 나의 실존적 체험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아키타입이다. 따라서 신앙에 대하여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논하거나, 진가(眞假)의 평점을 구한다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신앙의 세계를 초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해도, 그 신앙을 생산하는 실존이 놓이는 자리는 사회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 사회적 자리는 철저히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아프가니스탄선교에 대한 초이성적 신앙열정을 불태운다 해도 그 인간이 놓여 있는 현실은 철저히 인간세의 상식적 인과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신앙 자체의 비합리성이 인간 삶의 합리성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 삶의 자리는 오로지 증오 아닌 사랑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구극적 메시지는 모든 종교제도의 교리체계를 통합하고 초극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태까지 논구해온 나그함마디 문서는 기나긴 여로를 더듬었지만 결국 한자리로 되돌아왔다. 다타리-타노 컬렉션은 나세르 대통령에 의하여 국유화되었고, 융 코우덱스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코우덱스가 카이로의 콥틱박물관에 안치되기에 이르렀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열정의 소산인 이 문서들이 회록지재(回祿之災)를 당하지 않고 모든 위험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것은 20세기 인류사의 최대 축복 중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유네스코와 많은 뜻있는 기관의 협력으로 나그함마디 라이브러리 전체가 정리되고 영역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 말 나그함마디 코우덱스를 위한 국제협력기구(the International Committee for the Nag Hammadi Codices)가 결성되었고, 1977년에는 『영어로 읽는 나그함마디 도서』(The Nag Hammadi Library in English)라는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그 원본 텍스트도 네덜란드 브릴(E. J. Brill)출판사에 의하여 전 12권으로 1972~84년에 완간되었다. 이 라이브러리는 52종의 성서를 포괄하고 있다. 그중 제2 코우덱스 두 번째 논문으로 도마복음서가 자리잡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최종적 목표인 도마복음서의 분석으로 그 관심의 장을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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