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6일 토요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36> 성서의 텍스트들은 어떻게 변형되었는가?옥시린쿠스 사본

도올 김용옥 제43호 20080106 입력

룩소르 지역의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서는 최근까지 투탕카멘을 포함하여 63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신왕조(New Kingdom), 18왕조로부터 20왕조에 이르는 시기의 것이다. 이 왕들의 계곡의 준령을 넘어가면 거대한 바위절벽을 배경으로 한 핫셉수트의 장쾌한 신전이 펼쳐진다. 핫셉수트는 투트모시스 1세(Thutmosis Ⅰ, BC 1504~1492)의 딸이었는데 이복동생인 투트모시스 2세와 결혼하였으나 딸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 따라서 비천한 첩에게서 난 투트모시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 핫셉수트가 섭정했다(BC 1479). 임진권 기자

도마복음서는 콥트어로 쓰여졌다. 그러나 이 말은 보다 정교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수중에 주어진 완정한 도마복음 텍스트는 1945년 12월 나그함마디 엘카스르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콥트어로 쓰여진 것이지만, 과연 도마복음서 자체가 최초에 콥트어로 저작된 것인지에 관해서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초기 콥트어 텍스트는 대부분 희랍어나 기타 다른 언어의 텍스트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콥트어 도마복음서 이전의, 그 대본이 된 희랍어 도마복음서는 존재하지 않는가?

카이로에서 나일강을 따라 룩소르 쪽으로 약 200㎞를 올라가면 나일계곡과 사하라사막이 만나는 접점지역에 엘 바나사(El Bahnasa, Behnesa)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이 도시는 람세스 2세가 영화를 구가한 제19왕조의 한 행정구의 수도였던 고색창연한 옛 도시였는데, 옥시린쿠스(Oxyrhynchus, Oxyrynkhos)라고 불렸다.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이집트탐험기금(Egypt Exploration Fund)의 도움을 받아 영국의 고고학자 그렌펠(Bernard P. Grenfell)과 헌트(Arthur S. Hunt)가 이끄는 탐사팀이 옥시린쿠스를 발굴했는데 엄청난 파피루스서류 쓰레기 더미가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현장을 목도하기에 이른다. 이 옥시린쿠스 파피루스는 BC 250년경부터 AD 700년경에 이르는 문서들로서 주로 희랍어와 라틴어로 쓰여졌지만, 이집트 디모틱문자, 콥트어, 히브리어, 시리아어, 아랍어로 쓰여진 것도 있다. 이 옥시린쿠스 파피루스의 발굴로 인하여 우리는 그레코-로만 세계의 일상생활을 규탐케 만드는 가장 풍요로운 일차자료를 획득하게 된 셈이다. 이 자료는 1983년에 이르러서야 50권의 책으로 영역되어 출간되었다. 3400여 개의 항목에 해제와 주석이 붙어 있다.

왕들의 계곡의 피라미드산(El Qurn)을 넘어오면 절벽 위에서 핫셉수트 신전이 내려다보인다. 관광객들은 이 무서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산길을 걸을 엄두도 내지 않는다. 참으로 어렵게 이 앵글에서 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다시 한번 그 작열하는 열기를 느껴보고 싶다. 저기 멀리 보이는 강이 나일강이고 푸른 지대가 범람지역이다. 그 범람지역(코스모스)과 사막지역(카오스)의 경계선상에 피라미드나 신전이 지어졌다. 옥시린쿠스도 이런 접점에 있다.

이 옥시린쿠스 사본 속에서 오늘 우리가 정경으로 알고 있는 신약성서의 파편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마태복음, 로마서, 요한1서, 고린도전서, 빌립보서, 요한계시록 등등. 그러나 당시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예수 가라사대”의 형식을 담지하는 3개의 파편이 있었다. 이 파편들엔 POxy 1, 654, 655라고 번호가 매겨졌는데 당시 아무도 이것이 도마복음서의 희랍어 판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너무 단편적이었기 때문에 그 총체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렌펠과 헌트는 이 3개의 파편을 그냥 ‘로기아 예수’(Logia Iesou, Sayings of Jesus)라고 분류해 두었다.

이 옥시린쿠스의 로기아가 빛을 보게 된 것은 물론 나그함마디의 도마복음서가 발견된 후의 사건이다. 옥시린쿠스 로기아 3편이 도마복음서의 희랍어 텍스트라는 것을 밝힌 사람은, 나그함마디 라이브러리를 최초로 세상에 드러나게 만든 프랑스 대학원 학생 장 도레스(Jean Doresse)의 스승 앙리 샤를 퓌에슈(Henri-Charles Puech)였다. 에콜 드 프랑스의 종교사 교수였던 퓌에슈는 콥트어로 된 도마복음서의 완정한 모습을 보자마자 곧 옥시린쿠스의 로기아 파편과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양자를 대비한 결과 POxy (Papyrus Oxyrhynchus의 약호) 654는 도마복음서의 서론과 1~7번에 해당되고, POxy 1은 도마복음서의 26~29번, 30번, 77번, 31~33번에 해당되고, POxy 655는 도마복음서의 24번, 36~39번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따라서 옥시린쿠스 로기아 파편이야말로 도마복음서의 희랍어 판본의 존재를 더 말할 나위 없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콥트어 도마복음서는 옥시린쿠스 희랍어 도마복음서를 번역한 것일까? 문제는 이렇게 단순하게 끝나지 않는다. 우선 옥시린쿠스 파편 자체가 제각기 다른 시대에 성립한 것이다. POxy 1은 AD 200년경의 것이며, POxy 654는 3세기, POxy 655는 3세기 중엽의 것으로 제각기 다른 전승의 산물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서물을 동시에 베낀 파편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희랍어 판본과 콥트어 판본을 비교해 보면, 구조적으로 양자의 공통점은 충분히 인지되지만, 콥트어 판본이 희랍어 판본을 직접 번역한 것으로 간주되기는 어렵다. 우선 우리는 이러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희랍어 판본 자체가 다양한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도마복음서는 초기기독교에서 인기가 높은 작품이었다. 콥트어 판본이 기초로 하고있는 희랍어 도마복음서와, 옥시린쿠스 파편이 기초로 하고 있는 희랍어 도마복음서는 제각기 다른 전승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콥트어 도마복음서에 관하여 다음의 7단계의 성립과정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제1단계: 도마복음서는 분명 “살아있는 예수(the living Jesus)”의 말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살아있을 당대에 그가 한 말들은 추종자들에 의하여 기억되었고 구전으로 전파되었다.

제2단계: 어느 한 저자가 그 많은 구전 중에서 선별하여 단일한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이때 이미 선별과정에서 저자의 목적과 관점이 배제될 수는 없다.

제3단계: 이 한 저자의 탁월한 작품은 다양한 초기공동체의 사람들에 의하여 낭송되고 또 리터지(liturgy, 祭儀)로서 활용되었다. 따라서 많은 사경자들에 의한 다양한 사본이 성립할 수밖에 없다.

제4단계: 초기공동체가 점점 기독교화되어 가면서, 기독교공동체의 삶과 가치에 부합되는 약간의 변형이 이루어지고 창작이 첨가되었을 것이다.

제5단계: 텍스트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희랍어서기관의 역할이다. 희랍어서기관은 희랍어 텍스트를 최종적으로 확정짓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텍스트를 전사하는 과정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에 따라 약간의 가필을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모든 사본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유례가 없다. 서기관들은 존경받는 ‘랍비’들이었다.

제6단계: 콥트어 번역자들에 의하여 희랍어 맥락이 콥트어 맥락으로 번역되는 과정에
서 또 한 차례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제7단계: 콥트어 사경자들에 의한 다양한 판본이 생겨난다. AD 4세기 후반에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27서 정경체제가 공표되면서 게벨 알 타리프의 사바크 더미 항아리 속으로 숨겨진 도마복음서는 바로 이 제7단계의 작품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누가 언제 도마복음서를 집필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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