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5일 금요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24> 예수는 과연 부활했는가?케리그마

도올 김용옥 제31호 20071013 입력

이 사진은 한국인에게 공개되는 사진으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다. 예수가 실제로 묻힌 정황을 매우 세밀하게 알 수 있는 무덤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서 있는 입구에 거대한 연자방앗돌 모양의 둥근 막음돌이 있다. 홈이 있어 밀면 굴러가게 되어 있다. 그 내부에 여러 개의 석굴이 있는데 대부분 이 정도의 무덤은 가족묘로 사용된다. 죽으면 바로 당일 묻는데 안식일에는 묻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의 시체는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아리마대의 요셉이 빼내었던 것이다(막 15:42). 시체를 석굴에 놓고 썩는 냄새를 방지하기 위하여 침향과 몰약을 바르고 세마포로 염을 한다. [사진=임진권 기자]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인류의 4대 성인으로서 소크라테스, 예수, 싯다르타, 공자의 이름을 외워왔다. 실존철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였던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이 네 사람의 삶과 사상의 전기를 한 책에 모아 낸 것을(1957년 출간) 내가 대학시절에 읽은 기억이 있는데 별다른 인상이 남은 것이 없다. 그때만 해도 동서문명의 호상이해의 수준이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당시 어린 나의 판단력으로도 그의 서술이 원전어학의 바탕을 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명을 주는 치열한 논리라고는 엿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튼 네 사람의 성인 중에서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우리가 역사적 인물로 느끼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뮈토스(신화)를 벗어난 로고스(이성)의 화신이며, 확고한 역사적 인물인 철학자 플라톤의 스승으로서 그의 생애가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났다. 그는 부활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자(孔子, Confucius) 또한, 춘추말기 노(魯)나라의 사상가로서 열국을 주유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이야기는 뮈토스적 색깔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는 거로(去魯: 노나라를 떠남)와 귀로(歸魯: 노나라로 돌아옴)의 역사적 삶의 역정을 통하여 ‘스승’으로서, ‘육예(六藝)의 편찬자’로서 확고한 이미지를 남겼을 뿐이다. 그는 위대한 교육자였을 뿐이다.

나는 이 분묘 속에 들어가 보았는데 석굴이 다섯 개 있었다. 예수를 찾아간 세 여자들이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도망쳐 나온(막 16:8) 그 현장의 분위기를 잘 전해주고 있다.

역사적 인간으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싯다르타와 예수인데, 싯다르타의 경우 그의 삶에 관한 신화적 서술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싯다르타가 마야 부인 옆구리에서 출산되었다든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신화적 양식의 설화일 뿐 어느 누구도 그것을 사실로서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의 출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삶의 전 과정에 하등의 이적(異蹟)적 요소가 없는 것이다. 정상적인 두 부모의 성적 결합에 의하여 출생되었으며, 정상적인 환경 속에서 왕자로서(혹은 부잣집 도련님 정도?) 성장하였고, 또 매우 정상적인 삶의 회의과정을 거쳤고, 또 당대의 정상적인 습속에 따라 출가(出家)하였고, 고행 끝에 득도하였다. 그리고 아주 평범하게 늙어서 상한 음식을 잘못 먹고 심하게 설사를 하다가 쿠시나가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숨을 거두었다. 출생과 죽음에 아무런 기적이나 순교의 그림자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이미 AD 4세기경(중기 대승불교)에는 역사적으로 실존한 구체적 싯다르타와 진리의 화신으로서의 영원한 추상적 싯다르타를 구분해버렸다. 전자를 색신(色身, ra-kya)이라 부르고, 후자를 법신(法身, dharma-kya)이라 불렀는데, 이 색신과 법신의 이신(二身)사상으로 역사적 인격체로서의 불타와 진리로서의 법(法, dharma)을 구현하는 불타와 혼동될 필요가 없어졌으며, 색신은 색신대로, 법신은 법신대로 화려한 발전을 해나갈 수 있었다.

인류의 4대 성인 중에서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자는 오직 예수 한 사람일 뿐이다. 복음서라는 예수 전기문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적(miracles)과 신화(myth)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적과 부활이다. 예수의 탄생설화는 오리지널한 복음서 마가복음에는 언급도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이해하는 데 하등의 핵심적 주제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삶의 행적 자체가 이미 마가복음에서부터 이적을 행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귀신을 내쫓고, 불치의 병자를 고치고, 배고픈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 다니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빛으로 변모한다. 송장이 되어 썩은 냄새가 펄펄 나는 나사로를 살려내는 기적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타나지만, 이 모든 기적은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과 하나의 연속적 테마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예수의 모습에서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복음서 내러티브의 대전제는 이미 부활로 확정되어 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며, 죽기 위해서는 수난(Passion)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난에 이르기 위해서는 체제를 뒤흔드는 많은 혁명적인 언행을 해야 한다. 그 혁명적인 언행 속에 또 우리의 인과적 상식을 뛰어넘는 이적이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전제가 없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예수는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로서 묘사된 예수가 바로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 속의 예수일 뿐인 것이다. 부활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은, 인과적 사실의 규명으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포(proclamation)의 양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선포에 해당되는 희랍어로서 케리그마(kerygma)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는 분명 초대교회의 케리그마(Church Kerygma)의 소산인 것이다. 선포, 즉 케리그마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예수는 예수의 색신(色身)이 아닌 예수의 법신(法身)이다. 그러나 물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법신과 색신을 분리하지 않으며, 예수의 법신이 곧 색신이라고 믿는다. 즉 케리그마로서 선포된 부활의 예수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역사 속에 산 한 인간의 실제적 사건이라고 믿는 것이다. 복음서가 노리고 있는 초대교회의 정황은 뮈토스적 세계와 로고스적 세계를 혼융(混融)시키는 기묘한 신념체계를 자신의 실존적 삶의 의미로서 받아들이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말해야 할 것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떠한 경우에도 신화적 예수의 권위, 혹은 그럴듯한 신학적 포장에 의하여 왜곡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인성을 부여해야만 가현론의 픽션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인성은 매우 정직한 보편적 인성(universal humanity)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부활의 예수가 될 수가 없다. 역사적 예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예수에게 그러한 이적과 부활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일 뿐이며, 이성의 논의를 벗어나는 불합리한 신앙의 특수상황에 속해버릴 뿐이다. 부활의 예수는 기독론(Christology)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기독론으로써 예수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운동(mythic movement)의 한 고리를 캐는 작업일 뿐이다. 우리가 누누이 살펴왔지만,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동서고금의 모든 신화의 전형적 양식이며, 그것은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의 한 아키타입일 뿐이다. 예수의 신성만을 고집하여 인성을 왜곡한다면 그러한 예수는 신화적 예수가 되고 말 뿐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역사적 예수를 간곡히 말하려고 하는 뜻은, 예수를 결코 신화운동의 한 소산으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시리스나 디오니소스와 같은 단순한 신화적 상상력의 한 소산으로서 예수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초기기독교의 형성사를 정직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소아시아로부터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광범위한 초기 기독교운동의 저변에는 신화적 존재가 아닌, 확고한 역사적 인물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인물의 정직한 모습 속에는 모든 이적과 부활의 신화적 요소가 배제되어야만 한다. 과연 그러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기독교는 기독교일 수 있는가? 나는 당당히 자신있게 외친다: 오히려 기독교에서 그러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할 때만이 기독교는 진정한 기독교가 된다! 이적과 부활이 없이도 예수는 예수일 수 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참모습이다!

이러한 나의 논의를 불경스럽게 생각할 사람들을 위해 이제 우리는 복음서 그 자체를 분석해야 한다. 모든 것은 기독교인들이 신봉하는 성서 그 자체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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