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6일 토요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32> 선민의식과 종말론하나님을 버리고 돈을 섬기려느뇨?

도올 김용옥 제39호 20071209 입력

예루살렘에서 사해 윗동네에 있는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베다니라는, 복음서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는 동네가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요 11:18) 된다고 적혀 있는데, 실제는 한 6㎞ 정도 떨어져 있다. [임진권 기자]

열 해를 갈고 나니 칼날은 푸르다마는 쓸 곳을 모르겠다 춥다 한들 봄추위니 그 추위가 며칠이랴 자지 않고 생각하면 긴 밤만 더 기니라 푸른 날이 쓸 데 없으니 칼아 나는 너를 위하여 우노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이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시기 직전에 남긴 미완성 유고 속에 들어 있던 시다. 내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는 시, 천상적선(天上謫仙)이라 부른 이태백의 천만 시어(詩語)보다 내 가슴을 더 날카롭게 후벼 파고든다.

그 추위가 며칠이랴! 참으로 봄추위일까? 기나긴 동면일까? 도마복음 책갈피를 열고 보니 내 심장이 얼어붙고 이 민족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운다. 에고고! 일편단심 무애생(無涯生) 단재의 써늘한 주검이 고작 이토록 부와 권력에 눈이 먼 더러운 영혼들의 난무를 위한 것이었던가? 갈고 또 갈아둔 푸른 날이 쓸 데 없게 되었고나! 칼아! 나는 너를 위하여 우노라! 선거가 아니라 민주의 조종(弔鐘)이 울리는도다. 오늘날 이 땅의 민주는 소수의 정치인이 만든 것이 아니요, 정의로운 뭇 선남선녀들의 피 끓는 가슴이 피를 토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피 끓는 가슴들조차 얼어붙고 말았으니 이제 무엇을 말하랴!

도올조차 할 말 잃고 암반처럼 무디어지고 말았으니 서슬 퍼런 칼날을 세울 길 없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와디(사막의 협곡 건천) 위에 있는 작은 구멍들이 쿰란 동굴이다. 가장 왼쪽에 있는 삼각형의 동굴이 제4동굴인데 이곳에서 가장 많은 쿰란 문서가 발견되었다. 동굴은 쿰란공동체의 도서보관 창고였다.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묵묵히 백두대간의 일맥이라도 지키는 암석 노릇이나 할 수 있으련가? 우노라, 우노라! 무디어진 도올을 위해 우노라! 예수는 말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 주인을 증오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한 주인을 지극히 섬기면 다른 주인을 경멸하게 될 따름이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느니라.”(Q 73, 마 6:24, 눅 16:13)

한국인들은 지금 ‘경제’라는 미몽에 사로잡혀 시대정신을 후퇴시키고 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돈신을 섬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성서에 쓰인 돈이라는 희랍어는 ‘맘모나스(mammons)’이다. 그것은 탐욕과 부의 신이다.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라면 돈이라는 신을 섬겨서는 아니 된다. 예수는 또 말한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을 청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청하라. 그들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라.”(눅 14:12~14, Q보충자료)

예수는 물론 돈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돈은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베풂’의 대상이다. 상대적인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다.

불트만은 말한다: “종말론적 분위기라고 하는 것은 기대나 계산이나 희망이나 염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선민이라고 하는 의식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종말론이라는 것은 우주가 종말을 고하게 되리라는 기대나 희망이나 우려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선택되었다고 생각하는 어떤 그룹의 인간들을 지배하게 되는 의식체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어찌 12명만 있으리오? 마가의 드라마에 12제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곧 이스라엘민족의 종말론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도래하는 천국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12제자가 각기 맡아 다스리게 되리라는 종말론적 선포가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에게 12제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 사후의 초기공동체의 한 창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선민의식은 필연적으로 선택된 자들과 선택되지 않은 자들의 분별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은 필연적으로 선택된 자들은 하늘에 속하고 선택되지 않은 자들은 땅 즉 세계(코스모스)에 속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곧바로 하늘은 빛이고 세계는 어둠이라는 이원적 사유로 연결된다. 여기에 플라톤적 사유가 결합되면 하늘이라는 이데아만이 실재하는 것이 되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그림자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멸절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 도덕적 이원론까지 첨가되면, 선택된 자들만이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이며, 선택되지 못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악의 구현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 이 세계는 멸절의 종말로 치닫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이다.

공관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는 “이 세대”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심층구조적 언어이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눅 11:29, 마 12:39, 막 8:12)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고 충고하지만 “이 세대”에 대한 지나친 가치폄하는 결국 종말론적 사유로 귀결하게 된다.

나 도올은 묻겠다. 예수는 과연 종말론적 사상가였을까? 지금 용산 전쟁기념관에 예수와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 실존했던 쿰란공동체(BC 150~AD 68)의 실제 면모가 진열되어 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 공동체야말로 철저히 종말론적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와 무관하게, 종교적 성향과 선민의식이 짙은 유대인들의 대부분의 공동체운동은 기원전 세기부터 이미 종말론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쿰란공동체의 성격이 초대교회운동으로 그대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거부한 갈릴리 사람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는 그에게는 철저한 인간평등사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저주 아닌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이것이 바로 지혜담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핵심사상이었다. 묵시담론은 후대 기독교공동체의 성격에서 발생한 것이다. 예수는 오히려 묵시담론을 거부한 사상가였다. 재미있게도 도마복음서에는 묵시담론이 없다. 이것이 바로 도마복음서의 성격이 Q복음서보다도 더 오리지널한 예수의 담론을 드러내고 있다고 추론케 만드는 한 근거가 된다.

여태까지 나는 도마복음서의 주변 상황에 관하여 너무도 많은 말을 하였다. 그것은 도마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하여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될 필연적 과정이었다. 도마복음서를 한낱 외경으로 간주하는 어리석고도 피상적인 천견(淺見)을 일축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나는 도마복음서를 강론하고자 한다.

이 붓을 놓기 전에, 대선을 앞둔, 우국의 심정으로 예수의 말씀을 인용한다. 이 땅의 신앙인들이여! 잘 새겨보아라!

“너희가 구름이 서쪽하늘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하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심히 덥겠구나’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하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의 징조를 알고 하늘의 표정을 읽을 줄 알면서, 어찌하여 지금 여기 이 세대의 징표를 분변치 못하느뇨?”(Q 59, 마 16:2~3, 눅 12: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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