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6일 토요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29>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냐?바울과 Q

도올 김용옥 제36호 20071117 입력

여기 보이는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헤롯 대왕이 지은 제3성전의 서벽(Western Wall)이다. BC 960년에 완성된 솔로몬 성전(제1성전)의 자리에 세워진 것일 뿐 솔로몬 성전의 벽은 아니다. 헤롯 대왕의 제3성전은 BC 18년에 착공되어 알비우스 총독대에 완성되었는데, 역사적 예수가 본 성전의 벽은 바로 이것이다. [임진권 기자]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비탄의 길(Via Dolorosa)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 비탄의 길에는 14군데의 순례 포인트가 있다. 이 사진은 성분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 내의 제12역에 해당되는 곳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고 숨을 거두는 순간의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모든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가장 많이 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최초로 성지순례를 했을 때 이곳을 지정했고, 그 후 335년에 이 성분묘교회는 완공되었다. [사진=임진권 기자]

Q복음서의 발견은 초기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관점의 변화와 자료해석의 발전적 계기를 제공했다. 초기기독교 역사는 신학자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인문학자나 인류학 전공자의 탐구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의 연구방법은 암암리 교회라는 크리스찬 커뮤니티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그 교회조직의 이해와 요구에 따라 형성된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1세기 초기기독교의 역사적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우선 확고하게 통일된 교회조직이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가설 자체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당시 교회라는 것은 오늘과 같이 교리나 성경을 전제로 하고 위계적 인간관계를 토대로 하여 묶여진 타이트한 조직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매우 느슨한 연대 같은 것이었다. 팔당 신앙촌이나 쿰란 공동체처럼 같이 산 것도 아니고, 위계적 조직도 없었고, 신학적 통일성도 없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있고 그 교회가 신학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신학이 선행하고 그 신학의 부산물로 교회가 형성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신학 자체가 기성의 어떤 교리시스템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과 개개인이 감응해 가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만들어간 신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신학은 완성된 이론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되어 가는 신학이며,
우리의 삶 속에서 행동을 수반하는 신학이기 때문에 전문용어로는 수행적 신학(遂行的 神學, Performative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재미있는 사실은 Q복음서나 도마복음서의 가라사대 파편들은 일체의 이론적 체계나 주제적 연관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예수 말씀 파편들의 아주 자의적인 모음(random collection)일 뿐이다. 바로 이러한 자의적 성격이야말로 초기집단이 예수 삶의 이야기의 일관성을 통해서 형성하고자 했던 교리적 예수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의미있었던 것은 오로지 예수의 말씀일 뿐이었다. 나의 실존에 의미를 가져다 주는 개개 말씀 파편만이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초기집단의 성격을 파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 Q복음서나 도마복음서가 성립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제11역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것은 예수가 죽은 후의 모습이 아니라 산 예수를 십자가에 눕혀 못을 박는 장면이다. 무릎 꿇고 애통하는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어머니 마리아는 옆에 서 있다.

초기기독교사에서 그동안 깨어지기 힘들었던 엉터리 가설 중의 하나가 예루살렘교회(Primitive Church of Jerusalem)의 존재였다. 그것은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 어느 2층 다락방(막 14:15, 눅 22:12)에 사도들의 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교회의 리더십은 예수의 혈육인 친동생 야고보(James)가 감독으로서 장악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6장 3절에는 나사렛의 사람들이 성인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고 의아스러운 듯, 매우 상식적인 고백을 퍼붓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마 13:55~56에도 유사한 언급이 있다.)

이 언급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최소한 4명의 남자형제가 있었으며 “누이들”이라는 복수형의 언급을 보아 2명 이상의 자매가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를 포함하면 최소한 7남매의 가족이었던 셈이다. 시카고 드폴대학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가인 존 도미닉 크로산(J. D. Crossan)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화라는 픽션을 전제로 하지 않고 생각한다면, 야고보는 예수 가족 중에서 가장 의젓했던 ‘맏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예수가 어렸을 때 죽었고, 이 대가족의 리더십을 큰형 야고보가 담당했다. 그는 얼굴과 인상착의가 예수와 매우 흡사했으며, 인격적으로도 매우 원만하고 통솔력이 높았으며, 동생 예수의 천국운동을 뒤에서 후원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난 그 부활한 예수는, 예수와 똑같이 생긴 야고보가 예수의 사후 교단을 수습하기 위하여 위로방문하러 다닌 스토리들이 와전되어 기록된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애정을 포기할 수 없었고, 예수의 죽음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억울한 죽음이었다고 한다면, 예수에 대한 사무치는 정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야고보를 보았을 때 예수가 살아 돌아온 느낌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아니 될 중요한 사실은, 초기기독교사가 예루살렘교회의 권위로부터 유래되는 연속적 계보 속에서 기술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분명 예루살렘에 어떤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한 그리스도 전파운동도, 역사적 예수와 무관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 예수운동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실존인물이었다. 그는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동포 유대인들을 박해했던 인물이었다. 이 바울(사울)이 갑자기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신비로운 개종체험(conversion experience)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종체험은 어디까지나 바울 개인의 실존적 의식 내에서의 사건일 뿐이다. 사도행전에는 이 사건이 세 번이나 기술되어 있는데(행 9:3~19, 22:6~16, 26:12~18)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 설명방식이 각기 다르다. 3개의 다른 전승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바울의 자서전적 고백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서한이라고 하는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은 그의 신비적 개종체험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기존 교단의 인가도 받지 않았다. 그는 아라비아사막으로 갔다(갈 1:17). 그는 모세나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영감을 얻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막의 고독의 심연에서 새로운 삶의 진로를 결정했던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바울의 복음은 역사적 인간들과 일절 관련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의 뜻은 전혀 개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알지 못한다. 바울은 오직 그의 개종체험 속에 현현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을 알 뿐이다. 바울의 운동은 역사적 예수의 운동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에 관한 신화적 운동이었다. 바울을 우리가 희랍적 사유에 깊게 젖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희랍인들에게는 뮈토스(신화)와 로고스(이성)가 구분 없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과 같은 신화적 어휘는 그들의 일상언어였다. 플라톤은 로고스를 위하여 뮈토스를 활용했지만, 바울은 뮈토스를 위하여 로고스를 활용했다.

그러니까 예수가 죽은 AD 30년경 이후에는 어떠한 통합적 교회조직도 없었으며, 예수에 관한 운동은 역사적이든, 신화적이든, 이성적이든, 공동체적이든 모두가 산발적으로 행하여진 비조직적 운동이었다. 그것을 예루살렘교회를 전제로 해서 바울의 전도여행을 포함하여 일사불란하게 묶어 생각하는 것은 사실의 정황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다. 이러한 산발적 운동 중에 역사적 예수의 전통을 이은 가장 진실한 운동이 바로 Q복음서와 도마복음서를 잉태시킨 Q그룹운동이었던 것이다. 이 Q그룹의 사람들은 매우 소규모의 집회를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만을 소박하게 기억하고 사모했다. 그들은 오직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어떻게 이 땅 위에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만을 고민했다. 실상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핵심은 이 Q그룹을 통하여 전승된 역사적 예수의 말씀이다. 그 핵이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1세기 말경에 비로소 ‘기독교’라는 어떤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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