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7일 화요일

일본을다시본다 49 제3부 일본주식회사⑧국산품애호운동 : 매일경제

일본을다시본다 49 제3부 일본주식회사⑧국산품애호운동 : 매일경제:

일본을다시본다 □49□ 제3부 일본주식회사 ⑧ 국산품애호운동 질나빠도 철저히「우리것」사용 기업 기술혁신·국산화로 화답 명치이후 뿌리깊은 전통…국내산업 발전 원동력 년중기획 조규하 <전경련 전무> 이제 일본은 특별히 국산품애호운동을 벌일 필요가 없다. 일본제품은 세계 제일의 상품이고일본사람이 사용하는 일용품,그것을 제조하는 생산재가 거의 모두 일본산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공작기계 반도체 컴퓨터 복사기전화 통신 시계 카메라 음향·영상기기 주방욤품 냉장고 세탁기에어컨 TV 비디오 옷가지 의료기기등 모두가 세계제일로 값이싸고 품질이좋으며 아프터서비스가좋다. 굳이 국산품애호운동이라는 작위적인 조치나 운동이 없어도 일제상품을 국민은 선호한다. 외제배격 국민의식 강해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명치(메이지)유신이후 근대화과정 1백년동안 온국민의 국산품애호운동과 경제인들의 끊임없는기술혁신에 의한 국산품 질높이기 운동이란 피나는 노력과 정부의 산업정책등 거국적인 노력과협조가 밑바탕이 되었다. 20~30년전까지도 거의 모든일본제는 값은 싸되 질이 떨어지는 조잡품이었다. 그들 스스로화제(와세이)라는 낱말로 일본국산품을 질 나쁜 상품으로 비하했다. 국제경쟁력이 없는 일본제품을국제경쟁력이 있는 일본상품으로키워내기까지는 일본의 모든 국민,민과관,경영자와 기숨자,기술자와 공원,생산자와 소비자의 합치된 노력이 있었다. 애국심이 강한 국민들은 질이나빠도 되도록이면 국산품을 사용하는것을 국민된도리로여겼다. 기업보국의식이 강한 경영자기술자 공원등 경제인들 역시 국산품의 질을 높이고 값이싼 상품을 개발하는것을 기업인들의 도리로 여겼다. 소비자는 소비자운동을 통하여 품질 가격 아프터서비스의 질적개선을 요구했고 기업인들은 전종업원이 이에 화답하여 기술혁신을 전개해왔다. 정부는 민간의 국산품애호운동을지도하는 한편 기업인은 기술혁신운동을 지원해왔다. 일본사람들은 외제를 좋아하지않는다. 그 흔한 롤렉스시계를찬 사람이 별로 없다. IBM컴퓨터보다는 부사통의컴퓨터를 사용해왔다. 일본 국왕도 일본자동차의 질이 벤츠나 캐딜락등 외제차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시대부터 일본차를 사용했다. 이제 대중화된 골프채나 스키기구도 질나쁜 일본제를 사용하는것이 보통이었다. 일본극우단체청년들은 가끔 외산고급차가길에 서있으면 차를 부숴버리고형무소에 자랑스럽게 간다. 이같은 범법까지 일본사람들은 너그러이 이해하려든다. 이같은 국산품애호운동은 명치유신이후 1백년동안 계속됐고 그동안에 생산업자들은 국민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의 국산화에 성공,그질을 높여왔다. 외제를수입,모방하면서 시작된국산화운동은 질을 높이기 위한끊임없는 기술도입과 그에따른기술혁신에 의해 촉진되었다. 일본의 기술혁신은 외국기술의 도입,흡수,완전한 소화,그의응용,새로운개발로 이어졌다. 직인 기술자의 철저한 장인정신은 이것을 가능하게 했고 그들은 소비자인 국민이 기다려주는 동안 선진국상품에 버금가는,그 다음에는더좋은상품을 만들어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경쟁역확보 정책적 배려 정부는 국민의 국산품애호운동과 기업종사원들의 국산화운동을적극 도와왔다. 외제기계는 수입되면 역엔지니어링으로 분해되어 국산화가 가능한 부품과 부분부터 국산화에착수하도록했고 국산화된 국산제1호기에는 보조금이 지급됐다. 국산화를 위해 가격경쟁력이없는 산업은 철저히 보호됐다.전통적으로 일본은 외화에 대해일본원화의 저평가정책을 써왔다. 높은 환율때문에 외제는 비싸고 국산품은 외제에 비해 싼,그런 가격구조를 유지하도록 정책을 펴왔다. 뿐만아니라 전통적으로 관세·비관세장벽을 높이쌓아 국내시장·상품을 보호해 왔다. 이것은 극히 최근까지의 사실이다. 외국의 개방압력에 대해 버틸수 있을때까지 끝까지 버텨 국내산업이 완전한 경쟁력을 갖추게 될때 그분야를 단계적으로 개방·자유화했다. 바다로 둘러싸인,게다가 선진국과 지리적으로거리가 먼 일본은 밀수로 부터도보호하기 쉬운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공산품은 비교적 일찍이 개방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었는데도수입절차,검사기준,각종 규제법령등의 비관세 장벽으로 수입을방해했고 업자들로 하여금 각종조합·유통조직을 활용,수입품의소비자 접근을 막아왔다. 이같은 정부의 수출입 정책은대다수국민의 지지와 협조로 가능했다. 대다수국민은 국산품애호가 곧 애국심이요,선진화의 길이라는 확신속에 정부정책에 호응했다. 이같은 보호·지원속에기업은 국산화에 성공하여 국산화비율을 높이고 국산품의 질을높여 드디어 국산품은 세계제1의 국제수준의 상품으로 발전돼갔다. 뿐만아니라 일본 국산품은일본소비자들의 체격 취미 기호에 맞게 응용 개발되어 일본사람들로 하여금 일본국산품을 더선호하게 만들었다. 키가큰 서양사람이 사용하는 섬유기계를 들여와 키가 작은 일본사람도 편안한자세로 발로 밟을수있고 손을 놀릴수 있도록 개조한다든가,길이좁은 일본에 맞는 소·중형차를개발한다든가 한것이 그예이다. 어떻든 일본의 국산화정책은국민의 국산품애호운동과 그정신,그를 기저로한 정부의 국산품보호정책,그 보호와 성원속에 최고품질의 국산화를 위한 생산자의 피나는 기술혁신이라는 삼위일체속에 성공을 거두었다. 원료들여다 고가품 수출 이같은 성공은 19세기말 개국과 동시에 고양된 민족주의속에 진행된 구미선진국 따라잡기운동과 부국강병정책에 의한 일본근대화단계,그다음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이폐허와 실의,기아와 공포속에경제전쟁으로 전환한 현대화 단계를 거치면서 그 실속을 채워온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의 제국주의로 부터 나라를 지키는 길은 부국강병,공업화의 길밖에 없었다. 강병을 위해중공업화가 시작됐고 국민생활의희생속에 중화학공업은 상당한국제수준으로 까지 발전됐다. 이단계에서 일본제국주의는 전쟁을도발했고 주로 미국을 적으로한태평양전쟁은 월등한 미국의 기술력과 경제력때문에 수백만명의사상자를 내고 온도시가 폐허로변한채 무조건항복이라는 패전을 맞이하게 됐다. 패전한 일본국민에게는 기아와공포,물질적 궁핍밖에 남은것이없었다. 이런상태에서 그들의 이성적선택은 경제재건,성장발전에의한 생존,그리고 국가재건,근대화,선진화밖에 없었다. 이런 전쟁과 패전이라는 역시적경험이 그시대 일본국민의 에토스에 커다란 영향으로 작용한것이다. 이것이 곧 국산품애호정신이요,질높은 국산품 만들기노력이요,외국의 경제지배로 부터 자국시장을 지키려는 관료들의 몸부림이었다 할 깃이다. 이3자의 합심·협력·컨센서스로국산화애호운동은 성공했다. 전쟁기간중에 고양된 민족주의속에서 강화된 집단규율과 훈련,공생공사하는 전우애와 전사공동체의 체험과 의식,보국회조직과 그 구성원리,산업보국이강조된 기업,절대적 궁핍,외적인 미국의 높은 섕활수준과 기술수준,그리고 경제력,이런것들이 비록 전쟁에는 졌지만 살아남아야할 일본국민의 생존욕구를북돋웠고,이런것들이 패전일본국민들의 국산품애호운동을 촉진시켜일본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사람들의 국산품애호운동은 살아남기 위한 경제투쟁이었다. 그러기에 이 운동은 생존을위한 투쟁이었고 이 생존투생이일본경제를 발전시켜 선진화대열에 끼게끔 했다. 그결과 일본이 수입하는 것은총수입의 65%가량이 원료이고기계류와 소비재는 각각10%정도밖에 안된다. 반면에 수출은기계류와 금속제품이 80%,화학제품과섬유및 섬유제품 기타잡제품이20%정도이다. 말하자면 원료만들여다가 높은 부가가치상품으로만들어 수출하는 가공무역형국가로 발전하고 있다. 이젠 연간 수백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내는 경제대국으로 변모한 일본의 오늘을 만들어낸 원동력은 바로 이 일본국민의 화혼양재라는 표어속에 지속된 국산품애호정신과 운동이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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