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5일 일요일

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③ 대동법 vs 호패법의 격돌 - 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

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③ 대동법 vs 호패법의 격돌 - 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

김육에 의해 뿌리를 내린 대동법은 단순히 조세 체제의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대동법은 조선 후기 상공업과 시장경제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방 토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던 공납제 시절에는 중앙관청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드는 관영 수공업 이외의 민간 수공업은 발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나 쌀만을 조세로 수취하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부터 중앙관청은 소요 물품에 대한 일정 비용을 지출해 공인(貢人)이라고 하는 민간 상인에게 조달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공인 계층은 관청과 민간 수공업을 중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보통 관청에 납품할 물품을 한양의 시전이나 지방의 장시들을 통해 조달하는 한편 민간 수공업자들과 거래하거나 혹은 직접 수공업장을 개설하기도 했다. 농민들 역시 쌀이나 베를 마련해 조세를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산한 여러 다른 농산물이나 물품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상업적 농업을 경험하거나 상품 교환 경제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것은 다시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은 이렇듯 조선 후기 농업, 수공업, 상업의 생산 및 교환 활동을 자극하면서 시장경제의 싹을 틔웠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조선이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대동법과 같은 경제정책으로 양대 전란의 후유증을 말끔히 털어 내고 새로이 사회적·경제적 활력을 되찾은 17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17세기를 들여다보면 훌륭한 경제 관료 한 사람과 좋은 경제정책 하나가 국가 경제와 백성들의 삶을 백 년 정도는 거뜬히 부유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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